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 여세나 되었더라.”(행4:18-22)
나면서 앉은뱅이를 낫게 해준 베드로와 요한이 그 일이 자기들의 신령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권능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고 설교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분이 구세주임을 선포하지 아니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 관원들이 그들을 불러다 단지 예수의 이름만은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했습니다. 예수를 자기들이 못 박았기에 양심에 가책이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에서 예수를 믿는 신앙으로 개종하기에 그 때까지 누리고 있던 종교적 기득권에 손상이 갈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단박에 거절했습니다. 단순히 신자니까 전도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게 된 신자가 그 믿음의 내용이 무엇이며 또 믿은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한 마디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가장 먼저 “보고 들은 것”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그 보고 들은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기도했더니 앉은뱅이가 낫게 된 것 같은 초자연적 기적입니까? 사도들은 사람들에게 아무 잘못도 범하지 않고 오히려 불쌍한 사람들을 살린 분이 십자가에 억울하게 돌아가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또 그분이 자신이 어떻게 죽을 지와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을 예언한대로 다시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을 받고나선 삼년간 동고동락 하면서 그분께 직접 가르침을 들었던 십자가 죽음의 의미에 관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날의 신자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직접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 합니다. 타임머신 타고 이천년 전 유대 땅으로 되돌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한 번밖에 없었던 골고다는 후대 인간이 육안으로는 다시 볼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렇다고 단지 마음의 동의와 결단으로 성경 기록을 믿으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신자는 반드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자기 체험으로 가져야 합니다. 자신이 그분의 십자가 앞에 온전히 죽었다가 그분의 부활과 함께 중생하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새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옛사람이 죽어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 믿기 전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었던 가치관을 완전히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인도를 받으며 그분 뜻대로 따라야 합니다. 사도들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권능이 나타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만이 실제로 주되심을 드러내 보어야 합니다.
유대 관원들이 사도들더러 다른 모든 종교 활동은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예수의 이름으로만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참으로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예수라는 이름 자체를 신비한 마술적 주문으로 생각했는지 안 했는지는 몰라도, 사도들을 통해 그 이름이 얼마나 큰 권능과 은혜를 나타내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는 표적들만 없으면 성전에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 희생제사 드리고 율법대로 선하게 살아야 하는 자신들의 종교만큼 세상에서 고급한 종교는 없다고 자신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전 제사와 도덕적 삶만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셈입니다. 예수님 이전까지는 무슨 수를 써도 심령 깊숙이 숨겨져 있는 죄의 권세까지는 씻어내지 못하기에 어떤 인간도 영혼의 근본적인 갈급함을 해소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나자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평강과 자유와 위로가 충만히 넘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보고 들은 것을 전한다는 뜻은 본인부터 보고 들은 대로 행하여서 다른 사람에게도 그대로 보고 들리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의 본질은 기독교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동행하는 삶이므로 남들에게 전하는 것도 교리가 아니고 삶 그 자체여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자기들도 신자들과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시샘과 부러움을 불러 일으켜야 합니다.
어떤 신자가 차에 “Smile! Jesus Loves You.”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는데 어느 날 자기 앞으로 갑자기 끼어드는 차를 향해 주먹질을 했습니다. 보고 들은 것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했고 또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보이고 들리게 했습니다. 어떤 결과가 생기겠습니까? “예수 믿는 것이 저 정도라면 차라리 지옥에 가는 한 있어도 안 믿겠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또 그러는 불신자를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도들을 협박하는 유대 관원들도 십자가 사건을 보고 들었고, 아니 그 주모자요 당사자들이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난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익히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또 기적적으로 치유된 앉은뱅이는 성전 문 앞에서 매일 구걸하던 자라 몰라봤을 리 없습니다. 나아가 성경은 그가 사십여 세나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쉽사리 거짓말하거나 지어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연배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조차 부인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頑惡)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사6:10) 많은 사람이 보고 듣는데도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키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참으로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쳐주는 것을 오히려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보고 들어도, 그렇게 하려면 자신의 삶을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렇게 하기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물질을 쫓으며 죄악과 쾌락을 추구하는 재미가 훨씬 더 좋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더욱 예수 믿는 삶이 이전의 예수 없는 삶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재미있고 가치와 의미가 풍부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하나로 넘치고 넘친다는 것을 신자 자신부터 실제 삶에서 절감하기에 그런 충만한 삶을 살지 못하는 다른 사람을 정말로 안타깝고 불쌍하게 여겨야 합니다.
다른 말로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절대로 이 세상과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사람들로 알고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려면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위해 신자부터 신의 성품에 참예하여 하늘의 신령한 보화를 이 땅에 심어야 합니다. 신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다른 사람의 영에 감지되어 그 영혼을 움직여야 합니다. 교리를 전해선 일시적 찔림과 감동은 있을지 몰라도 영혼의 변화는 이뤄낼 수 없습니다.
신자가 날마다 순간마다 성령에 충만하여 그분의 인도대로 살아갈 때에 그 권능이 신자의 외부로 영향을 미치면 신자의 그런 삶을 보는 이웃의 영혼의 눈이 비로소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쾌락과 죄악에 빠져 있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지 깨달아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거듭나야겠다는 소망이 그들에게도 생기게 됩니다.
당신은 전도를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진짜로 보고 들은 것을 전하고 있습니까? 사람들 눈에는 안 보이지만 당신의 영의 눈과 귀로 얼마나 많이 예수님의 은혜와 권능을 보고 듣고 있습니까? 또 그 보고 들은 것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귀하기에 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정도의 충만한 기쁨으로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고 단지 교리로만 전도하고 있다면 가장 먼저 살아 역사하는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당신부터 돌아와 엎드리셔야 합니다.
2/19/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