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품이 좋으니이다.”(시92:1-3)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 많은 사상자와 물질적 손해가 있었지만 한 신자의 가게는 손상이 전혀 없고 다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연의 일치로 보지만 신자들은 자주 겪는 일로서 그 배경에 있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에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렇지만 때로는 솔직히 그 감사가 자칫 남의 어려움은 외면하고 자기가 받은 은혜만 감사하는 이기적 행동은 아닌지 의아스럽습니다. 말하자면 그 감사를 역설적으로 해석하면 “이번 태풍에 죽은 자가 내 가족이 아니라 이웃 김 씨네라서 감사합니다.” 또는 “우리 가족만 특별히 살려 주어서 감사합니다.”라는 뜻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마저 당신의 자녀만 돌보는 이기적인 분이 아닌가 싶어 당혹스럽습니다. 자기보다 형편이 더 딱했던 사람들은 다 희생되고 오히려 자신만 멀쩡하면 더 그렇습니다. 자기는 아무 자격도 없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편애를 받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신자로선 자기에게 일어난 범사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범사(凡事)란 인간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의 좋은 일뿐 아니라 흉한 일까지 포함하기에 이처럼 신자 혼자만 은혜 받은 것 같은 경우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내포되어 있고 또 그분이 그 뜻을 이루기 위해 하신 일이기에 신자로선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태풍에 전혀 피해 입지 않게 된 것에 신자가 관여 하여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아마 태풍에서 지켜달라고 기도는 했을 것이지만 남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 자기만 살려달라고는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이 한 일이 아니므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 되며 또 그러니까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 지당한 말인 것 같습니까?
인간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자기 기대와 예상한 것과는 다르게 사태가 진전되면 감사보다는 불평부터 쉽게 나오는 존재입니다. 신자들이 기도할 때에는 그저 모든 일에 감사한다고 말로는 쉽게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하나님 하신 일이 자기 기대나 예상보다 좋지 않다는 인식이 들었음에도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감사가 아니라 가식, 위선, 과장, 아부로 단순히 만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을 논리적으로만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의외로 아주 어렵습니다. 진정한 감사를 하려면 범사에 그분의 절대적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여야 합니다. 신자의 영향력과 공로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일이 진행되는 과정이나 그 결과에서 스스로 기대하거나 예상한 것에 대한 미련을 단 한 치도 적용시키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어려운 일에도 감사가 나와야, 최소한 불만이 앞서지는 않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그분의 자기 평생을 향한, 아니 영원에 걸친 절대적인 계획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전부를 완전히 그분께 드려서 어떤 길로 인도하던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현실적으로 이해가 되던 안 되든,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어떤 손해가 있든 없든, 축복이 많든 적든, 그분의 온전한 인도라는 확신 위에 실제 따르고 있어야 합니다.
흔히들 예수 믿는 신자만 천국 갈 수 있다는 기독교 진리에 대해 기독교 안팎으로 의심과 불만이 따르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비유컨대 태풍을 겪은 신자가 모든 것을 다 잃고 목숨만 건졌어도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이웃 사람이 다 죽고 자기 혼자 살아남아도 감사할 것입니다. 그 때 목숨을 살려주려면 이왕에 가게까지 지켜 주었어야 한다거나 또는 다른 사람도 함께 구해주지 않았다고 불평할 신자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떤 경우에 있어서나 완전하십니다. 인간 쪽의 조건이나 공로로 인해 편애하거나 차별하지 않습니다. 오직 당신의 완전하신 뜻 안에서만 행동하며 그 뜻 외에 영향을 받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본 시편의 표현대로 지존자(至尊者)입니다. 지극히 존귀한 자로서 당신이 하는 일에 죄악 뿐 아니라 불공평, 모순, 왜곡은 단 하나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분의 인자가 성실하지 않은 때라고는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의 기자는 “정숙한 소리”로 찬양 한다고 했습니다. 악기 반주나 노래 소리가 청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의심, 불만, 불신이 한 치도 섞여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영원토록 성실하기에 자신도 온전한 믿음으로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온전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야말로 참 감사의 출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한 측면에서만은 지극히 이기적입니다. 당신의 아들이 피 흘리며 죽은 십자가는 너무나 편애하십니다. 그 십자가를 절대적으로 사랑하시기에 그 앞에 겸비하게 나오는 자 또한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신자 쪽에 사랑할만한 구석이라고는 단 하나 없어도 십자가를 통과했다는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영원토록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모든 인류가 십자가를 외면하고 오직 한 사람만 그 앞에 나왔다 하더라도, 비유컨대 태풍으로 모든 사람이 몰살하고 한 사람만 살아남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하나님은 그 한 사람으로 인해 기뻐하고 또 기뻐하십니다. 남은 한 사람 또한 모두 멸망했어도 그분께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왜 구원하지 않았는지 의심, 미안한 마음,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다른 이들은 절대적으로 완전한 사랑인 십자가를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세상에서 핍박받고 손해를 겪어도 절대적인 그분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께 현실적으로 은혜 받은 것에 관해서도 감사할 자격이 없고 또 그래선 안 됩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이기적 목적으로 편애하는 것이며 그러면 신자가 하나님을 불공평하고 편애하는 분으로 바꿔버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찬양이나 감사가 정숙한 소리입니까? 다른 말로 설령 고난 중에 있더라도 절대적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십니까? 아니면 혼탁한 허스키 소리입니까?
3/1/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