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과연 존재하는가?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고 있다.
기독교 전도가 타종교의 그것과 유별나게 다른 두 가지 특성이 있다. 우선 피전도자가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인이라도, 아니 아예 전도자의 원수라도 그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상대가 이미 다른 종교를 아주 열심히 믿고 있더라도 전해야 한다. 요컨대 모든 비기독교인은 어떤 신분과 상태에 있던 전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선 전도가 비종교인을 종교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죄인을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통해 의인이 되게 하는 일이기에 죄인일수록 오히려 더 전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인간 스스로 이룬 학식, 재산, 명예, 권세, 사상, 철학, 심지어 종교 등 그 어떤 것으로도 절대 죄를 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죄를 사해주고 또 죽음 이후 영원한 운명을 정하시기에 구원은 반드시 그분의 길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야 한다.
다른 말로 상대가 십자가 복음만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유일한 구원의 진리라는 점에 흔쾌히 동의하고 또 자기 인생을 그 진리에 온전히 바칠 수 있는 데까지 가야만 전도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이 기독교 전도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불신자가 그 단계에까지 이르기 위해선 기존에 갖고 있던 종교적 사고의 전환이 여러 번 필요하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한 분인지 여럿인지, 한 분이라면 어떤 분인지, 사후세계가 정말 있는 것인지, 있다면 어떤 모습인지, 인간은 또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이 땅에 살게 되었는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왜 하나님만 죄를 사해줄 수 있는지, 예수는 과연 누구이며 왜 예수만 구원의 길이 되는지 등등 온갖 꼬리를 무는 질문들에 대한 정확하고도 확신에 찬 답변을 가져야만 한다.
그럼에도 실제로 이뤄지는 전도의 모습은 전혀 딴 판이다. 일단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현실의 모든 문제도 해결된다는 식이 주를 이룬다. 그런 식의 전도는 너무나 큰 본질적 잘못을 내포한다. 우선 불신자는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는 점에 솔깃해져 기독교 신앙을 복을 받는 수단으로 삼고저 한다. 또 전도하는 신자도 전도하다가 간혹 위와 같은 질문들을 접하면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다. 그 자신도 사실은 그렇게 전도 받아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기에 그분이 베푸시고자만 한다면 혹시 잘못된 전도과정 중에도 구원의 은혜는 일어날 수 있다. 또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들을 수 있고 들어야만 믿을 수 있기에 미련하더라도 때를 가리지 않고 전해야 한다. 나아가 진정으로 회개하여 거듭나면 지혜의 영이신 성령님이 복음의 진리에 대한 깨우침을 주신다.
그러나 가만히 있는데 “뿅!”하고 득도(得道)케 해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진리에 대한 갈급한 마음과 순전한 믿음의 자세를 심어줄 뿐이다. 교회 출석한 후로는 반드시 십자가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 열린 마음으로 설교를 듣고 진지하게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 단순히 예수를 믿어 보기로만 해선 불신자 시절에 갖고 있던 온갖 의문들이 본인이 짐짓 외면하여 잠복되어 있을 뿐이지 자동적으로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전도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선 십자가 복음에 거침돌이 될 만한 상대의 종교적 개념들부터 제거 내지 고쳐줄 필요가 있다. 또 예수를 믿고 난 이후라도 그 작업을 계속해서 스스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일단 자기 교회로 데리고 온다고 전도가 된 것이 결코 아니다.
요컨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처럼 봉사가 봉사를 인도하여 함께 멸망의 길로 떨어지는 일들이 현재의 기독교 전도 현장에서도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신자부터 십자가 진리를 온전히 깨닫고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고”(벧전3:15) 있어야 한다. 지금부터 완전한 무신론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까지 이르는 단계별로 통상 제기되는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해나가 보기로 하자.
제일 먼저 접하는 반발
제가 불신자 시절에 전도하는 친구를 향해 매번 “하나님 계신 것을 증명해 보라. 그분을 내 눈 앞에 확실히 보여 봐라. 그러면 당장에라도 믿겠다.”고 삿대질하며 반발했었다. 불신자로선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여부부터가 가장 궁금하다. 하나님이 확실히 계신 것이 확실하다면 어찌 감히 믿지 않겠는가? 최소한 믿어볼 생각을 하거나 그런 반발은 못할 것이다.
유사 이래로 수많은 철학자나 종교가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모든 지혜를 짜내어 그럴듯한 이론들을 도출했다. 그 대표적인 것들로는 존재론적 증명, 우주론적 증명, 목적론적 증명, 윤리적 증명을 들 수 있다. (간단한 설명은 아래 별첨을 참조 바람) 그러나 그 모든 증명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념 안에 머무는 가설(Theory)에 불과하다. 또 가설은 반드시 과학적 실험을 통해 객관적으로 입증이 되어야만 확증된 진리로서 가치를 갖는다.
문제는 인간이 하는 실험의 대상이 되려면 반드시 가시적 물질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우주생성의 비밀을 밝혀보고자 빅뱅을 재현하는 초고속 입자가속기 실험도 인간의 육안으로는 너무 빨라 안 보이지만 분명히 입자라는 물체가 있기에 가능하다. 하나님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선 물질을 존재케 하고 그 모든 운행을 하는 절대적 존재가 하나님이다. 그분은 물질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딤전1:17)이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를 실험으로 알려고 덤비는 것부터 어리석다 못해 억지다. 아예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그 존재부터 부인하려는 의도다. 실제 제가 그런 반발을 했을 때도 상대가 하나님을 보이거나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분이 있는지 없는지 진지하게 따져보자는 뜻이 아니었다. 나에게 아무 도움 준 것 없고 믿어봐야 고리타분한 일만 생길 것 같아 지레 거부한 것이다. 더 이상 전도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우리보다 훨씬 똑똑한 철학자들이 제안한 가설들이 아무 효용성이 없다면 그분의 존재 증명은 포기해야 하는가? 도저히 알 수 없으니 평생을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로 지내야만 하는가? 그러기에는 너무 허무하고도 무책임한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존재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면 마지막으로 존재여부의 확률을 따져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은 도박 논증(Wager Argument)을 제안했다. 신의 존재를 어차피 증명할 수 없다면 일종의 도박을 할 수밖에 없는데 신이 존재한다는 쪽에 거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만약 없다고 걸었다가 있게 되면 낭패가 되지만 있다고 걸어서 없다고 판명 나도 아무 문제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런 도박 논증으로 믿음을 갖게 된 분을 알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어린아이까지 모두 진멸하라는 성경 말씀을 접하고는 그런 잔인한 하나님이라면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고 처음에는 반발했다. 그러다 불현듯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이 말씀이 진짜 그분의 말씀이라면, 믿지 않은 나도 바로 그런 잔인한 형벌을 받을 것이 아닌가라는 회의와 두려움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당장 믿어 보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 성경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 진지하게 탐구하기 시작했고 위에서 언급한대로 여러 단계의 종교적 사고의 수정 작업을 통해 십자가 복음 안에 완전히 들어오게 되었다.
하나님이 계실 확률
도박을 하려면 항상 확률을 따져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계실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 것 같은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없을 것 같기도 하니까 50%인가? 전혀 아니다. 예컨대 동전을 던져서 어떤 면이 나올지는 반반이다. 앞면과 뒷면이 분명히 있어서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우에 있는 것도 맞고 없는 것도 맞는다는 법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다. 확률로 따지면 100% 이거나 아니면 아예 0%다. 실험으로 증명이 안 되면서 그 확률마저 이러하다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인간이 취할 태도란 결국 믿든지 안 믿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밑져야 본전이니까 일단 믿고 보자는 식으로 도박하듯 선택할 수는 없다. 혹시 모르니까 천국 보험 들듯이 신앙을 가질 수도 없다. 어떤 사람을 무조건 혹은 만약을 대비해 믿어 보기로 했다고 해서 올바른 믿음이나 둘 사이에 바람직한 관계는 절대 생기지 않는다. 정말 아무 의심 없이 온전히 믿어져야만 믿음이다.
하나님이 존재할 확률이 100% 아니면 0% 둘 중 하나라는 논리가 단순히 산술적 계산의 정답이 아니다. 그 수치 자체가 근본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이미 all or nothing이듯이, 인간에게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바로 그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우선 하나님이 100%라는 절대적 확률로 존재한다면 그분도 그렇게 완전한 절대자다.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이 한 치의 결점과 모자람이 없이 100% 완벽하다. 지성과 능력과 사랑과 공의도 당연히 그러하다. 우주만물 전체가 그분으로 기인하며 그분 없이는 단 일초도 존재할 수 없다. 이 세상과는 완전히 구별된 거룩한 분으로서 이 우주는 오직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께서 만드신 인간에게 절대적인 경배와 찬양을 요구하실 수 있다. 아니 인간은 마땅히 그분에게 100%의 온전한 신뢰와 헌신을 바쳐야 한다. 전 재산을 팔고 언제든 목숨을 바치라는 뜻이 아니다. 모든 사고와 말과 행동이 100% 그분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인생관, 역사관, 세계관, 도덕관, 종교관, 신관 등 모든 가치에서 유일한 근거가 그분이어야 한다. 한 마디로 그분을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의 유일한 주인으로 모셔야만 한다.
반면에 0%라는 확률로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와 정반대가 성립될 수 있다. 우주는 오직 물질로만 형성된 가시적 영역뿐이다. 절대적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은 아예 존재조차 않는다. 당연히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가치, 도덕, 의미, 목적이 없다. 모든 인간은 정말 이 땅에서 제 멋대로 살면 그만이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의 풍족함과 기분을 충족시킬 쾌락만 추구하면 된다. 또 그렇게 사는 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잘못됐다고 야단치거나 간섭할 근거가 없다. 남들에게 현실적 피해만 안 주는 한에는 말이다.
그래도 인간이 고등 동물인데 그럴 수는 없다는 반발 또한 아무 의미와 논거가 없다. 생각해보라. 절대자가 없고 사후에 천국과 지옥의 상벌도 없다면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현명하겠는가? 감옥에 가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지 않는가? 나는 하나님은 안 믿지만 그래도 선하게 살겠다고 노력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여러 방식 중의 하나일 뿐이다. 또 그렇게 살았다고 해서 과연 궁극적인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라면 절대 비겁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취할 태도는 그분께 전부를 거느냐 아예 아무 것도 걸지 않느냐 둘 중 하나다. 이미 믿음을 가진 자는 다시 한 번 자기 신앙 가운데 그분을 절대적 하나님으로 굳건히 모셔야 한다. 그분에게는 절대로 결점, 부족, 수정, 가감이 있을 수 없다.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은 절대적으로 완전한 100%의 공의와 100%의 사랑이 100% 조화를 이루어 당신의 영광을 100% 완벽하게 나타낸다. 한 마디로 그분은 무조건 옳다는 뜻이다. 모자라는 것은 신자의 이해와 믿음이지 그분이나 그분의 역사가 절대 아니다.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로 어느 종교가 옳으냐의 문제를 따지자는 뜻이 아니다. 인간의 근원을 밝히는, 더 정확하게는 자기 자신의 뿌리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비록 부모가 자신을 낳아주었지만 단지 생물학적 육신의 부모일 뿐이다. 그 부모도 뿌리에 뿌리를 찾아서 올라가면 결국에는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인가, 아니면 물질에서 우연히 진화된 존재인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인간으로서 이 문제부터 확실하게 해두지 않으면 자기 생일, 아니 부모를 모르는 고아 내지 사생아로 인생을 마치겠다는 심산일 수밖에 없다. 바꿔 말해 하나님이 존재할 확률을 0%로 믿고 사는 것이다.
간혹 도대체 어느 쪽이 맞는지 도무지 자신이 안서니까 가장 확실한 것 하나 인간이 실존(實存)하고 있다는 사실만 붙들겠다고 하는데 오히려 가장 비겁한 짓이다. 만약 100%나 0% 둘 다 틀릴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불가지론자가 가장 현명하다. 그러나 둘 중 하나는 분명히 옳다. 비유컨대 고아에게 생부모라고 주장하는 자 둘이 나타났는데 모든 정황을 검토해 봤더니 분명 둘 중 하나가 친부모인 것이 확실한 경우와 같다. 그런데도 DNA 검사하여 어느 쪽인지 밝혀보지 않겠다고 하는 셈이다. 그럼 그 이유는 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다. 부모가 생기면 귀찮고 이제껏 그대로 제 맘대로 살겠다는 심보다.
불신자를 비난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불신자가 자신의 믿음이 옳다고 확신한다면 정말 불신자답게 살아야 한다. 문제는 겉으로는 하나님이 없다고 큰소리치지만 실제 사는 모습에선 결코 완전한 불신자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으면 절대적 도덕 기준도 없으므로 남에게 피해를 안 주는 한에는 제 멋대로 살면 된다. 요즈음 세대가 사는 모습이 실제 그렇지 않은가? 또 그 대표적 예가 동성애 문제다. 둘 만의 은밀한 성적 관계니까 자식이 관계되는 혼외정사보다 그야말로 남이 뭐라고 간섭할 근거가 없어 보인다. 그럼 불신자들은 마땅히 동성애를 좋아해야, 최소한 싫어하지 않고 진심으로 동의해 주어야 하지만 막상 자기 자녀들이 그렇다면 과연 그렇게 해줄 수 있는지 여부는 전혀 별개이지 않는가?
현대 실존주의 철학의 거장 샤르트르도 그와 유사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복음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쉐퍼가 지적했다. 샤르트르는 윤리란 삶과 상관성이 결여되었다고 보는 윤리적 허무주의 입장을 견지했다. 절대적 윤리가 없기에 만일 어떤 행동을 함에 윤리적 요소가 나타나도 도덕적 기준에 따라 결단을 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의 알제리 점령을 반대하는 지식인들의 알제리 선언에 서명했다. 다른 말로 실제 현실에선 그의 윤리적 관점을, 즉 프랑스에 의한 알제리 강점은 나쁘다고 분명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쉐퍼가 “샤르트르를 비롯한 다른 허무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사상체계의 결론대로 살 수 없다”고 비판한 것이 불신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나님이 0%로 절대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 죄가 아닌 동성애를 싫어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사상체계대로 실제로는 살지 못함을 입증한 것이다. 쉬운 예로 “인간이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를 수 있는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다”, “천벌을 두려워해라”,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겨라.” 등의 말을 해선 안 된다. 하나님이 없다는 자신들의 믿음을 스스로 부인하는 자가당착이지 않는가?
정말로 불신자다우려면 감옥에 안 가는 한도 내에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돈을 벌고 또 그 번 돈으로 최대한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 인간이 정말로 인간으로서 비겁하지 않으려면 100%와 0% 둘 중에 확고하게 하나를 골라서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 고아가 자기 앞에 나타난 친부모의 DNA 검사마저 안 하겠다는 것이 말이 될 법이나 한가?
물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논리적 추론만으로 쉽사리 생길 수는 없다. 둘 중 하나를 면밀하게 검토해서 하나를 선택해도 여전히 미심쩍기는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천국보험에 들거나 심지어 도박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썩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최소한 둘 중 어느 쪽이 과연 더 합리적일까, 둘 중 하나는 분명히 진리이므로,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따져 보기는 해야 한다. 만약 100% 확률이 더 옳아 보이면 정말 자기 친부모를 찾는 고아의 심정으로 마음을 열고 하나님에게 자기 인생 전부를 걸어보아야 한다.
이 부분에서 정확히 해 둘 사항이 있다. 고아가 친부모를 찾을 마음이 전혀 없으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은 0%의 확률로 떨어지며, 그 반대로 진정으로 찾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응당 100%의 확률로 정해진다는 점이다. 무슨 뜻인가 하면 100%나 0%의 확률 둘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이 불신자가 우선적으로 해결할 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과연 나의 친부모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선결될 과제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친부모를 찾고자 100% 확률을 붙드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을 찾게 되고 알게 되고 믿게 된다는 것이다. 전자를 택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찾은 것인데, 그런 절대자가 진정으로 당신을 찾고자 하는 당신의 자녀를 모른 척 할 리는 만무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쪽으로 스스로 선택했다 하더라도 진짜로 갈급한 진정성에 의했다면 그분이 당신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해주신다. 요컨대 하나님의 존재성은 결코 보험이나 도박처럼 맹목적 선택으로는 절대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오직 열림 마음에 의해서만 확고한 믿음으로 변화되어질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전자를 진정으로 택한 자는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이 땅에서부터 믿음으로 받아 누릴 수 있다. 반면에 후자를 택한 자는 진짜 자신의 그 믿음대로 살아야 한다. 도무지 그 믿음대로 살 수 없다면 정말로 한 번 진지하게 검토해 봐야 한다. 친부모 확인 소송을 자신의 전 존재와 인생을 걸고 제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불가지론으로 살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가장 비겁한 짓이다.
10/1/2008
별첨: 하나님 존재성에 대한 철학적 논증
-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Proof for the Existence of God):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 이상으로 더 위대한 존재가 있을 수 없는, 가장 완전한 존재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논리
- 우주론적 증명(Cosmological Proof):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그 원인이 있는데 계속 그 원인을 추적하다보면 원인이 없는 최초의 원인이 반드시 있다는 생각
- 목적론적 증명(Teleological Proof): 자연에 드러나는 모든 질서가 우연히 이뤄졌다고 보는 것은 마치 시계가 우연히 파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과 같듯이, 시계보다 훨씬 복잡한 우주는 당연히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논리
- 윤리적 증명: 보상을 바라고 행하는 선은 진정한 선이 아니므로 순수한 동기의 선행은 사후에라도 보상을 받아야 하기에 내세의 궁극적인 인과응보가 이뤄져야 한다는 사고
다시 아버지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