한 성령께서 다른 말씀을 할 수 있는가?

조회 수 764 추천 수 55 2009.09.21 19:54:08
한 성령께서 다른 말씀을 할 수 있는가?


[질문]

가끔 담임목사님 혹은 사역자가 “성령께서 제게 감동을 주십니다.”, “교회가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마음을 주십니다.”, “건축을 하라는 마음을 주십니다.” 등등 성령의 인도, 혹은 성령의 감동이라는 말을 쓰곤 하는 데요. 때로는 사도행전의 일들처럼 마치 다른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오해를 살만한 일들이 생길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한 마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성도에게는 이렇게 혹은 어떤 성도에게는 저렇게 다른 마음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사도행전의 말씀처럼 어떠한 결정이든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의 뜻대로 이루어지겠지만 막상 그런 혼란스런 상황들에 부딪힐 때에는 어떤 것이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제대로 분별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그리고 실제적인 삶에서는 또한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성경적인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행 20:22): 지금 나는 성령님의 인도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만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릅니다.
(행 21:4): 우리는 거기서 신자들을 만나 7일 동안 머물렀다. 그런데 그들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하였다.
(행 21:14):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으므로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서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답변]

바울이 세 차례의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직전에 밀레도, 두로, 가이사랴 등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성도들이 큰 핍박이 기다릴 것이라는 성령의 경고를 전하면서 바울을 만류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오히려 성령의 인도라고 말하면서 모든 만류를 뿌리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마치 한 성령이 사도와 성도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달랐던 것처럼 보여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한 성령이 서로 상충되는 메시지를 성도들에게 줄 수는 결코 없습니다. 사도행전 20,21장에 걸쳐서 기록된 이 경우는 특별히 장래 일을 예언한 것이기에 더더욱, 아니 모든 성령의 계시는 반드시,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각기 내용이 다르면 당신의 뜻을 당신 백성에게 명료하게 계시하기를 원하시는 질서의 하나님이 당신다우심을 스스로 손상, 변경, 포기하는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일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이런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사실은 우리가 성경 기사를 천천히 분석해가며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대충 훑다시피 해서 그 대의(大意)를 문자적으로만 파악하는 식입니다. 뜻이 분명치 않거나, 논리적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거나, 다른 부분과 모순이 되는 것 같은 경우는 가능한 주석을 참조하여야 합니다.

주석서가 따로 없어도 앞뒤 문맥을 연결해서 전후사정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또 문법적인 세밀한 분석도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말씀 내지 역사하신 부분과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정확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물론 성경전체에 일관된 하나님의 구속사에 비추어 해석의 정당성을 최종적으로 점검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성령의 메시지는 같았다.    

이 경우는 결정적으로 성령이 주신 메시지와 그에 대한 반응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해석상의 혼동이 생긴 것입니다. 성경을 꼼꼼히 따져보면 성령이 주신 메시지는 바울과 성도들 모두에게 동일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핍박이 기다릴 것이라는 똑 같은 경고를 받았습니다. 성령이 주신 계시는 여기까지입니다. 그에 대한 반응이 바울과 성도 간에 달랐던 것뿐입니다. 성경 기록을 가지고 살펴보기로 합시다.

(행20:22-24)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마게도니야 지역을 순례할 때에 가는 곳마다 “예수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로 인해 어떤 식으로 핍박을 받을지 까지는 아직 모릅니다. 단지 감옥에 갇히는 죄수의 신세가 될 것이라는 경고만 받았습니다.

또 그가 계시 받은 경로가 환상, 직접적인 음성, 꿈, 스치는 생각, 내면의 미세한 음성 등등 중 어떤 것이었는지 확실치 않습니다. 그중 여러 방식이 함께 사용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방문지 교회의 성도들이 동일한 계시를 받아 경고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와 성도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문제를 두고 가는 곳마다 함께 간절히 기도했었고 그 응답으로 핍박 경고를 수차 받아 전혀 의심치 않을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는 까닭을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직접적 증거나 계시로 즉, 올라가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또 매임을 받았다고 해서 가기 싫은데 억지로 가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성도들까지 경고 받아 만류했으니 바울도 응당 여행 계획을 취소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뜻입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예루살렘에 가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선교지의 이방인 교회들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를 당시 기독교의 본산 격인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여 함께 위로, 권면, 도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경고를 받을수록 가고 싶은 열망이 더욱 굳어졌다는 뜻으로 심령에 매임을 받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자신이 심령에 매임을 받았다고 해서 개인적 욕심과 계획을 고집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심령에”의 원어가 개인의 심령인지(in the spirit), 하나님의 성령(by the spirit)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기오스(holy)'가 붙어있는 23절의 성령(Holy Spirit)과는 달리 단지 '프뉴마티(spirit)'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심령에”라고 번역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각성의 성도와 자신의 내면의 음성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의 경고를 이미 수차 받아 위험이 충분히 예견되었지만 이상하게 더더욱 가고 싶어지고 또 반드시 가야겠다는 내적 압박감을 확실히 느꼈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심령에 성령이 이미 내주하기에 만약 하나님이 권면, 동의, 허락하지 않았다면 내적 압박감보다는 오히려 의심, 불안, 초조가 생기거나 최소한 평강이라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요컨대 바울에게 성령이 주신 메시지가 “핍박이 있으니 가지 말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핍박이 있다고 경고를 주신 것까지가 성령님이 하신 역사이고 오히려 가려고 더 굳게 마음먹고 결행한 것은 성령님의 강권에 따른 바울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래서 밀레도로 불러올린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더 이상 자기를 만나지 못할지 모른다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고 장로들도 슬퍼만했지 그 여행을 만류하지는 않았습니다.(행20:36-38)

(행 21: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본문의 뜻이 가장 애매합니다. 우선 제자들도 바울에게 핍박이 기다린다는 성령의 경고는 분명 받았습니다. 문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까지 받았는지 여부인데 그러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 이유는 우선 성령의 “감동으로” 번역된 헬라어 전치사 ‘디아’는 아주 광범위한 뜻으로 사용됩니다. 주로 어떤 행동을 하게 된 이유나 근거를 나타냅니다. 우리말로는 “때문에” 혹은 “통하여”라는 뜻인데 영어성경에는 ‘by’ 대신 ‘through’라고 번역했습니다. 쉽게 말해 들어가지 말라고 권한 행동의 주체가 성령이 아니라 제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도 “제자들이 ...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고 그 주어로 “제자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따라서 들어가지 말라는 만류는 제자들 스스로 판단 행동했던 것인데 그 이유는 위험이 기다린다는 성령의 경고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아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자 베드로가 말린 것과 같은 경우로 이해하면 됩니다.  

(행 21:10-14)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지 말라”는 성령의 직접적 경고는 아무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런 기록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16:6)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16:9)

이전에 이미 구체적으로 가라, 가지 말라는 계시를 직접 받았던 적이 있는 바울로선 이번에는 그런 메시지가 전혀 없었기에 그에 맞추어 반응했습니다. 또 위험해도 올라가라는 미세한 음성을 계속 더 강하게 듣고선 여행 결심은 더 굳어졌습니다.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는 표현이 무슨 뜻입니까? 자신의 확신과 정반대되는 말을 자꾸 하니까 왜 이리 내 뜻을 몰라주나 아쉽고 안타까웠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한 마디로 이 경우는 성령의 메시지는 동일한데 바울과 성도들의 반응만 각기 달랐습니다.  성도들의 반응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바울을 아끼는 마음으로 당연히 만류해야 합니다. 대신에 따져 보아야 할 것은 성령의 메시지가 상충되었는지가 아닙니다. 왜 그런 상이한 반응들이 나타났으며 또 그런 경고를 미리 주신 뜻이 무엇이었는지 여부입니다.

성령 경고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

누차 강조하지만 성경은 무엇보다도 당시 상황에 비추어 하나님의 입장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이 경우 바울이 개인적인 뜻과 고집이 개입되었을 가능성도 물론 고려해 봐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그에게  초조, 불안, 의심이 들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고집을 계속 피운다면 “가지 말라”는 메시지를 본인과 주위 사람들에게 더 구체적이고도 확실하게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확신은 더 깊어가고 주위 사람 어느 누구도 가지 말라는 명시적 메시지는 받지 못했습니다. 또 아가보에게 바울의 수족이 결박당하는 모습까지 구체적으로 보였다면 구태여 일어나지 않을 일을 보여줄 리도 없습니다. 하나님도 이미 일이 필히 그렇게 진행되리라고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은 어차피 확정되어 있었다면 그럼에도 계속 경고를 보낸 뜻을 살펴야 합니다. 그 뜻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성경 기록 그대로 하나님은 바울에게 계속 경고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오히려 그의 결심을 더 굳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 성경대로 성도들로 계속 바울을 말리게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막게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교회 성도들로 바울을 사랑하여 하나가 되게 하며 그의 사역을 위해, 특별히 이번 예루살렘 방문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게 한 것입니다.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의 일차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방 선교에 대한 보고였습니다. 그가 이 일로 이방교회가 더더욱 완전 하나가 되는 모습까지 추가로 보고할 것 아닙니까?

성령이 사전에 앞일을 계시해주는 까닭은 일차적으로 그 일을 하되 굳건한 믿음과 온전한 헌신을 바쳐 하라는 권면 내지 경고입니다. 그 일을 못하게 하고 싶으면 아예 미리 막아주시거나 본인에게 평강이 없게 하거나 반드시 그 일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여건이 악화되게 만듭니다. 바울의 경우는 성도들의 걱정 어린 만류만 들었지 본인에게 불안이 생기거나, 반대 메시지를 성도들이 받았거나, 여건이 악화된 사실은 전혀 없었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로마로 항해하면서 그레데에서 과동하지 않아 유라굴라라는 광풍을 만납니다. 완전히 구원의 여망마저 사라졌다 싶을 때에 바울이 천사에게서 경고 겸 구원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행27;22) 배가 완전히 파손될 정도의 큰 풍랑을 겪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가오는 위험을 경고했지만 또한 위로도 되었습니다. 지금도 성령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투옥은 되겠지만 목숨에는 아무 손상이 없을 것도 미리 알린 것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하나님은 오히려 바울더러 꼭 예루살렘으로 가게 만든 셈입니다. 바울은 당시 로마보다는 스페인으로 가길 원했습니다. 지중해의 주변이 세상의 전부인줄 알았던 당시로선 흔히 스페인이 땅 끝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명령을 그대로 지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오히려 그를 로마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방 세계의 중심에 보내어 십자가 복음으로 세계를 뒤덮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받았던 소명이 무엇이었습니까? 특별히 이방인과 세상 임금들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전혀 계획 내지 예상을 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선교 생애의 마지막을 로마의 복음화에 바치도록 예정해 놓았던 것입니다. 그에겐 마지막 사역이자 가장 중요한 임무가 되었습니다.
  
바울과 제자들은 성령의 경고로 인해 더 이상 만나지 못하리라는 염려로 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슬피 헤어졌습니다. 또 남은 교회들이 앞으로도 그를 위해 얼마나 많이 기도해 주었겠습니까? 바울이 마게도니야와 소아시아 지역에 설립한 교회들은 이젠 상당한 체계를 갖추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로 바울의 마지막 사역을 더욱 적극적으로 후원토록 만들 계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라면 너무 그 신기한 능력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성도가 겪을 앞날의 일을 예언해주었다는 데에만 관심이 쏠립니다. 그래서 왜 바울과 성도에게 준 예언이 다를까 의아해 합니다. 성령님이 일구이언(一口二言)할 수 있으리라고 가정하는 것부터 사실은 아주 큰 잘못인데도 미처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성령의 동일한 경고에 대해서 성도들이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고자 했습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분입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성도 각자의 자발적 임의적 반응에 맡깁니다. 바울은 본인의 소명에 더 헌신 했고 성도들은 바울을 더 큰 사랑과 기도와 재정으로 후원하며 교회들이 온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처럼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 것까지도 하나님은 계획하고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여기서 한 칸 더 나가야 합니다. 바울더러 먼저 로마를 선교케 하려는 하나님의 전체 교회사적 관점은 이미 살펴봤습니다. 설령 바울이 성도들의 만류에 계획을 접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과 계획을 당신만의 방법으로 이루셨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위험을 경고만 했지 예루살렘으로 가라 혹은 가지 말라 분명히 말씀하지 않은 것은 선택권을 그에게 맡겼다는 뜻입니다. 그가 어떤 쪽을 택했어도 하나님으로선 상관없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아무리 만류해도 그가 듣지 않자 뭐라고 말했습니까?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바울이 설령 자신의 뜻으로 고집했을지라도 그 앞길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며 또 반드시 당신의 뜻대로 합력하여 선하게 이끄시리라는 것을 제자들은 믿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성도들이 서로 다르게 반응했어도 언성을 높이거나 얼굴을 붉히지 않고 화합한 것에 성령의 더 큰 역사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가끔 담임목사님 혹은 사역자가 “성령께서 제게 감동을 주십니다.”, “교회가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마음을 주십니다.”, “건축을 하라는 마음을 주십니다.” 등등 성령의 인도, 혹은 성령의 감동이라는 말을 쓰곤 합니다. 그런데 사역자끼리 혹은 사역자와 일반 성도 간에 서로 그 뜻이 다를 때가 많습니다. 그럼 어떤 것을 성령의 계시로 판단해야 합니까?

이 또한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아주 구체적인 부분과 일정까지 말하는 것은 사실은 성령의 계시가 아닐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바울도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실토했지 않습니까? 환난이 기다린다는 것 까지는 알았어도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는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신문기사를 쓸 때 적용하는 육하(六何) 원칙에 맞추어 계시를 주는 법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바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나 하나님의 사자가 직접 나타났거나 환상을 본 것처럼 아주 구체적인 계시를 받은 적도 수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세상 전부가 기독교의 불모지이며 성경도 완성되지 않았던 특수한 상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기록 보존케 해야 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의 역사가 불같이 일어나 그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임을 확실히 증명해야 했으며, 각지에 교회를 세우고 사역자를 훈련시켜 맡겨야 하는 등, 복음의 확실한 증거를 보여야 하는 급한 일들 때문에 직접적 구체적 계시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대 교회 이후로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우선 하나님 말씀의 계시가 성경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안에 십자가 복음의 진리가 다 담겼습니다. 성령의 은사와 그 의미와 적용법까지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으로 복음 안에 들어온 모든 자에게 성령이 내주하고 있습니다. 각자가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고 또 그것을 해석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 있기에 직접적 구체적 계시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거의 필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바울처럼 사슬에 묶여 로마로 가서 세계의 중심을 복음화 시키고 결국은 그 감옥에서 순교당하는 그런 일이 아니고선 말입니다.    

하나님이 구체적인 계시, 특별히 장래 일에 대한 예언을 거의 주시지 않는다면 평소에는 신자가 그분의 뜻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경로는 둘 뿐입니다. 신자 내면에서 들리는 세미한 성령의 음성과 외부에서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통해 깨닫도록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그것이 하나님 혹은 사단이 심어주는 것인지 자신이 스스로 한 생각인지 어떻게 구분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사실 간단합니다. 구체적 일의 내용과 그 계획 혹은 일정까지 가르쳐 주는 계시는 거의 없다고 이미 말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성도 개인과 그 모임인 교회를 향한 뜻은 아주 명확합니다. 모든 세대, 모든 지역, 모든 인종, 모든 문화 등에 결코 차이가 없습니다. 성도와 그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 그분의 향기를 세상에 드러내고 미혹된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여 그분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신자와 교회가 정말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고 오직 십자가 복음만 증거 하겠다고 헌신되어 있으면 그 구체적인 일은 그분이 모두 이루십니다. 또 믿음의 천재가 따로 없기에 성도를 조금씩 성장시켜 한 걸음씩 인도하시지 먼 장래까지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계시는 성도 개인의 믿음을 성숙시키는 위로, 확신, 권면 등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주시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또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에도 함께 질서를 세워서 덕을 이뤄나가는 모습으로 주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이 더 확증되는 방향으로 역사합니다.(고전12:1-3) 역으로 말해 궁극적으로 십자가 복음이 확장되어지지 않으면 성령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적 내지 사단이 심어준 생각입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사단이 악마보다는 오히려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복음이 눈에 띄게 축소되는 방향보다는 성도들을 나태에 빠지게 해서 단순히 답보되어있는 상태로 만듭니다. 신자들이 게을러지는 순간 자연히 하나님 나라도 퇴보하게 되므로 가만히 놓아두겠다는 고단수입니다.

나아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그랬지만 하나님의 일을 빙자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대표적 예로 교회의 여유 재정으로 교회건물 신축을 하자는 편과 선교에 우선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편으로 나뉘게 합니다. 서로 간에 성령이 그런 마음을 심어주었다거나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확답을 받았다고 주장하게 만듭니다. 성령이 그렇게 나눠지게 할 리는 없습니다. 반드시 사단의 방해거나 각자가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자기 생각을 몰아간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의 계시를 구체적으로는 거의 주시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을 닮은 상당한 수준의 지정의적 능력을 인간에게 이미 주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이성적으로 합당한 분별을 할 수 있습니다. 적절하고도 민주적인 의견수렴 절차를 거쳐야 함은 물론입니다. 무엇보다 모든 과정을 세밀히 인도하여 주시고 또 상황을 잘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적절히 분별하여 합당하게 결정된 내용이라면 하나님의 권능은 당연히  따라줍니다. 당신만 따르겠다고 헌신한 신자라면 좌로 가든 우로 가든 하나님은 항상 함께 하십니다. 꼭 둘 중에 하나를 가야 한다는 것은 도덕적 실천과 영적 내면의 성숙에 해당되는 문제이지 교회가 행하는 사역의 종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기존 건물이 늘어나는 신자를 도저히 포용할 수 없고 교육시설도 태부족이라면, 건물을 검소하고도 실용적으로 확장하되 그럴만한 충분한 재정 여유가 있다면 한 마음이 되어 건축부터 하면 됩니다. 또 교회가 그렇게 하나 되어 전진하면 선교도 더 활발하게 할 수 있는 길과 여유가 반드시 열립니다. 그 반대로 선교나 구제에 먼저 사용해도  부족한 시설 속에서도 그에 따른 합당한 하나님의 역사가 넘치게 따릅니다. 또 그 이전에 신자들이 비좁고 불편한 교회 시설을 견딜만한 믿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지 않습니까?  

문제는 신자와 교회가 한 믿음 안에서 한 마음이 되어서 한 소명을 실천하는 것이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와 교회가 예수를 머리로 하여 십자가 복음 안에 든든히 서있으면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이루십니다. 서로 하나님이 뜻이라고 우기면서 분쟁으로 치달을 것 같으면 그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자 하나님의 뜻에 가장 반하므로 쌍방 모두 고집하는 일에서 완전히 손을 놓아야 합니다. 비록 개별적으로 따지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서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을 비교한 말씀의 핵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령은 화합에, 육체는 분리입니다. 죄의 본질이 분리이지 않습니까? 또 죄의 반대는 당연히 화합이지 않습니까? 계시의 구체적인 성격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반드시 옳고 그른지, 맞는지 틀렸는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최소한 어느 것이 더 좋은지 나쁜지를 따지게 됩니다. 또 그러면 분리는 필연적으로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소욕은 일로 표현했는데 분리가 주로 일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령은 내면의 평강과 자유함으로 대변할 수 있는데 금할 수 없는 열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온전히 붙어 있어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자연히 영적 내면이 성숙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이 구체적으로 계시해 주는 일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렇게 저렇게 구체적으로 계시 받았다고 주장할 때는 일단 잘 분별해야 합니다. 또 그 분별이 사실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평소에 성령의 사람인지, 교회의 덕을 세우는지,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복음만 증거하려는지, 나아가 지금껏 성령의 열매를 많이 드러내었는지, 그리고 다른 성도들도 그 사람의 말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최소한 그에 반하는 것은 아니라고 모두 화답해주는지 등등 얼마든지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지금 바울을 눈물로 배웅하는 제자들처럼 그런 사랑과 화합과 일치가 있느냐를 살펴보면 됩니다.  

평소 믿음이나 그 열매가 비슷한 직분자나 사역자들끼리 의견이 갈라지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을 빙자해서 그렇다면 둘 다 아니라고 보면 됩니다. 교회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일의 본질이 무엇이며, 성도가 교회에서 맡아야 할 본분이 무엇인지부터 사실은 모르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을 무시하며 독단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변하며 끌고 가는 목사 또한 그렇습니다. 교회의 덕을 무너트리고 일치를 깨트려 분열을 불러오는 성령의 상충된 계시란  절대 없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언제 어디서나 성도나 교회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확장이라는 소명을 외면, 망각, 쇠퇴, 수정, 가감, 포기토록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성령의 계시나 하나님의 일이라는 포장을 하게 해서 비본질적인 종교적 일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도록 만듭니다. 믿음이 좋고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려는 사람일수록 사단의 그런 시험과 유혹에 잘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의 일을 많이 맡은 사람일수록 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분별력을 가꾸고 잃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령의 구체적 계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드물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성경을 통해 이미 명료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성도 개인이나 교회가 공(共)히 정말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 따르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하는 모든 일은 이미 하나님의 뜻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혹시라도 그분의 뜻을 잘못 오해하면 어쩌나 걱정할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제자들이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올려 보내면서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확신했듯이, 주님이 합력하여 당신의 선으로 바꾸어주시기 때문입니다.

4/23/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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