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그 사람들이 가로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그 틈을 얻지 못하면 그를 고소할 수 없으리라 하고.”(단6:3-5)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볼 때에 주로 하나님이 기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모습에 열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니엘서에서도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살아났고 세 친구들이 풀무 불에서 건짐 받은 이적은 잘 기억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키우고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세상의 어떤 큰 위험에서도 지켜주시는 표적이 따르리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곳곳에 신자가 정작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구절들을 숨겨 놓았습니다. 사실은 숨겨 놓은 것이 아니라 아주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는데도 신자들이 건성으로 읽고 치웁니다. 본문이 바로 그런 구절로 꼭 깊이 새겨 보아야 할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대 왕국의 마지막 왕 다리오가 다니엘이 유대인 포로 신분이었지만 아주 지혜로운 것을 보고 3명의 총리 중 하나로 세웠습니다. 그러자 기존의 총리들과 방백들이 왕의 총애를 받는 그를 시기하여 모함하려 시도했습니다.
그들은 다니엘이 국사에 잘못한 것 한두 개 정도는 쉽게 찾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설령 업무수행 상의 하자를 못 찾더라도 자기들 경우에 비추어서 금전적 부정은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 지레 짐작했습니다. 사람이 죄에 빠지기 가장 쉬운 길이 바로 돈의 유혹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 그릇함과 아무 허물”을 찾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업무상 하자를 후자는 금전적 잘못을 뜻하지 않습니까? 흔히 말하듯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다고 자신 있게 덤볐다가 정말로 먼지가 안 나는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단언했지 않습니까? 신자는 세상에서도 맡은 바 일에 성실하고 도덕적으로도 순전해야 합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들이 온갖 궁리 끝에 생각해 낸 계교가 참으로 흥미롭지 않습니까? 다니엘을 유심히 관찰해 본 결과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세상 어느 신에게도 절대 경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왕 외에 어느 신이나 사람에게 구하지 못하게 하면 당장 걸려들 것이라는 추측은 정확했습니다. 다리오 왕으로선 30일간 전 국민이 오직 자기에게만 충성을 서약하는 기간을 갖도록 하자는 조서에 어인을 찍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다니엘을 곤경에 빠트리기 위해 자기들 신에 대한 경배마저 잠시 중단했습니다. 시쳇말로 자기들도 어느 정도 같이 손해를 보되 특정인을 완전히 망하게 하는 물귀신 작전을 구사한 것입니다. 살인죄를 범하려는 흉계를 오히려 왕에게 충성을 맹약하는 선한 모습으로 위장했습니다. 나아가 자기들 신에게 30일 간이나 경배하지 않아도 그 신으로부터 아무런 벌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까지 감안했습니다. 자기들 신과 살인을 공모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자기들이 만들어서 자기들 마음대로 부려먹는 신이라 함께 의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거짓의 아비 사단의 종들이 범하는 행태입니다. 사단도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지만 인간을 속여서 죽음으로 내모는 짓밖에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유대 종교특권층과 로마 총독과 헤롯 왕 즉, 평소의 세 원수가 서로 화해하는 선한 모습을 연출하지 않았습니까? 유대민족의 앞날을 위해서 한 사람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의로운 명분을 앞세워서 말입니다.
다니엘은 오직 개인적 신앙 양심을 버리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바꿔 말해 왕에게만 경배한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선 하나님에 대한 양심도 버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다니엘은 하나님과 세상 둘 중에 오직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삼았습니다.
신앙양심은 영혼과 연계된 것입니다. 매대 관리들은 그 금령으로 다니엘의 영혼을 사거나 사는 것이 불가능하면 파괴시키려 한 셈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맡겨진 자기 영혼을 절대로 사단에게 팔아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처럼 신자는 믿음 말고는 시비 거리가 없도록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세상 사람들처럼 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잘못은 절대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혼에 두 주인을 모시거나 하나님 외에 다른 주인을 모시어선 안 됩니다. 그분을 향한 영혼을 성결하게 지키기 위해선 자신의 다른 모든 부분에 손해, 위험, 심지어 잃어버리는 일까지 생기더라도 아무 후회가 없어야 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마10:28) 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자기를 시기하는 자들이 파 놓은 함정에 아무 주저나 후회 없이 말려들었습니다. 사실 함정에 말려들었다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그는 평소에 늘 하던 대로 예루살렘을 향해 창을 열어 놓고 하루 세 번씩 기도했을 뿐입니다. 그에게 여호와를 경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하루 세끼 밥 먹는 일을 그만두라는 말과 같았습니다. 아니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라는 말과 같았습니다. 그로선 아예 불가능하고 말도 안 되는 요구였습니다.
당연히 사자 굴에 던지어졌지만 하나님이 기적으로 그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더 이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당신을 믿는 믿음이 너무 좋은 것 말고는 흠결이 없고 또 당신께 간구하면 당장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주저 없이 경배한 자를 구해주지 않고 어찌 그냥 놓아두시겠습니까?
또 메대 사람들이 눈에 가시 같은 디니엘이 죽어서 기뻐하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여호와를 열심히 믿었는데도 그 신에게서 버림받았으니 그 신은 믿을만한 신이 못된다고 선동하지 않겠습니까? 나아가 자기들은 그의 죄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숨겨진 죄가 있어서 신의 심판을 받았다고 떠들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고 또 그로 인해 당신의 경건한 자녀가 위험에 빠진 것은 절대 그냥 두고 보시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다니엘을 구해주어야 했습니다. 단순히 당신의 큰 능력을 보이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앞으로도 평소 하던 대로 살아갈 경건하고도 성결한 인생을 통해 당신의 이름이 이방 땅에 더욱 영화롭게 드러나기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의 세 친구의 풀무 불 사건에선 “그리 아니하실찌라도의 믿음”을,. 이제 다니엘의 사자굴 사건에선 “세상에서 아무 흠결이 없는 믿음”을 보았습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이 오늘날의 신자에게서도 똑 같이 발견하고 싶은 믿음이지 않습니까? 다니엘서에서 우리가 이적 대신에 진짜로 귀담아 들어야 할 메시지 아닙니까?
우리 또한 예수를 너무 잘 믿고 또 믿은 대로 살고 있다는 것 말고는 세상 사람들과 시비 거리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소한 그렇게 되도록 항상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인생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혼의 고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이 없어져도 주저나 후회하지 않는 그런 인생 말입니다. 한 마디로 아무리 털어도 먼지는 나오지 않고 오직 예수를 올바로 믿는 믿음만 나오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8/6/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