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행9:37-40)
베드로가 병들어 죽어 이미 그 시체를 씻어서 다락에 누인 도르가를 다시 살렸습니다. 이런 이적들을 접하는 오늘날의 신자들은 초대교회에만 있었던 특별한 사건으로 치부해버립니다. 베드로는 아주 신령한 예수님의 수제자라 우리와 다르며 또 초대 교회 때는 복음을 빨리 강하게 확산 시킬 필요가 있어서 그런 이적들이 많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고만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사도들은 우리와 “같은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행14:15)이었습니다. 구약은 몰라도 신약은 우리보다 더 몰랐던 자들입니다. 그들이 보여준 큰 권능이 우리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이유를 단지 시대 상황 탓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성경도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리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5:14-16)고 권하면서 또 다시 엘리야를 우리와 성정이 같은 자의 예로 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우리의 기도에 역사가 잘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따지면 우리가 그들보다 크게 못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특별히 신유의 은사를 받은 자라야만 능력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베드로 정도 되니까 그럴 수 있다고 넘기지 말고 그도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라고 가정해서 그 경과를 추정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잘못을 알려면 우리 입장에서 따져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르가는 염(殮; 시체를 씻고 삼베로 싸 관에 넣는 일)까지 마친 상태였는데도 믿음이 베드로보다 약했을 제자들이 먼저 소생시킬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신유의 은사가 있는 줄 아니까 일단 시도한 후 실패해도 “밑져야 본전이다”라는 작정은 아니었습니다.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 했습니다. 그들 마음에 다시 살려보자는 소망이 뜨거웠습니다.
물론 아직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이적에 대한 기억도 아직 생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자라면 선뜻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 외에 또 다른 요인이 분명히 작용한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인도 때문이었다는 것 외에는 설명할 재간이 없습니다. 당시에 제자들이나 베드로나 이성과 상식으로 따져볼 여지가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제자들에게는 “이미 죽었으니 베드로라도 도저히 살릴 재간이 없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이상하게 단 한 번도 안 들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로 “내가 가서 기도한다고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추호도 들지 않았습니다. 아마 도르가가 소생하고 난 후에는 왜 우리 모두가 되살려보려는 생각에 사로 잡혔으며 또 누구도, 단 한 번도 의심이 전혀 들지 않았는지 자기들마저도 신기했을 것입니다.
혹시 베드로가 얼떨결에 따라 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 성경 기록에는 없지만 살릴 수 없을 것이라고 사양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양보해도 그가 와서 과부들이 울며 도르가를 칭송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살릴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은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성령이 그에게 그런 마음을 심어준 것입니다.
그가 기도한 후에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한 것도 하나님이 그에게 이제 그런 말을 해도 된다고 직접 말씀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의 마음속에 이제 그렇게 말해야겠다는 확신이 생기고 난 후 아니면 자기도 미처 의식을 못하고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이 또한 성령의 인도였습니다. 그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기도한 이유도 모든 방해를 제거해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는 일에만 생각을 온전히 집중하려는 뜻이었지 않겠습니까?
말하자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믿음 이전에 상식과 이성이 항상 먼저 작용하기 때문에 섣불리 죽은 자를 살리겠다는 마음은 결코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성령의 인도가 아주 세밀하고도 강하게 다가와야 기도에 역사하는 힘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성경 말씀에 의해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성, 상식, 지성, 관습, 체면, 위신, 주저, 염려, 불안 등 모든 것을 완전히 누를 만큼, 앞에서 말한 대로 다른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아야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믿음의 기도를 하기 전에 먼저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오늘날의 신자에게 부족한 것은 성령의 인도이지 믿음이 연약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오늘날에 초대교회보다 표적이 따르지 않음은 신자들에게 믿음은 있는데 성령의 임재가 약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한 분이신 성령의 권능 자체는 절대 줄어들 리 없습니다. 또 성령님이 일부러 권능을 덜 나타내어야지라고 스스로 당신을 약화시킬 리도 없습니다. 예컨대 오늘날은 과학이 발달해 좋은 의약품이 많이 나왔으니 구태여 신유의 은사를 드러내지 말자고 하나님이 마음먹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오늘 날의 신자가 사도들보다 성령의 충만한 임재에서 부족하다면 그들과 우리와 진짜 다른 점이 과연 무엇인지 따져야 합니다.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에서 딸린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마저 걸 수 있느냐 없느냐만 다를 뿐입니다.
또 다시 초대 교회에는 성령이 강력하게 임재 했으니까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혔다고 해석해선 안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자기들 눈으로 목도했습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믿음에 추호의 불순물이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아니고는 죄에 빠진 인간에게 전혀 소망이 없다는 부분에 절대적인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삶의 모든 목표와 가치를 오직 예수에게 두었습니다. 다시 얻은 새 인생을 예수를 전파하는 일에 그 전부를 걸었습니다.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들이나 우리나 구원을 얻은 후 성령이 내주하는 전이 된 것은 동일합니다. 다시 말하건대 그들에게는 더 센 성령이, 우리에게는 더 약한 성령이 내주할 리는 절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성령이 권능을 발휘하는 데 방해 거리가 전혀 없었고 우리에게는 뭔가 가로 막고 있다는 뜻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믿는 자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복음의 비밀을 깨달아 땅 끝까지 가서 모든 족속에게 그것을 전하라는 것 아닙니까? 초대 교회 장로의 기도에 역사하는 힘이 있고 오늘 날 장로의 기도에는 없는 까닭은 바로 이 차이 때문입니다. 그 당시는 참 생명이 되는 예수만 전하겠다는 일념이었다면 오늘 날은 그 부분에서 부족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오늘날은 “장로가 믿음으로 기도했으니 병이 나아야 할 텐데”라는 염려를 가지고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에게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닌 예수님이 살아서 바로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있다는 확신에서 기도했습니다. 나아가 그 영혼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정말로 애통해 하는 심정으로 오직 “예수님께서 당신의 자비로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날의 신자는 성령의 역사를 자기 믿음이 더 강해지면 뭔가 자기 속에 있는 신령한 기운이 더 활발해지고 그래서 기도하면 그것이 병자에게 전해질 것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도들은 성령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면에서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신자가 임의로 늘였다 줄였다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Full Power로 신자와 함께 하는 것이 성령의 임재입니다. 신자로선 오직 그분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있느냐 아니면 뭔가로 막고 있느냐 둘 중 하나일 뿐입니다. 성령이 Full Power로 나타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자가 오직 예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길 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울부짖으며 간구해도 역사하는 힘은 나타나지 않는 법입니다.
3/16/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