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5:28,29) 신자와 전쟁

조회 수 1108 추천 수 47 2007.03.01 20: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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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고자 함이로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8,29)



이차세계대전의 전범 재판에서 모든 피고인들은 한 결 같이 상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했습니다. 전쟁을 치르는 중에 명령에 불복종하면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까지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판관은 비록 합법적일지라도 명백히 잘못된 명령은 거부할 도덕적 의무가 군인에게도 있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법과 진리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법이 다 진리는 아니며 또 진리가 다 법에 반영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법이 맡은 가장 중요한 역할은 그 한자말이 뜻하는 바와 같습니다. ‘물’ 수(水) 변에, ‘가다’는 뜻의 거(去)가 합쳐진 말로서 물 같이 흐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로 공공질서를 지키게 해서 사회 구성원 다수의 안녕을 보존케 하는 것이 법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따라서 진리뿐 아니라 도덕적인 선악과도 아무 상관이 없는 법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쉬운 예로 도로마다 자동차 제한 속도를 정한 것은 원활한 교통 소통이 목적일 뿐입니다. 빨리 달리는 것이 더 악하고 늦게 달리는 것이 더 선하다는 의미는 사실상 없습니다.

신자는 법과 진리가 서로 충돌 될 때에, 특별히 그 차이가 모호해 보일 때 과연 어디서부터 법을 어기더라도 진리를 따라야 할지 애매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든 전쟁의 와중에선 상관 명령을 어디까지 복종해야 할지 분별이 어렵고 실제 분별할 생각조차 잘 하지 못합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이 자꾸 창성해지자 바로가 남자 신생아는 죽이라고 히브리 산파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바로에게 자기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출산을 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출1장) 하나님을 아는 자가 당시 절대적인 법인 바로의 명령을 거짓말하면서까지 어겼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도 유대 공회와 대제사장의 명령은 바로 법이었는데 사도들은 거역했습니다. 그럼 과연 그 기준을 어디에 둬야 합니까?

이차대전 전범의 경우는 전쟁을 계획한 최고위급 간부와 유대인 학살을 직접 명령한 자들이 주 대상이었습니다. 군인이 교전 중인 적대국 병사를 죽인 것으로는 정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적군이 아닌 유대인 학살 명령은 상식과 도덕에 비추어 너무나 잘못되었기에 군인이라도 거부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회퍼 목사는 자기 조국이 전쟁을 일으킨 것 자체를 반대하다가 결국은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럼 전쟁은 성경적으로 잘못이므로 신자는 무조건 반대해야 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경에는 어린이 생축까지 완전히 진멸하는 가나안 전쟁의 잔혹한 기록이 있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도 평생을 두고 사방 대적과 전쟁을 치렀습니다.

성경은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출1:1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더라도 히브리 남아를 살리는 것이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준 소명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 거짓말에 바로가 쉽게 넘어가고 끝까지 들통이 나지 않았던 이유도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셨기”(20절) 때문입니다.  

가나안 전쟁은 하나님이 직접 명령한 것입니다. 다윗이 전쟁을 치른 것은 생존이 위협당해 정당 방어적 차원도 있지만 가나안 전쟁의 연장으로 보아야 합니다. 본문의 경우도 사도들은 옥에 갇혀 있었는데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행5:19,20)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 것입니다.

신자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는 오직 하나 십자가 복음뿐입니다. 모든 세대의 인간에게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유일한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섭리하고 인간을 대우하는 유일한 기준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이 다 없어져도 십자가만은 찬연히 빛날 것입니다. 당연히 신자는 오직 복음을 위해서만 살고 죽어야 합니다.

천사가 사도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다른 말로 하자면 “복음이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유일한 기준이다. 너희들은 이미 참 생명을 얻었다. 그 생명을 얻지 못한 자에게 가서 생명을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 육신적인 죽음은 초월한 자가 되어야, 아니 이미 된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영원한 삶이 보장되어 있기에 죽음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에 죽어가고 있는 헛된 인생에 대한 안타까움에 목숨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중생한 신자가 자기 목숨을 걸만한 온전하고도 영원한 진리가 십자가임을 모를 리 없습니다. 문제는 그 진리에 자기 목숨을 걸 담대함이 없고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영원한 생명을 확보하고 있다는 확신이 자기부터 부족한 것입니다. 복음 안에 거하는 것이 얼마나 큰 권능과 축복인 줄 자꾸 잊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유대 공회의 법을 처음 어긴 것이 아니기에 감옥에 이미 갇혀 있었습니다. 히브리 산파도 거짓말이 탄로 나면 즉시 죽음에 처해질 것이라는 것을 익히 알았습니다. 본회퍼도 나찌 독일에 맞서 당당하게 감옥에 잡혀 들어가 있었습니다. 성경을 모아서 불태우는 나찌의 배경에 있는 사단의 그림자를 본 것입니다. 복음을 가로 막아 사람들을 영원한 멸망으로 밀어 넣는 것이 너무나 확실하기에 복음을 수호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조국을 배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만은 도저히 배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판단 기준은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사단과 하나님 중에 하나님을 택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법과 도덕을 비교해서 도덕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과 비복음(非福音)을 비교해서 복음 편에 선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 목숨을 걸고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이미 복음 안에서 썩어가는 옛 생명은 죽었고 영원한 새 생명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본문에서 법을 강조한 제사장들이 오히려 스스로 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사도들에게 탈옥한 죄는 전혀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법적으로 따지면 탈옥이 더 중범일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탈옥을 따지려면 하나님의 이적을 거론해야 하고 그러면 사도들이 전하는 바가 진리라는 것을 인정해 주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예루살렘에 유대교 대신에 다른 교가 번져서 자기들이 관장하는 통제력이 약해질까에 집중되었습니다.

신자도 진리 즉 십자가 복음이 방해 받지 않는 한 현실의 법을 지키고 세상의 권력자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말씀이 전해지는데 장애가 된다면, 특별히 하나님의 인도를 분명하게 받은 일에 그렇다면 생명을 걸고서라도 법을 어겨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은 전하는 자가 생명을 걸지 않는 한 진정한 생명의 말씀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세상과 인생에 관해 과학적 혹은 철학적으로 완전한 깨우침을 얻으면 염려가 없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바로 진리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복음만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운행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복음을 제대로 알고 분명하게 소유하고 있다면 복음을 위해 생명마저 바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마저 초월한 것 이상의 자유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신자를 자유케 한다고 한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기준이 모호해 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말씀에 비추어 조금만 묵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속에 아직도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고 복음에 대한 확신이 부족할 뿐입니다. 진정으로 복음을 위해 예수님, 히브리 산파들, 사도들, 본회퍼 목사처럼 목숨 걸 준비가 안 되어 있을 뿐입니다.

“나는 온전한 복음을 소유하고 있는가? 그 복음이 나를 진정 자유케 하는가? 정말 살아도 죽어도 예수님만을 위해 살고 있는가?” 매일 아침 신자가 자신을 향해 묻고 또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우주에서 영원까지 남아 있을 진리라고는 십자가 복음만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법 이전에 도덕을, 도덕 이전에 진리를, 그것도 영원한 진리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불신자는 그 순서가 정확히 반대로 즉 법에만 안 걸리면 된다는 방식으로 삽니다.) 당신은 지금 진정 자유합니까? 어느 정도만 자유합니까? 혹시라도 오히려 염려에 휩싸여 있지는 않습니까?

3/2/2007


조인구

2007.03.02 03:23:01
*.75.50.61

아멘 아멘

허경조

2007.03.02 14:22:13
*.80.180.198

허관

2007.03.03 20:12:26
*.86.204.111

생명의 말씀은 전하는 자가 생명을 걸지 않는 한 생명의 말씀이 될수 없습니다.
복음과 비복음을 비교해서 복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 말씀 붙잡고 살길 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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