핍박을 찾아가고 있는가?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고전16:7-9)
바울은 원래 고린도를 먼저 방문한 후 마게도냐로 가려했다가 순서를 바꾸어 마지막에 고린도를 방문하겠다고 합니다. 대신에 에베소와 고린도에서 얼마동안 머물러 있겠다고 합니다. 계획의 변경이 단순히 여행일정상의 편의를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우선 에베소에선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렸다고 했는데 복음이 서서히 전파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체류를 연장해야 할 사유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대적하는 자가 많다고 합니다. 핍박이 심한데도 더 남아 있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에서 얼마 동안 유하겠다는 의미도 동일합니다. 교회 내 분쟁과 도덕적 타락이 심했으며 신학적 질문들이 제기되었습니다. 단순히 인사차 방문해 헌금만 지원 받을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교인들을 복음 위에 다시 바로 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그를 반대하는 자들도 많아 충돌 내지 박해가 있으리라 충분히 예상되었지만 전혀 괘념치 않았습니다. 에베소나 고린도에서 그는 박해를 피한 것이 아니라 일부러 찾아간 셈입니다.
그의 삶의 목표는 오직 두 가지, 사단에 미혹된 영혼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또 복음 안에 이미 들어온 자들은 거룩하게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표를 이룰 수만 있다면 자신의 부귀영달, 안전, 심지어 생명까지 전혀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가미가제 특공대 식으로 아무 원칙 없이 무조건 밀어붙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첫째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되 가능한 효과적인 방식을 도모했습니다. 일례로 그는 율법에 익숙한 유대인과 그렇지 못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태도가 달랐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입니다.
둘째 신자에게 문제가 있다면 끝까지 책임지며 해결해주려 했습니다. 얼마 동안 유하겠다는 말 자체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있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그는 복음이 필요한 곳이라면, 즉 반드시 전해져야 하거나 성도가 쓰러져 있다면 형편이 어떠하든지 따지지 않고 언제 어디나 달려갔습니다. 실제로 목숨이 경각에 달린 곤경을 수없이 겪었지만 도리어 자나 깨나 교회 즉 성도들을 염려했습니다.
비유컨대 그는 예수를 만난 이후로는 항상 화약을 지고 불에 들어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세상 풍조와 정반대로 거스르는 십자가를 사람들 눈에 확연히 보이게 지고 다녔기에 자연히 위험, 반대, 박해가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그랬지 않습니까? 그럼 예수님을 따르는 자도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지 못하는 신자가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닙니까?
신자더러 자기 영육 간의 형편이 어떻게 되든 아예 상관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1:18,2:17) 바울은 복음이 전파되고 성도가 자라는 두 가지 목표를 위해서만 살되 업적을 이루기보다 진짜로 아주 기뻐하며 그 일을 했습니다.
참 기쁨이 따르지 않는 인생 목표는 자기 공로와 의밖에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 군병으로 목숨까지 걸며 살려면 반드시 참 기쁨이 동반해야 합니다. 아니 그렇지 않으면 목숨까지 걸 수 없습니다. 바꿔 말해 십자가 없는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오는 핍박이 복음의 필연적인 열매이자 참 기쁨이기에 신자는 그 기쁨을 찾아가는 자라는 뜻입니다.
9/30/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