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부재증명(不在證明)도 할 수 없다.

조회 수 2264 추천 수 207 2008.10.24 21:5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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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부재증명(不在證明)도 할 수 없다.



어린 아들의 쇼킹했던 기도


제가 교회에 출석하게 된 동기 중에는 남들과 다른 특이한 측면이 하나 있다. 아주 신령하고 극적인 체험을 했다는 뜻이 아니다. 삼십대 초반까지 너무나 고집 센 불신자였음에도 아이들과 아내는 먼저 교회에 출석하도록 허용했다. 아내가 신자였든 탓도 있지만 아이들이 교회에 가서 도덕적 훈화를 들어서 하나 손해 볼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학교 밖에서의 사회생활과 다양한 인간관계도 익힐 수 있는 유익도 있다고 보았다.

하루는 밥 먹으면서 아내가 둘째 아들에게 식사 기도를 시켰는데 제가 큰 쇼크를 받았다. 단순히 오늘도 맛있는 음식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이 아니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가 대뜸 “우리 아빠 예수를 믿어 지옥가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예사롭게 식사를 마쳤지만 내심으론 아주 크게 당혹되었다. 지옥 가게 될 것이 두려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제 대여섯 살 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천국과 지옥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저런 기도를 하는가 싶어 더 큰 충격이었다. 순진한 아이를 저렇게 세뇌교육을 시킨 교회에 대한 분노마저 치밀었다.

그래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당장 교회를 그만 나가게 하자니, 다른 모든 유익을 포기하는 것도 아쉽지만, 기도한 내용이 완전히 틀렸다고 납득될 정도의 타당한 이유를 말해주어야만 했다. 아빠를 위한 첫 기도를 그렇게 할 정도라면 보통 견고한 믿음이 아닐 텐데 아빠나 교회 선생 둘 중 한 사람은 의로운 자요 다른 이는 거짓말쟁이가 되는 싸움을 벌려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 나이는 스펀지처럼 선생이 가르치는 것은 아무 여과 장치 없이 그대로 다 흡수할 때다. 그런데 이미 저장된 내용을 빼는 대신에  정반대 내용을 집어 넣어주어야 한다. 이제는 아이도 스펀지에 머물지 않고 틀림없이 나름대로 비교할 텐데 거꾸로 세뇌작업을 하려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저런 골치가 아프지 않으려면 무조건 강제로 교회가지 못하게 하면 그만이지만 아이 앞에 아비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온갖 궁리 끝에 일단 교회를 함께 나가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교회 선생과 아버지 둘 다 체면을 세워주려는 타협의 뜻이 아니었다. 아이가 그렇게 기도할 정도라면 아빠가 지옥 불에 타는 꿈을 심심찮게 꾸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아빠를 볼 때마다 얼마나 염려할 것인가? 우선 그 걱정부터 덜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나 막상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솔직히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고 천국과 지옥도 없으니 아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설득시킬 재간이 도무지 없었다. 남을 설득하려면 자신부터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분간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일단은 그런 쓸데없는(?) 기도를 중지시키고 저부터 하나님에 대한 가부간의 확신을 가진 후에 아이가 자라 말이 통할 때쯤 다시 이야기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물론 그러고도 한참 있다가 교회에 출석했고 또 거의 마음이 열려 믿음도 어느 정도 생긴 후에 나갔기에 더 이상 그 문제로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아이의 그 기도 사건이 교회 출석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 하나의 계기로 작용한 것은 틀림없다.  

모든 인간은 신앙인이다.  

하나님의 실재(實在) 부재(不在) 공(共)히 인간이 과학적으로 절대 증명할 수 없다. 우주 만물을 지으신 분이 실험실 모르모트가 될 수는 없지 않는가? 인간은 단지 지성을 최대한 동원하여 반드시 있어야 할 타당성과 개연성만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불신자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없어야 할 논리적 근거와 이유는 얼마든지 갖다 댈 수 있다.  

예컨대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의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유명한 책을 필두로 최근에는 리차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전 세계적으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심지어 도킨스는 무신론 전도사로 자처하면서 불신자들로 종교인, 그 중에 특별히 기독교와 맞서 싸우라고 부추기기까지 한다. 결국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한 과학적 증명은 불가능하고 논리적 추론도 결론이 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따져 볼 수 있는 하나님이 있을 확률도 명확치 않다. 단지 100% 아니면 0%다. 이 수치를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있으면 절대적으로 있고 없으면 절대적으로 없다는 것이다. 비록 둘 중 하나로 확정 되지는 않았지만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옳고 그 반대는 당연히 틀린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해 어느 누구도 반론 하지 못하는 유일하고도 확정적인 진술이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면 자신의 의견을 이 둘 중 하나를 택해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 여부에 관한한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없을 것도 싶다는 중간 회색 지대는 결코 없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생활 방식 자체에 이미 확연히 둘로 나뉘어 있다. 스스로 의식하든 못하든 자기 인생을 하나님의 존재 여부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 의존하고 있다.  

다른 말로 유신론과 무신론이 종교인들만의 논쟁 주제이거나, 나아가 그들의 삶만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사실상 이 둘 중 하나의 신앙 체계 아래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실존적 현상이다. 말하자면 불신자들은 증거든, 논리든, 믿음이든 자기가 무신론을 따지고 선택하여 믿지도 않았는데, 아니 그럴 마음조차 없었는데, 이미 무신론에 묶여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본인이 종교적 용어로 서술하거나 주장하지 않거나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해도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예컨대 세상에선 인간을 건강, 외모, 인격, 지성, 재물, 권력, 명예 등의 기준으로 분류한다. 아주 착하고 조금 착하고 조금 악하고 아주 악한 것 같은 분류다. 순전히 인간의 자질과 능력에 따라 인간 스스로 인간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분류 기준에 하나님이 영향을 끼친 요소는 전혀 없다. 인간이 이미 무신론의 바탕에서 판단하고 행동했다는 뜻이다.  

또 그런 분류 항목들은 훈련하고 노력하면 질적 양적 향상을 기할 수 있어 사람을 정확히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이 못된다. 말하자면 착하고 악한 것으로 따지면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하며 돈과 권력도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적 차이가 아니라는 뜻이다.

반면에 유신론, 즉 하나님이 100%의 확률로 존재한다는 바탕에선 인간을 어떻게 나눠야 하는가? 쉽게 말해 하나님의 입장에서 인간을 분류한다면 어떻게 나누겠는가? 그야 당연히 유신론자와 무신론자 둘뿐이다. (기독교에서 믿음으로만 구원 여부가 결정되는 근거다.)
        
이처럼 불신자는, 아니 모든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기 이전에 이미 무신론 체계 아래에서 살게 되어 있다. 성경대로 말하자면 세상은 항상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의 조종 아래 있다. 인간이 원죄 아래 있다는 또 다른 의미가 바로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의지와 선택과 기호 여부에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무신론 체계 아래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원하든 원치 않던, 좋아 하든 싫어하던 그렇다. 따라서 인간에게 지어진 문제는, 제가 아이의 기도로 인해 갈등했던 것처럼, 유신론에 대한 가부 간을 반드시 확정짓는 것이다.  

물론 지금껏 나면서부터 살아온 체계에서 다른 체계로 넘어갈 것인지, 아니면 현 체계로 그대로 가도 후회 하지 않을지를 결정하는 문제이기에 결코 쉽지는 않다. 무신론과 비교해 논리적으로 더 확실해 보여서 택하거나 혹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차원이 솔직히 아니다. 실제적으로 증명, 논리, 확률 그 어느 방식으로도 확정되지 않은 문제인데다  믿음도 어지간해선 생기지 않지 않는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평생에 한 번은 집고 넘어가야할 일생일대의 결정이라면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않겠는가? 무신론 체계에 남는다면 남는 대로, 유신론 체계로 넘어간다면 넘어가는 대로 말이다.  

하나님이 있다는 의미는?

그럼 하나님과 무관한 자연인 상태로 남아 있는 것과 그분을 믿는 신자가 된다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선 그 정도를 말하면 아주 판이하게 구별될 뿐 아니라 완전히 다르다. 같은 종류의 삶에서 질적 양적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다. 비유컨대 전자는 같은 나무의 열매들이 색깔과 크기와 맛에서만 차이 나는 정도라면, 후자는 아예 나무가 달라 열매도 다른 것이다.

그 다름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좋은 예가 있다. 앞에서 말한 저와 둘째 아들과의 차이다. 저는 아이가 교회 출석하면 훈화를 들어 착하게 되고 또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에 여러 유익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오직 인간 쪽에 바탕을 둔 생각이었다. 혹여 아이가 교회에서 아무리 성경 암송이나 퀴즈 대회 일등을 해도 내 생각에 변화가 없다면 사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내 생각과 행동은 여전히 철저하게 내 자신에게만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제 아들은 진짜 천국과 지옥의 존재와 최후의 심판이 있음을 믿었다. 지금 아이가 너무 순진해 그냥 꼬임에 넘어갔다거나 혹은 아주 순수해서 곧이곧대로 믿었다는 식의 논의가 아니다. 정말 아빠의 장래가 심히 염려되어 간절히 기도했다. 유신론 체계란 이처럼 반드시 행동이 따르는 믿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 논리, 확률에 구애 받지 않고 실제로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100% 확률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진짜로 자신에게 절대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의 기준으로만 따져 보면 필연적으로 이 땅이 전부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실체는 오직 육체적 출생과 죽음 사이의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외의 영역은 자신의 관심과 능력 밖이다. 출생 전과 사망 후는 사실상 인간이 아닌지라 관심 가질 필요조차 없고 그렇게 하는 자만 바보가 된다. (진정한 불신자라면 죽음 이후는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땅이 전부라면 인생의 목표도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효과적으로 잘 살 수 있느냐에 집중된다. 육신적으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풍족하고 감성적 쾌락을 추구하면서 자기 의지대로 행하면 그만이다. 언제 어디서나 문제 되는 것은 “내가” 지금, 좋고, 편하고, 안락하고, 즐겁고, 신나고, 힘들지 않고, 귀찮지 않고, 싫증나지 않고, 멋진 것일 뿐이다.  그 외의 것에 신경 쓰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그래도 그렇지 고등 동물인 인간이 짐승처럼 혹은 조금 나은 정도로 살 수는 없다고 반발해야 아무 의미가 없다. 본능 대신에 도덕을 취한다는 의미 밖에 없다. 설령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도덕적으로 의롭게 살기로 결단하여 행한다 치자. 기실 그 자체도 이 땅에서 자기 나름대로 효율적으로 사는 한 방편으로 택해졌을 뿐이다. 학식, 재력, 권력, 명예 등에 인생의 목표를 두든, 조직폭력배가 되든 각자 자기에게 적합한 인생방식을 선택한 것이지 않는가? 나아가 도덕이 과연 절대적 진리나 가치가 될 수 있는가?  

반면에 하나님이 있다는 체계에서 인생을 사는 것은 어떤 모습인가? 당연히 불신자들의 것과 정반대여야 한다. 우선 이 땅이 절대 전부가 아니다. 인간의 실체도 출생과 사망 사이에 끼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전과 후까지 연결된다. 힌두교식 환생(還生)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기원과 영원한 운명이 오직 완전하신 절대자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이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은 어떻게 이 땅에 내가 존재하게 되었으며 또 죽음으로 과연 끝인지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궁극적 존재에게서 찾았다는 뜻이다. 그분이 창조하였다면 틀림없이 별도 계획이 있으며 당연히 이 땅에서의 삶의 목적과 가치와 의미도 그분의 그 계획안에서만 유효하다는 것이다. 육신적 풍요와 감성적 열락과 의지적 주체를 스스로 이루려는 것은 인생의 목표에서 완전히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최소한 게으르지는 말아야 한다.
  
이 땅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완전히 인간이 주체가 되어 살든지 하나님의 뜻에 따르며 살든지 둘 중 하나다. 그 외는 없다. 다른 말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특정 종교를 택하기 이전에 인간 실존의 가장 근본적 문제를 하나님의 입장에서 확실히 정리해 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적 100%의 확률로 존재하는 절대적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자와 절대자는  0%의 확률로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체계 하에 사는 자의 삶이 절대로 비슷할 수는 없다. 어딘가 비슷하다면 그렇게 살고 있는 인간이 문제다. 비겁하고 치사하게 양 다리를 걸치는 셈이다. 그래봐야 절대자 하나님의 입장에선 제대로 인정해줄 리 만무한데도 말이다.

원죄로 묶여 있던 자연인이 유신론으로의 전환은 반드시 전 인격적인 측면에서의 뒤집음이 요구된다. 인간이 정한 인간을 분류하는 기준에서 나아지는 것은, 아무리 그 변화의 질과 양이 커도, 아무 의미가 없다. 학식, 재력, 권력, 명예, 인격 등을 개선시켰다고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며, 그 반대로 신앙이 그런 것들을 개선시키는데 동원 될 수도 없다. 오직 이전에 스스로 붙들었던 인생의 목표, 가치, 의미가 정반대로 하나님의 것으로 완전히 전도(顚倒)되고 또 실제로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 하나님 보실 때에 진정한 유신론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부재증명(不在證明)이 안 되는 것으로 신앙의 이유나 근거가 될 수 없다. 저처럼 아이를 거꾸로 설득시킬 재간이 없어서 하나님을 믿어 보기로 하거나, 혹시 천국보험 드는 것처럼 믿는 신앙은 여전히 무신론일 뿐이라는 뜻이다. 제 아이의 기도처럼 진정으로 지옥을 걱정하고 천국을 소망해야 진정한 유신론자가 되는 것이다. 기도를 했다는 종교 행위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실재증명(實在證明)이 안 된다는 것도 불신앙의 핑계가 될 수 없다. 이미 그는 무신론을 믿고 실행하고 있는 신앙인이다. 단 한 번도 스스로 진지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고뇌해 본 적 없이 이 땅이 전부인양 믿고 그저 될 대로 되라며 살고 있어도 그렇다. 자신의 온전한 판단으로 무신론을 선택한 신앙은 아니지만 어쨌든 유신론의 반대편에 선 무신론자다. 말하자면 태어나자마자 육신의 부모를 따라 무신론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그 교회는 특이하게 종교행위를 하지 않을 뿐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인간은 반드시 무신론과 유신론 둘 중 하나의 체계에 속한다는 진술은 결코 종교적이지 않고 실존적이다. 바꿔 말해 하나님에 관한 신학적 담론이기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에 관련된다는 뜻이다. 인간이 그분을 믿든 안 믿던 그분은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있다면 그분은 인간의 상태가 어떠하든 절대적으로 자존하시기에 인간의 논의 여부를 초월해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오히려 가장 시급하고 근본적으로 해결할 문제는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분명한 입장이다. 내가 과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지? 나이 들수록 온갖 고뇌가 끊이지 않고 허무해진다면 결국 썩어 없어지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말인가? 그럼 완전히 헛살았던 것은 아닌가? 궁극적 행복과 만족은 정말 없다는 말인가? 그래서 현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체념조로 말하듯이 인간의 선택과 의지와 상관없이 우주에 내팽개쳐진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또 그 상태로 지내다가 죽을 셈인가?  

요컨대 하나님의 존재 여부가 100% 아니면 0% 둘 중 하나인 것만은 누가 뭐래도 진리이므로, 정말 진지하고 심각하게 검토하고 판단해서 어느 쪽이 되었든 확실히 입장을 정리하고 나머지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어정쩡하게 사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면 최소한 이 문제도 확정지으려 하지 않고 사는 것은 너무나 게으른 짓이다. 그리고 진짜 확정짓고 나면 그 이후 인생이 결코 비겁해질 리는 없다. 물론 사이비 무신론자도 문제지만 사이비 신자에게도 해당되는 뜻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10/24/2008

모루두개

2024.02.13 23:03:21
*.230.44.2

유신론적 불가지론이 양다리 걸친 어정쩡한 포지션이라고들 하더라고요, 결국은 게으른 무신론이었네요. 타성(아케디아)이 정말 교묘하고 무서운 죄임을 새삼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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