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13:22,23) 신령한 체험을 했는가?

조회 수 1458 추천 수 113 2006.03.22 18:4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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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삿13:22,23)



구약에선 여호와의 사자를 직접 대면한 자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한결 같은 반응은 여호와를 대면했으니 죽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에 찌든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20) 하나님에게는 더럽고 추한 면이 단 하나도 없으며 그런 것들과는 공존(共存)조차 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중력이 무한대인 블랙홀에 그보다 중력이 약할 수 밖에 없는 모든 물체가 빨려 들어가 없어지듯이 선(善)이 무한대인 그분 앞에 모든 죄악과 부족한 선도 소멸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과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당신의 참 실체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모세에게는 떨기나무 불꽃으로, 이사야에게는 성전 가득한 영광으로, 어린 사무엘에게는 목소리로 나타났으며 대개의 경우는 본문처럼 인간 사자(使者)의 모습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 절정이 수난 받는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까지 낮아진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또 예수님 이후에는 성령님으로 오셨고 신자에게 내주(內住)까지 합니다.

모든 종교는 죽은 후에야 자기들의 신을 대면하고 그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죄 많은 인간이 감히 신을 대면할 수 없다고 그들도 인정한 셈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이땅에서부터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도 하나님을 개인적, 인격적, 체험적으로 대면할 수 있으며 그러고도 죽지  않습니다. 나아가 그래야만 구원을 얻은 것이고 진정한 믿음이 형성 됩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진 종교적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으므로 기독교 신자의 하나님을 대면한 경험을 아예 믿으려 들지 않습니다. 간혹 종교적으로 신령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까지 인정하는 자들마저도 순간적인 감정의 흥분 상태, 주관적인 사고의 착각, 환청 혹은 환각 현상, 심지어 뇌신경의 이상 등등으로만 해석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삼손의 어머니가 여호와의 사자 즉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체험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  하셨으리이다.” 직접 여호와의 사자뿐 아니라 단에서 불꽃이 나오고 그 불꽃 가운데로 사자가 하늘로 올라는 가는 것을 자기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는 것입니다. 또 그에게서 아들을 낳을 테니 평생을 나실인으로 키우라는 계시를 자기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고 합니다.

오늘 날의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임재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자기의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납니다. 그리고 각자마다 그 구체적인 체험은 다 다르지만 바로 그 때에 내가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분이 나를 알고 있으며 지금 나에게 찾아 오셔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당신만의 참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난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선 구약시대같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해 대면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마노아의 경우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계시를 받은 후에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는”(13:24) 일이 현실로 일어났습니다. 보고 들은 그대로 실제 삶에서 이뤄지는 체험을 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실만 세상 사람 앞에 증거해 보아야 믿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환각 내지 환청으로 몰아 세우면 끝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날의 신자도 삶에서 실제로 성취되는 증험으로만 하나님을 대면했던 사실을 입증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에 그분의 인도와 보호 속에서 기도 하는 일들이 응답 되며 또 그 분께 받은 계시가 있어 그에 순종할 때에 삶과 인생이 완전히 변화된 모습을 그들 눈 앞에 확연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만약 신자의 중생 체험이 세상 사람들 말대로 일시적 감각 기관의 이상이라면 그 받은 계시가 현실에서 실현될 수는 절대 없지 않겠습니까?  

특별히 아브라함과 사라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삼손의 부모가 수태했을 때의 나이가 불명합니다. 자칫 세상 사람들이 “아주 늦은 나이에도 임신 될 수도 있지 뭐!”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전혀 임신의 기미조차 없을 때에, 그것도 사라의 태가 닫히고 아브라함도 성기능이 상실 되었을 때에(창18:12)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확신을 가지고 말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들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도 반드시 이삭을 낳는 것을 그들 앞에 보여 주어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이 반드시 보여 주십니다. 신자는 이미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지만 죽지 않고 오히려 그분의 자녀가 되어 세상과는 전혀 다른 거룩한 권능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땅에서부터 하나님을 뵈었을 뿐 아니라 날마다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란 엄밀히 따지면 세상 사람들 눈에는 이상하고 신기한 사람으로 비춰져야 합니다. 세상 사람과 똑 같은 방식으로 살고 있으면서 그들 중에 아무도 자기를 이상한 자로 취급하지 않으면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고 자신을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노아의 경우를 보십시오. 평생을 세상에서 완전히 내놓은 별종으로 살았지 않습니까?

먹고 자며 일하는 모습에서 달라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태도가 다르며, 인생의 목적이 다르며, 무엇보다 진정으로 소망하는 것이 달라 보여야 합니다. 쉽게 말해 삶에서 찾는 의미와 기쁨이 그들과 달라야 합니다. 그들 보기에는 전혀 즐겁지 않는 것 같은 예컨대 평생동안  묵묵히 방주만 짓는 그런 일을 하면서 미친 놈 소리를 들어도 그저 기쁘고 즐거워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환난이 닥쳐도 기뻐하며 그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에 미친 사람입니다. 이렇게 살지 않고는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세상 사람 앞에 증거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사실은 증거가 아니라 참으로 그분을 일대일로 직접 대면했다면 자연히 그렇게 바뀝니다. 당장의 결실은 못 맺을지 몰라도 분명히 삶의 태도나 인생의 목적이 확연하게 달라지며 또 그렇게 살려는 소망을 항상 키워나갑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실제로 만난 자는 평생을 번제를 드리며 살게 됩니다. 번제란 자기의 전부를 태워서 그분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자기 속의 더럽고 추한 죄악과 선과 의에서 조금이라도 모자라는 부분이 있으면 다 태워 없애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타 없어져야 하지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당신을 직접 대면했는데도 죽이지 않고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체험을 계속해서 수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분이 소멸해 주십니다. 번제와 세상과 전혀 다르게 사는 모습, 이 두 가지만이 신자의 신자 된 참 표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완전히 닫혀 더 이상 생산이 불가능한 태도 열어 주십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4) 우리가 하나님을 이미 만났다는 증거를 하나님 당신께서 반드시 세상 사람 앞에, 그것도 당신이 아니고는 도저히 이뤄질 수 없는 모습으로 보여 주십니다. 마노아에게 삼손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태어나듯이, 나아가 노아를 통해 전인류를 구원하듯이 말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도 죽지 않은 신령한 체험을 했습니까? 그래서 지금도 그분이 보여주고 들려준 계시대로 살아가면서 이상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주위에서 듣고 있습니까?

3/22/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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