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그들과 언약을 맺은 후 삼 일이 지나서야 그들은 근린에 있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는 자라 함을 들으니라”(수9:14-16)
성경은 신자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고 권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기도하지 않아 실패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 시에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는” 바람에 속임수에 넘어가 섣불리 화친 맹세를 하였고 할 수 없이 기브온 족속을 진멸하지 못하고 살려주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로선 고의로 한 잘못은 아니지만 나중에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가시가 되어버립니다.(삼하21:1-14) 이처럼 한번의 기도를 쉬는 잘못이 큰 화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사실은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어떤 때는 아주 큰 일임에도 너무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면 아예 기도할 틈조차 없을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란 꼭 골방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적으로 마음 속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으로도 간단히 기도할 수 있으며, 도저히 급할 때는 “주님! 도와 주세요” 아니 단순히 “주님!”하고 간절히 그분을 부르거나 찾기만 해도 됩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쉬지 말고 기도를 열심히 잘 합니다. 교회의 모든 행사는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이 납니다. 심지어 교제하며, 구역별 장기 자랑 같이 모여서 놀(?) 때도 기도는 빠지지 않습니다. 기도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역설적으로 말해 간단하게 기도해도 아니 기도를 빠트리더라도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해 주시겠습니까?
반면에 세상에서 세상 사람과 일을 해야 할 때에 기도를 훨씬 많이 해야 합니다. 불신자들의 배후에는 항상 사단의 음흉한 계략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에선 세상 식으로 일하고 교회에 와서만 하나님 식으로 일하려 듭니다. 물론 불신자 앞에 정식으로 소리 내어 기도하여 신자 된 표시를 일부러 낼 필요는 없지만 그러니까 더더욱 속으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인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은 교회가 아니고 세상입니다. 교회는 그 전투에 대비해 훈련을 쌓는 곳입니다. 정작 목숨을 걸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할 장소와 시간은 평일과 삶의 현장 즉 직장인데 신자는 주일만 교회에서 간단하게 일주일치 전부의 기도를 하고 때우려 듭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로선 자기들 외에는 전부 불신자였습니다. 그 말은 가나안 정복 시에 만나는 모든 사람은 일단 진멸할 대상이라고 가정했어야 했는데, 기브온의 위장꾼들을 만나는 순간 “너희가 우리 중에 거하는 듯하니”(9:7)라는 의심이 들었는데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없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더라도 특별히 의심이 들 때는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의심이 들었음에도 기도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기브온 족속이 일부러 낡은 옷과 신발을 신고 나타나 곰팡이 난 떡을 보여준 그 교묘한 위장술 때문이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외적인 모습을 다 보고 또 “우리는 원방에서 왔나이다”라는 말을 듣고서도 의심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심에 찬 질문에 대한 기브온의 위장꾼들의 대답이 절묘했습니다.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묻되 너희는 누구며 어디서 왔느뇨”(9:8) 기브온 스스로 당신의 종이 되겠다는 달콤한 꼬임에 이스라엘이 넘어간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의심을 없애고 확신을 갖게 된 계기가 기도가 아니라 죄악의 유혹이었습니다.
신자가 일단 유혹에 넘어가면 죄악과 상대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을 진멸하려 전투하기 보다는 여호수아 쪽에서 먼저 화해하기 위해 대화의 물꼬를 텄습니다. “너희는 누구며 어디서 왔느뇨”라는 질문은 사실 따지고 보면 속으로는 상대에게 의심이 가지만 그래도 종이 되어주겠다는 말에 솔깃해 제발 우리의 대적이 아니라고 너희들 자신의 말로써 확인해 달라는 뜻입니다. 즉 내가 이제 너와 범죄에 동참하겠는데 그 일을 시작할 형식적인 구실이라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럼 신자가 현실에서 세상 사람과 세상적 일을 함께 도모 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심지어 그들과 범죄에 동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교묘한 사기와 기만에 속아 넘어간 것입니까? 아닙니다. 신자에게는 성령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사단의 냄새는 자기 속에 좌정하신 성령이 먼저 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 이게 아닌데?” 라는 의심이 금방 들게 해줍니다. 성령이 신자더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지혜를 부어 줄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세상의 달콤한 유혹에 더 솔깃해지는 것입니다. 그 말은 유혹은 항상 의심을 간단히 무너뜨릴 만큼 충분한 크기의 양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신자가 얼마든지 동참할 수 있는 핑계를 어떤 형태로든 던져 줍니다. 신자 쪽에서 기도할 생각은 전혀 못하게 하면서 신자 쪽에서 먼저 접근해오도록 하는 술책입니다. 성령님이 기다리고 있는 쪽은 외면하고 사단이 기다리는 쪽으로 발걸음을 향하게 만듭니다.
나아가 사단은 너무나 교활해서 믿음이 좋은 신자들마저 꼼짝 못하도록 광명한 천사로 위장합니다. 반드시 선하고 의롭고도 거창한 구실을 댑니다. 인간을 사랑하고 세상을 깨끗하게 만드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거창한 명분에 졸지에 하나님이 사라진 것도 모르고 넘어가게 만듭니다.
결국 신자가 언제 어디에서 더욱 기도에 힘써야 합니까?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아주 선한 명분의 일을 불신자들과 도모할 때입니다. 그 일에서 기대되거나 보장되어진 열매가 너무나 선하고 확실해 보일 때 더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일은 무조건 좋은 일이야. 성공할 것이 확실해. 기도해 볼 것도 없어”라는 마음이 들 때에 반드시 여호와께 물어야 합니다.
믿음의 성숙 여부와는 상관 없이 신자라면 어렵고 성공 가능성이 적어 보이는 일에 대해선 기도를 잘합니다. 그러나 쉽고 성공 가능성이 확실하고 일상적인 일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단은 어느 경우를 노리고 어디에 숨어 있겠습니까? 두말 할 것 없이 후자입니다. 그럼 어려운 일에는 당연히 기도해야 할 뿐 아니라 쉽고 선해 보이는 일에도 더 기도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범사에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가 얼마나 잘 믿고 순종하는지 보기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한 것 아닙니다. 사단이 기도 안 해도 될만한 일을 찾아서 쫓아 다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기도하지 않고 하는 일에는 반드시 사단의 방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땅에서 신자가 살아가는 평생에 모든 장소, 모든 일, 모든 사람, 모든 여건이 다 영적 전투의 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엡6:18)고 한 것입니다. 때를 정하지 말고 즉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3/14/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