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시제(時制)가 다른 신자.

조회 수 504 추천 수 42 2010.08.18 17:5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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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시제(時制)가 다른 신자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수1:5,6)


모세의 종이었던 여호수아를 이제 하나님이 당신의 종으로 승격시키는 장면입니다. 여호와의 군대 총사령관으로 진급이 된 셈입니다. 지금까지는 부관으로서 모세가 시키는 대로만 따르면 됐었습니다. 그로선 그간 아무리 곁에서 모세를 지켜봐왔지만 앞으로 새로운 임무를 잘 감당할 수 있을지 큰 두려움부터 앞섰을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으로선 그를 안위시키고 고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담대하라.”는 격려가 1장에만도 네 번이나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또 그런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여호수아는 아간의 범죄로 패했던 아이 성 전투를 제외하고는 연전연승을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정말로 평생에 그를 능히 당할 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두려움이 생기는 모든 대상을 향해 담대해지려고 노력합니다. 세상, 사람, 죄악, 사단, 환난, 질병, 죽음 등등 조금이라도 우리로 힘이 빠지게 만드는 어떤 것도 믿음으로 대적하여 이겨내려 합니다. 물론 본문 말씀과 똑 같이 “하나님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버리지 아니하므로 마음을 강하게 하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호수아처럼 한 번을 제외하고 연전연승을 하기는커녕 패배하는 경우가 승리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진단을 내립니까? 우리의 믿음이 너무 약해졌고 또 함께 하는 하나님의 능력도 그런 우리 믿음에 비례해 약해진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다시 믿음을 강하게 해서 그 대적들을 향해 용감하게 돌진해 봅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적은 여전히 눈앞에 요동도 않고 버티고 서있습니다. 강하고도 뜨거운 결단과 실행을 되풀이 해보지만 그리 사정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바위에 계란 치기 같은 일만 반복되다가 서서히 하나님에 대한 의심, 원망, 불신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어쩌다 고난이 사라지면 이제야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했는가보다 천만다행(?)으로 여깁니다.

우리 모두의 솔직한 신앙 여정이 이런 과정의 되풀이였지 않습니까? 그럼 뭔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가나안 땅에서 여호수아와 동행했던 하나님이나, 지금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권능은 동일한 것 아닙니까? 또 우리 믿음은 완성된 신구약 성경 말씀에 근거하고, 제자훈련 전 코스를 마쳤고, 아침마다 경건의 시간을 갖는데 여호수아의 믿음보다 못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럼 대체 어디에 잘못이 있는 것입니까?  

원인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담대히 상대해야할 대상을 처음부터 잘못 골랐기 때문입니다.  눈앞을 막고 있는 장애물을 대적하는 데만 온 힘을 쏟습니다. 그래서 자신부터 온전히 담대해지려 노력했습니다. 스스로 자기 믿음의 수준을 높이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믿음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강하게 세워야 한다는 단순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정작 담대하게 상대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맞서 대적하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온전히 담대하게 믿느냐, 아니면 자기 믿음을 담대하게 변화시키려 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조금 표현이 이상하긴 해도 함께 하는 하나님을 담대하게 변화시킬 생각은 않고 우리가 담대해지려는 데만 급급한 것이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힘든 일이 생기면 우리는 뜨거운 믿음으로 하나님 어서 빨리 해결해달라는 기도만 열심히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전에 그분을 담대히 믿는 일부터 먼저 해야 합니다.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정말로 확고하게 인식하고 붙들어서 오직 그 바탕 위에서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연유되어야만 합니다. 절대적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을 바로 세우는 데에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 아니 그 자체가 바로 올바른 신앙입니다.

물론 그 일은 아주 힘듭니다. 기도 열심히 뜨겁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기도는 급하면 자연적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믿음의 세기와 상관없이 신자라면 누구라도 기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 일이 어려우니까 아니 어려울수록, 그것도 가장 중요한 일이면 먼저 해결해야만 다른 모든 신앙적 과제도 필연적으로 해결될 것 아닙니까?

엄밀히 따져 급한 문제를 기도하여 해결 받는 것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 한 가지 방편일 뿐입니다. 기도의 목표가 응답받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분을 더 믿어지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응답을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어떤 경우가 닥쳐도 요동치지 않게 변화되어졌는지 여부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너를 당할 용사가 없다,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는 격려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 먼저 그의 믿음을 담대하게 만드는 작업부터 하셨습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바로 선 후에 신자가 담대해지는 것이지, 신자 스스로 담대해진다고 그 관계마저 바로 서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쪽에서 여호수아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소명을 재확인 해주었습니다. 하나님 그분이 나를 택하고 세우셨다는 확신을 심어준 것입니다. 거기다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2절)고 그분이 구체적으로 소명을 지시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계획인지라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나아가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3절)라고 했습니다. 이는 문법적으로 틀린 말입니다. 엄격히 따지면 논리적으로도 이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밟는 것은 미래의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너희에게 주었다고 과거 시제로 표현했습니다. 말이 되려면 너희가 밟는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이 논리적으로 이상한 것은 인간 신자에게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에게는 비논리적, 비문법적인 표현이 전혀 아닙니다. 그분에게는 인간이 인식하는 방식의 과거, 현재, 미래가 없습니다. 인간 식으로 따지면 그분에게는 영원히 현재만 있습니다. 과거도 현재이고, 미래마저 현재 내지 과거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했으면 이미 확실하게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 약속이 이뤄지지 않을 리는 전혀 없습니다. 단지 실제로 이뤄질 시기만, 그것도 시공간에 제한 받은 인간이 이 땅에서 적용하는, 남았을 뿐입니다. 요컨대 절대자 하나님 그분의 모든 약속은 절대적인지라 절대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마지막 남은 의심 내지 불신앙마저 제거시켜주려고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네가 받은 약속이자 네 소명은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다” 합니다. 이미 모세에게 준 약속인데 네가 모세와 함께 일하면서 나의 권능과 신실함을 익히 목도하고 체험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후계자인 너는 단지 그 사명을 승계하는 것으로 내가 한 약속에 동참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여호수아더러 너희 대적을 향해서보다는 하나님 당신을 향해 담대하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주위 대적들에게도 담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이와 같은 담대한 믿음을 가진 후에도 두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처음 당하는 미지의 일에 대한 두려움이자, 현실적으로 따를 육신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 못하거나, 그분의 약속이 이뤄지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은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아주 좋은 예가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2:3)고 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 그분을 신뢰하는 담대함이 부족한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전도 시에 따를 유대인들의 훼방으로 인한 현실적 고통, 혹은 자신이 혹시라도 복음을 잘못 전할까 하는 염려 등이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에 흔들림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보다 더한 예도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조차 마지막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면서 당신의 입으로 “내 마음이 심히 고만하여 죽게 되었나니”라고 두려운 마음을 표출했습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 금이 간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단지 십자가에서 당할 너무나 심한 육체적 고통을 염려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당신에 대한 담대한 믿음을 먼저 세워주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인 나를 절대적으로 믿는다면 당연히 약속의 성취에 대해선 두려워하지 말고 또 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담대하라고 격려한 것은 새롭게 맡을 미지의 일과, 막상 전투에서 겪을 온갖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라는 뜻이었습니다.  

우리의 오해와 오류가 어디에 있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막상 하나님에 대해선 전혀 담대하지 않으면서 대적할 대상에만 담대해지려 합니다. 아니 환난과 문제와 죄악과 사단에 대해서도 사실은 그리 담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어떡하나, 고통이 끝이 나지 않으면 어쩌나, 내가 기도를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믿음이 너무 약해졌는가, 뭔가 죄지은 것이 있어서 하나님이 귀를 안 기울이시는가, 심지어 하나님의 능력이 이전보다 못한지 등등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못 믿는 것은 둘째 치고 기도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지 모른다고까지 두려워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시제를 우리 식으로 제한해서 생각할 줄 밖에 모릅니다. “우리가 담대한 믿음을 갖고 담대하게 땅을 밟으면 하나님이 그 땅을 주실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믿음이 약한 것은 아닌지, 땅은 제대로 밟고 있는 것인지, 혹시 그 약속이 수정되는 것은 아닌지 온갖 염려가 끊일 새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제는 우리와 다릅니다. “나를 담대히 믿고 땅을 밟기만 하면 땅은 너희 것으로 이미 주어졌다.” 정말 초등학교 1학년 같은 국어 실력입니다. 이런 표현을 이해하고 믿으려면 더더욱 어린아이 같은 순전한 믿음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여호수아와 함께 하신 하나님은 전혀 변함없이 우리와도 함께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여호수아와 동일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주님이 나를 먼저 택하였고, 지금과 같은 인생을 허락하셨으며, 반드시 나를 통해 이루실 영광스런 뜻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기도하는 제목대로 응답이 되지 않아도 오히려 더 오묘하고 유익하며 선한 하나님의 방식만으로 반드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분의 신자의 인생을 향한 거룩한 뜻은 이미 과거 시제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담대히 믿을 때에 비로소 대적을 대하는 담대한 믿음도 생깁니다. 대적을 담대하게 상대한다고 다 담대한 믿음은 아닙니다. 불신자라도 의지만 강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미래 시제의 하나님을 믿어보려 노력하지 말고 과거 시제의 하나님을 소유하고 누리는 것만이 참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8/13/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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