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의 쏘는 것은 없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5-57)
사람은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다 죽게 마련입니다. 세상에서 겪는 모든 고통은 인간의 노력으로 경감시키거나 없앨 수 있지만 사망만은 도저히 어쩔 재간이 없습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닥칠지 아무도 예측 못합니다. 당연히 죽음에 대해선 체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에는 그런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거치면 지옥과 천국이 있습니다. 죽음을 거치지 않으면 그곳에 갈 수 없습니다. 지고(至高)의 고통과 행복이라는 인생의 궁극적인 도착지는 두 곳이지만 가는 길목은 죽음 하나뿐입니다.
신자와 불신자는 죽음에 대한 시각과 평소 대비하는 모습이 다릅니다. 불신자는 죽음 이후 아무 것도 없거나 있어도 이 땅에서 쌓은 공적으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연히 현실적 형통만 추구하거나 자기의 열심과 치성으로 신을 감복시키려 듭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막상 죽음이 닥치면 그 생각은 여지없이 부서집니다. 죽음을 전혀 통제할 수 없기에 완전한 무력감을 느낍니다. 자기 삶의 종말이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좌우됨을, 즉 자기 인생이 자기의 것이 아님을 깨달아 보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손이 그것도 인간의 눈에 보이는 영역 바깥에서 출생과 사망을 주관했다면 죽음 너머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또 생전에 인간 임의로 쌓은 공적이 그 영역에선 아무 결과를 낳을 수 없습니다. 자기 삶을 실제로 주관하는 이가 따로 있음을 인정하거나 그분 앞으로 나와 자기를 낮추어 본 적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하나님이 주관하는 천국에 들어가려면 그분을 알고 믿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전혀 관심도 없었고 고의로 거부했던 자는 당연히 하나님이 안 계시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기에 그. 사망은 영원한 고통으로 이어지는 쏘는 것이 됩니다.
반면에 신자는 사망이 쏘는 것을 이미 극복했기에 죽음이 닥쳐도 전혀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단순히 죽음을 이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확신하여 영생을 소망하는 열심 때문이 아닙니다. 평소부터 영원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했기에 그분이 죽음 너머로도 함께 가주실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장래에 누릴 소망으로 소유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삶으로 실현했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의 영역에서 인간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오직 하나, 주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을 생전에 받아들여 그 사랑으로 살았는지 여부뿐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선 세상에서 통하는 재물, 권세, 명예,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것들이 많고 적음으로 발생하는 모순, 시기, 분쟁, 고통도 단 하나 없습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부활을 믿고 주님과 동행한다는 의미는 이 땅의 어떤 것으로도 자기 존재와 인생의 가치가 절대 좌우될 수 없음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실제로 아무 영향을 받지 않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지 못하면 죽어서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십자가를 지는 순간 영생은 시작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미래의 사망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이미 영생을 누리고 있습니까?
9/24/2007
예배중에 드리는 기도중에 "하늘에 게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부를 수 있고
부르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 신기하고, 뭐라고 표현 못하게지만 분명히
세상적인 것들로 느끼지 못하는 그 평안함과 기쁨이 느껴지는 그순간이 너무 귀합니다.
다만, 이러한 사랑과 기쁨을 알지 못하고 지금도 사단의 휘하아래 놓여있는
주변의 많은 인생들에 대한 아타까움은 더욱 커져만 가는것 같습니다.
이런 저의 마음도 하나님 께서는 알고 계실줄 믿고, 저의 존재와 인생을
오직 그분의 뜻에만 두기 원하며, 늘 건강하시길 또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