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가난한 이유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찌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찌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찌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찌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학1:5,6)
사람은 참으로 간사하고 게으른 존재입니다. 눈앞의 고난만 피하면 그만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 때는 귀환만 시켜주면 더 이상 죄 짓지 않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돌아와선 그 신앙적 열정은 어느 듯 식어버리고 오직 먹고 사는 일에만 모든 힘을 쏟아 부었습니다. 학개 선지자가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고 다그칠 만합니다.
흔히들 이 경고에 의거하여 신자는 교회 일에 최우선적으로 집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심지어 자기 집을 팔아서라도 교회 건축에 보태어야 한다고 강권(?)합니다. 성전 건축은 뒷전이었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수입이 적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듯이 건축 헌금을 적게 내는 자는 사업이 부진할 것이며 많이 내는 자는 흥하게 될 것이라고도 예언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려 하자 하나님은 오히려 말렸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삼하7:5-11) 심지어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한 적도 없다고 상기시켰고 인간이 하나님이 거할 집을 지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이 거할 집을 지어주신다고 합니다.
학개의 꾸짖음도 성전 건축을 등한히 했기 때문에 벌주겠다는 뜻은 없었습니다.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찌니라”고 했지 “내가 너희를 굶게 하며 외적의 침입을 받게 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많이 뿌릴찌라도 수입이 적으며”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판벽한 집에 거했고 또 많이 뿌릴 정도의 형편은 되었습니다.
대신에 너희들의 영육간의 상태를 스스로 잘 따져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먹고 마셔도 과연 흡족함이 있더냐고 물은 것입니다. 개인의 판벽한 집과 하나님의 황무한 성전은 어디까지나 상징적 비유일 뿐이었고 실제로는 전자는 유대인들의 현실적 상태를, 후자는 영적인 상태를 비교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않고는 아무리 현실에서 부족함이 없어도 참 만족과 평강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하나님께 바치는 것에 비례해 상벌을 받을 수 있다는 기복적 신앙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성도 개인의 현실적인 형편을 다 희생하고 무조건 교회 생활에 최우선을 두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겸비해져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그분의 은혜와 권능 안에서만 살라고 요구하지 뭔가 좋고 거창한 것으로 당신께 바치라고 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성도 각자를 향한 유일한 관심은 항상 영적으로 충만해지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따져 신자가 영적 무관심과 나태에 빠져 있다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 정상인이 아무 것도 안하고 식물인간처럼 지내는 법은 없으니까 지금 뭔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상벌을 주시기 이전에 당연히 그 존재와 삶과 인생에 구멍이 나서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학개는 유대인에게만 성전 건축을 재촉한 것이 아닙니다. “현실에 아무 문제가 없어도 영적으로 충만치 않고는 참 만족과 평강은 결코 없다. 그런데도 언제까지나 말씀과 기도는 등한히 하면서 먹고 마시고 있을 것이냐?”라고 오늘날의 우리에게 말한 것입니다.
9/21/2007
추석이 몇일 남지 않았는데 목사님을 비롯하여 이곳을 출입하시는 분들 모두 무사평안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