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조회 수 540 추천 수 18 2010.07.05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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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그때에 한 장관 곧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엘시라가 가로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왕하7:2)


아람 왕 벤하닷이 북 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성을 포위 공격했습니다. 성중에는 아이들을 삶아 먹어야 할 만큼 식량이 완전히 핍절되었습니다. 엘리사는 여호와의 계시를 받아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에 팔릴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이를 들은 왕의 최측근이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그의 반박이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성중에는 곡식이 완전히 떨어졌습니다. 성 밖엔 아람 군대의 철벽같은 포위망이 풀릴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쟁에  이겨 외부에서 곡식을 양껏 가져 들어와야만 겨우 가능한 일인데 허기진 이스라엘 군대가 아람을 이길 가능성이라곤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아무리 당시 북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타락했어도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대놓고 비난하려는 뜻은 크게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라도, 특별히 여호와를 아는 백성으로선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두려움은 갖게 마련입니다. 그로선 엘리사가 그간 아무리 신령한 계시를 했고 큰 이적을 일으켰어도 이번만은 지쳐서 엉터리 예언을 한 것이라고 단정한 것입니다.

그 예언을 하나님은 어떻게 이루었습니까? 기상천외의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고는 절대 그 예언을 이룰 수 없는 그런 방법이었습니다. 아람 군대가 스스로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게 만들었습니다.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이스라엘이 외부의 원군을 크게 동원했으리라 지레 짐작하여 “진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허급지급 도망갔습니다.  

현대적 군사장비가 없는 당시로선 소리, 냄새, 빛깔 등 오감에 극도로 민감했습니다. 소리만으로 병거, 말, 군대임을 각기 분간하며 또 군대 숫자와 달리는 속도와 현재 다다른 지점까지 정확히 알아맞힐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야밤에 포위 기습당했기에 도무지 정식으로 대적할 여유가 없고 또 승산이 전무하다고 보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친 것입니다.    

장관이 하나님께 너무나 불경한 말을 내뱉은 까닭은 앞에서도 언급한대로 엘리사에 대한 개인적 불신과 미움이 상당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가 하나님을 능력을 전혀 모르거나 아예 불신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의 문제점은 언제나 여호와를 완전히 등진 것이 아니라 편의에 따라 가나안 우상을 혼합해서 믿은 것이었지 않습니까?

그로선 내일 이맘때 그 일이 일어난다는 점이 못내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단 하루 만에 성의 사정을 최하에서 최상으로 바꾸는 일은 하나님에게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고립무원에 빠진지라 항복 아니면 끝까지 항전하다 자멸하는 길 말고는 어떤 미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큰 기적으로 아람 군대를 물리쳐 주실 수 있을지 몰라도 내일 당장에 풍족한 생활로 바꿔주실 수는 절대 없다고 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 한정시킨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을 자신의 사고의 틀 안에 가둬버렸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기본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기보다는  그분이 이루시는 때와 방식을 미처 믿지 못한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해결책이 너무나 절묘했지 않습니까? 전쟁에 지더라도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보급품도 함께 들고 퇴각합니다. 지금은 목숨만 부지하려고 “걸음아 날 살려라”는 판국에선 식량을 챙길 여유가 없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떠올리지 못할 당신만의 신묘한 방식으로 당신의 약속을 정말로 누워 떡먹기 식으로 이뤄냈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천하를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신 분에게는 어떤 일도 지금 당장에 가능하시다는 것을 겸허히 시인했습니다. 모든 방책을 그분께만 열어 놓고서 실제로 위임했습니다. 그라고 자신에게 주신 계시가 인간적 판단으로는 도무지 일어나기 힘든 일이라는 자기 이성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예언대로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여서 지금 주시는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그 성취도 당연히 보장되어 있음을 전혀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정작 문제는 본문의 이스라엘 장관보다 우리입니다. 그와 같은 신앙 양태를 저를 비롯해 많은 신자들에게서 얼마든지 쉽게 발견할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 하늘에 창을 낸들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날 수 없다고 하나님께 대놓고 반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얼마나 우리 사고의 틀에 제한시키려 듭니까? 그것도 때와 방식을 갖고서 말입니다.

기도하면서 반드시 이 때와 이 방식으로 응답되어야 한다고 고집하며 그러지 못하면 당장 속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원망과 불신이 슬금슬금 기어나지오지 않습니까? 또 조금만 이해하지 못할 어려운 처지에 빠지면 “하나님 잘 믿고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 나에게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라는 한탄이 새어나오지 않습니까?

믿음이 좋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실제 크기를 그 크기만큼 실제로 인식한 바탕 위에서 실제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수준으로는 도무지 그분의 실제 크기를 측량은커녕 추측 아니 상상도 못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그분의 실제 크기를 정확하게 깨달아 온전히 그대로 따를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그분에게 모든 가능성을, 특별히 때와 방식만큼은 반드시 열어 놓아야 합니다. 또 그러기 위해선 항상 말씀과 기도를 몸에 붙이고 다녀야 합니다. 언제든 말씀대로 믿고 살아야 합니다. 기도한대로 소망을 갖고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고 해서 기도해놓고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응답될 때만 기다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그분을 자기 기도라는 틀 안에 가두는 셈입니다. 모든 가능성이 그분께 열려 있으니까 오히려 현재 자신 앞에 펼쳐지는 상황을 더욱 주시하며 말씀과 기도에 비추어서 분별하여야 합니다. 범사를 주님의 너무나 크신 그릇에 담아내어 그분의 뜻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나에게 어찌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하셨는가?”라는 탄식의 의미가 정반대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이전에는 왜 잘 믿는 나에게 이런 나쁜 일을 허용하셨는지 불평과 불신앙의 의미였지만, 이제는 왜 잘 믿지도 못하고 계속 넘어지는 나에게 이런 큰 은혜를 베푸셨는지 감사와 경이가 듬뿍 묻어져 나와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지난 신앙생활의 결산서는 사실상 이 두 가지 탄식이 항상 교차되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시는지 의심 불만 불신에서 헤매다가 어찌 어찌 기도와 말씀에 조금 더 열심을 내다보니까 어느 새 문제는 해결되어 있었지 않습니까? 지나고 나서 가만 따져보니 너무나 경이로운 방식과 가장 적절한 때였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시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항복한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아니 거의 매번 그랬지 않습니까? 그분만의 방식으로 반드시 이뤄져야만 할 그 때에 가장 최선의 결과를 얻었지 않습니까? 자기 믿음과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해도 그리지 못했던 열매가 이미 손에 가득 쥐어져 있음을 발견했지 않습니까? 시편 기자의 수많은 기도들이 원망과 불신을 터트리며 시작하다가 결국에는 감사와 경배와 찬송으로 끝나듯이 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크기를 도무지 실측할 수 없기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그분에게만 모든 가능성을 오픈해 놓고 있습니까? 또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따져 인식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갖추거나 키우고 있습니까? 요컨대 두 가지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리요?” 중에서 지금 어떤 의미의 탄식이 입에서 저절로 새어나오고 있습니까?

7/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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