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근본 문제는 유연성이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利)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라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4:13-17)
일자리가 없어질 미래
며칠 전 한국에서 온 유학생과 그 친척 되시는 교민 한분과 학생의 앞날을 두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친척 어른이 앞으로는 공부를 아주 잘해 최고 하이테크 직업을 갖든지, 아예 그 반대로 인간 손으로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허드레 일을 해야 한다고 권했습니다. 예컨대 치과기공 같은 직업이 전망이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곧 바로 제가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맞지만 예의 치과기공도 이미 기계화가 많이 진척되어 아주 정밀한 작업이 아니고는 사람이 거의 필요 없어졌다고 말입니다. 실제 그 일을 하고 있는 분에게서 직접 들은 바로는 이전에는 상당한 인기직종이었지만 지금은 기존 직원들도 해고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라고 합니다.
학자들의 전문적 미래 전망에 대해 문외한인 일반인도 피부로 분명히 느낄 수 있는 추세가 하나 있습니다. 전통적인 직업의 종류가 현저하게 줄 거라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재래시장이 대형마트로 바뀌어 폐업하는 자영업자들이 속출하고 있지 않습니까? 대형 마트에 새 일자리가 생겼으니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라고 여기는 것은 참으로 순진한 생각입니다.
현재 모든 상품의 포장에 부착된 바코드(Bar Code)를 전자 칩으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스캐너로 상품의 모든 정보를 단번에 인식할 수 있는 바코드만 해도 혁신적인 자동화 기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소비자가 카트에 자기 신용카드를 입력한 후에 상품을 담기만 해도 자동으로 계산이 되어 집으로 청구서가 이메일로 날라 오게 됩니다.
심지어 창고에 화물트럭이 들어가고 나오는 순간에 모든 입출고 관리를 기계가 자동으로 다 해주게 됩니다. 말하자면 얼마 안 가서 대형마트의 수십 개 계산대나 창고 관리 직원들이 전혀 필요 없게 됩니다. 수십 년 전의 사람들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이런 기술혁신은 미처 예측도 못할 정도로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주 가까운 장래에 전통적인 직업의 종류도 급속도로 같이 줄어들 것이라는 뜻입니다.
작금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지구촌이 격심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무제한으로 돈을 찍어내어서라도 경기를 부양시키려 모든 나라가 난리입니다. 불경기를 극복하는 이론, 정보, 체험들이 많고 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에 어느 정도 시일이 경과하면 서서히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심각한 근본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일자리가 현격히 감소하고 있기에 신규노동력을 시장이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는 구조적 결함입니다. 기술 혁신 외의 더 큰 원인도 있습니다. 세계의 굴뚝이라는 중국과 인도에서 만들어내는 상품만으로도 세계 인구가 풍족히 쓰고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현재 미국의 일류대학 인기학과 졸업자들마저 Job을 구하지 못해 이미 사양길로 들어선 치과기공 일에 지원자가 넘칩니다. 경제 위기로 실직한 미국의 고학력자들이 이전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빌딩 수위나 청소부를 하겠다고 나섭니다. 불법체류자들이나 했던 허드레 일들이 영주권자도 아닌 백인 시민으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한국도 벌써부터 유학한 박사가 환경미화원이라도 하겠다고 나서고 있지 않습니까?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현재의 기성세대는 아주 궁핍한 가운데 힘들게 자랐지만 확고한 목표를 갖고 열심히 일하여서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젊은 세대는 아주 풍요한 가운데 전혀 어려움 없이 자랐지만 인생의 구체적 목표마저 세울 수 없는 캄캄한 미래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전처럼 직업의 종류를 고를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 어떤 일이 되었든 할 수 있느냐가 기본 과제가 되었습니다. 물질적으로 역사상 최고의 풍요를 누리며 한창 Well Being을 구가하려는 시기에 오히려 생존 자체를 염려하게 되었지 않습니까?
인생의 실체
그럼 전혀 소망이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무슨 문제든 기도해보라는 피상적인 권면을 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인생에 대한 근본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정확히 말해 인생의 실체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누구나 이미 다 알고는 있지만 항상 망각하고 있는 진실을 다시 회상해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겪어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진실은 바로 인생은 “불확실성의 순간들이 모인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이라도 내일 일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당장 한 시간 뒤도 알 수 없습니다. 내일 일을 알면 미리 대책을 세울 수 있기에 실패할 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도저히 예측도 못할 경우에 가장 좋은 대책이 무엇입니까? 모든 경우를 다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을 쌓는 것입니까? 현재 한국의 젊은이들처럼 취직을 위해 온갖 Spec.을 갖춘다든지,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해 여러 종류의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입니까? 물론 당장에는 좋은 대책이 되겠지만 장래의 불확실성의 범위가 자기가 갖춘 Spec.과 자격증을 훨씬 넘어서면 아무 소용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보다는 사고의 유연성(柔軟性)을 갖추어야 합니다. 어떤 위급한 경우가 생겨도 당황하지 않고 그 상황에 맞추어 적응하는 융통성이 있어야 합니다. 또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모든 인생은 단 한 사람의 예외 없이 예측 밖의 일이 일어나게 마련인지라 고난의 연속이라는 너무나 기초적인 진리를 정말로 견고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인생이 주홍 카펫이 깔린 탄탄대로라고 착각하는 자로선 작은 돌부리만 나타나도 당혹, 실망, 걱정이 앞설 것입니다. 어떤 힘든 일이 생겨도 당연하다고 여겨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힘든 일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고 누구나 겪는 인생의 보편사로 간주해야 합니다. 단지 내가 처해 있는 영역과 상황 안에서 발생했기에 나에게 유별나게 여겨질 뿐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남들이 겪는 고난보다 더 힘든 일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앞으로도 이보다 더한 고난이 계속 생길 것이라는 각오가 서있어야 합니다. 이번 고난만 해결되면 장래는 완전히 보장될 것이라고 믿는 것만큼 인생에서 어리석은 생각은 없습니다. 바꿔 말해 어차피 힘든 인생이라면 또 그것을 스스로 미리부터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다면 문제는 어떻게 대처하느냐 뿐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바로 유연성의 가장 근본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연성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아무 내용 없이 그야말로 완전히 유연한 태도입니다. 버드나무 가지처럼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고, 방랑 김삿갓처럼 정처 없이 떠도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인생의 분명한 목적이 없기에 사실은 단지 자살만 안 했다 뿐이지 포기한 인생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유연성이 무조건 아무렇게도 살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강자의 유연성과 약자의 유연성을 비교해 보십시오. 강자는 어떤 일도 수용, 해석, 처리가 가능하기에 언제 어디서나 온유해질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보리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자의 유연성은 자칫 굴종에 가깝습니다. 도무지 현실적으로 정당한 대책이 없으니 무대책을 대책으로 삼은 것입니다.
다른 말로 유연성에도 아무 원칙이 없으면 진짜로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삶 밖에 되지 않습니다. 부평초처럼 바람 부는 대로 휩쓸려 다닐 뿐입니다. 인생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이라는 고난의 바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결국은 침몰당할 뿐입니다.
반면에 진짜로 실력 있는 자의 유연성이란 현재 상황과 여건을 초월하는 자세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에서 인간이 겪는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식견을 갖추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와 삶과 일생을 단순히 보이고 들리는 물질계 안에 묶어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소유를 목표로 삼아 철학적 수양만 하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사상이 심오하고 철학적으로 깊이 있는 식견을 갖추었어도 여전히 자신의 사고 틀 안에 묶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거나 정반대의 현상이 생기면 유연성이 정작 힘을 발휘하지 못함은 마찬가지입니다.
작금의 세계적 위기는 미국의 월스트리트에서 출발했는데 그야말로 미국의, 아니 전 세계의 최고 수재가 모여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짜내는 곳이지 않습니까? 그들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팔 일을 고안해 냈을 리는 없습니다. 그들조차도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것입니다. 가만히 한 번 따져 보십시오. 지금 같아선 그런 금융전문가의 의견을 믿고 투자하느니 인생은 불확실한 순간의 연속이라는 간단한 진리 하나만이라도 붙들었더라면 훨씬 형편이 더 나아졌을 것 아닙니까?
불확실성의 주인은 누구인가?
한 치 앞의 인생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이 왜 생깁니까? 그 원인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세상에서 인간이 최고로 뛰어난 존재입니다. 그런 인간이 운행해도 불확실성이 생기면 그 답은 두 가지 뿐입니다. 인간 밖에 원인이 있거나, 인간이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뛰어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같은 뜻입니다. 인간이 결코 뛰어난 존재가 아니기에 인간 밖에 불확실성의 원인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결국 모든 인생에 본인이 주인이 아니고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또 세상의 모든 환난을 바로 그 진짜 주인이 일으키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인생을 사는 가장 현명한 지혜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불확실성 나아가 환난의 주인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아니 환난을 일으키는 주역에게 어떻게 인생을 의탁한다는 말인가? 그럼 계속 환난만 당할 것 아닌가?”라는 반발과 의구심이 생길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서 일어나는 환난이 아무 원칙도 없이 정말 럭비공 튀듯이 제멋대로 발생한다면 차라리 인간의 지성에 의지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난들에, 다른 말로 세상의 역사에 어떤 일관된 원칙과 의미가 있다면 사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흔히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고 말합니다. 속담이나 격언으로 이미 굳어졌다는 것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체험하는 진실임을 입증합니다. 세상사가 돌아가는 일관된 원리 중의 하나라는 뜻입니다. 또 칼로 흥하는 것은 단기적으로 봐선 불의가 융성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칼로 망하기에 그 불의로 인해서 장기적으로는 반드시 벌을 받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럼 이렇게 진행되는 과정과 결과가 아주 의로운 것 아닙니까?
인간끼리 다투다 보니까 더 강한 나라가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지 따로 역사를 움직이는 주인이 없다고 여겨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제국이나, 현재의 미국이나 도저히 대적할만한 다른 나라는 없었고 또 없습니다. 내부적인 악이 융성해서 망했거나 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의는 언젠가는 스스로 망하게 됨은 역사의 주인이 이미 만들어 놓은 원리입니다.
만약 인간에게는 환난으로 여겨지는 인생의 불확실성을 궁극적으로 바로 잡아주는 의로운 주인이 없다면 악이 끝까지 흥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악이 궁극적으로 망하고 만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도덕적 타락의 극치를 이룬 로마제국이나, 히틀러의 나치 제국이나, 스탈린의 공산 제국 모두 어떤 선한 열매도 맺지 못하고 그랬습니다. 돈에 눈이 뒤집힌 현재의 미국도 결국 돈으로 망해가고 있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이 세상의 역사책을 전부 갖다 놓고 정밀하게 분석해 보십시오. 죄악이 흥한 곳에 멸망이 따르지 않은 시대, 장소, 인종, 문화가 단 하나라도 있었는지 말입니다. 그것도 인간이 계획했거나 심지어 예측 가능한 쇠퇴가 아니라 전혀 예고되거나 추측하지 못한 채 비참한 결말이 났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어렵게 접근할 필요도 없습니다. 고사성어의 배경이 되는 일화들만 곰곰이 따져 보십시오. 분명 인생에서의 일관되고도 의로운 원리를 쉽사리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이 불확실성의 연속이긴 해도 반드시 인생과 역사를 의롭게 이끄는 인간 외의 제 삼의 힘이 있다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가능성은 어디에 숨어 있는가?
다시 말하지만 현재의 젊은 세대를 바라보면 참으로 암담하기 짝이 없습니다. 인류 유사 이래로 모든 세대가 불확실하며 환난이 겹치기 마련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는 전혀 없는데도 되려고 안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지금의 바로 앞 세대까지는 힘들기는 해도 미래에 대한 희망은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고 또 최소한 생존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반면에 지금 세대는 갈수록 일자리가 줄어서 오직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을 벌어야 합니다. 보편적으로 앞이 깜깜합니다. 자기하고 싶은 일은 전혀 해보지도 못하고 조건 불문하고 세계 어디라도 일단 일자리가 있으면 가야 합니다. 이제는 인생의 불확실성에다 불가능성마저 덧붙여진 셈입니다.
현재의 경기침체가 극복되면 직장이 많이 생기겠지 막연히 기대하는 것은 완전히 헛물만 켜는 짓입니다. 물론 일시적으로는 나아질 수 있겠지만 혁신적인 사회 경제 체계로 바뀌지 않는 한 일자리 부족 현상은 앞으로 더 심화되었으면 되었지 개선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일자리를 창출하려면 별로 필요도 없는 신제품을 자꾸 만들어내어 소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지금껏 추구해온 대로 물질 만능주의를 세계적으로 더 확장 실현해야 합니다. 그럼 필연적으로 자원이 고갈되어서 지구는 완전히 황폐화되며 온난화에 따른 재앙만 재촉할 것입니다. 비관적으로 보는 학자들은 현재 추세대로만 가도 양극 지방의 얼음이 수년 내에 다 없어진다고 예측하지 않습니까?
이래저래 인간들은 불확실성과 불가능성만 스스로 더 쌓아갈 뿐입니다. 인류에게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것은 경기 부양이 아니라 새로운 사고방식으로의 전환과 혁신적인 사회체계를 모색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잘 먹고 잘 사는 일로선 불확실성과 불가능성을 절대 줄여 나갈 수 없다는 진실만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러겠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풍요한 물질이 주는 안락에 완전히 중독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섣불리 혼자만 그 쾌락을 포기하는 바보짓을 하지 않으려 듭니다. 입술로는 서로 사랑하자고 외쳐대지만 자기 나라, 민족, 사회, 가족이 먼저 손해를 감수하겠다고 나설 리도 없습니다. 아무도 전체적이고도 먼 미래를 내다보는 큰 그림을 그리려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마저 경기회복만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니 큰일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6:7)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 같아도 실제로 그 인생을 주관하는 이는 하나님입니다.
그럼 이제 지금 같은 불확실성의 세태를 이길 수 있는 삶을 사는 최선의 방도가 명확해졌습니다. 불확실성의 주인에게 자신의 불확실성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만이 그 불확실성을 분명코 의로운 방향으로 이끄는 유일한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길이 싫다면 가뜩이나 불확실한 인생을 오로지 그 불확실성 하나에다 걸고 사는 방도뿐입니다. 아무리 고상한 사상을 지녔고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어도 끝까지 불확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자기는 역사와 세상을 좌지우지할 만한 슈퍼파워와 지성을 갖추었다는 과대망상증에 걸려 있다는 뜻입니다. 아니면 그야말로 부평초 같이 살다가 죽겠다는 뜻 즉, 마지못해 살고 있을 뿐 인생을 미리부터 포기하고 있다는 뜻일 뿐입니다.
불확실성의 주인인 하나님께 인생을 맡긴다고 해서 자기 계획마저 세우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 계획대로 스스로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 너무나 큰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실제로 지난 체험을 통해 계획한 대로 잘 안 되는 일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도 남습니다. 만약 계획대로 되었다면 모두가 재벌이 안 되었을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끝까지 제 혼자 다 할 수 있다고 우기니 이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대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지도 못하는 정도의 불가능성은 사실 별게 아닙니다. 인간이 소유한 진짜 최고로 큰 불가능성은 따로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죽음 앞에 한 명의 예외 없이 아예 무력하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아무도 스스로 계획한 일이 아닙니다. 일정과 방식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진짜로 언제 어떻게 닥칠지 예상도 못합니다.
나아가 죽음 뿐 아니라 세상에 출생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세대에, 어떤 나라에, 어떤 지역에, 어떤 환경에, 어떤 가정에,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존재해야 할지를 정하고 출생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생의 시작과 마침마저 완전 타자에 의해서, 부모도 아무 영향을 줄 수 없기는 마찬가지임, 주도됩니다.
인간 스스로 인생의 한계를 넘어설 수는 절대 없습니다. 그 한계 넘어 있는 차원을 주관하는 이에게 겸비하게 무릎 꿇지 않고는 말입니다. 또 그러기 위해선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에 무덤까지 동반할 불확실성과 불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음과 또 그것들을 의롭게 바로 잡아 줄 수 있는 분도 계심을 가장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깃털 같이 가벼운 존재
본문은 너희 중에 말하는 어떤 것을 두고 잘못이라고 지적합니다. 말이란 사상을 나타내는 도구이므로 그 배후에 있는 생각이 틀렸다는 뜻입니다. 어떤 생각입니까? 아무 도시에 가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는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장소와 기간을 한정했고 또 계획대로 장사하면 당연히 이(利)가 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당장 하루 앞도 모르면서 일 년 후의, 그것도 낯선 도시에서의 새로운 일의 결과가 좋으리라 장담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리고 인생은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이기에 스스로 계획을 세워 이룰 수 있다는 자랑은 허탄한 자랑이라고 합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미리 알아맞힐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대신에 인간을 살리고 죽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기에 그분이 하라고 하는 일만 순종하고 그 결과는 그분께 맡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안개 같은 인생의 앞날을 예측하는 것은 분명 허탄한 것이긴 하지만, 구태여 악한 자랑이라고 정죄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또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라는 결론부분도 전체 문맥의 뜻과는 언뜻 잘 연결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밀란 쿤데라가 지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다섯 명의 주인공이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우발적 간통이 연속되는 내용입니다. 그 사건들의 배경을 이루는 사상의 핵심은 한 마디로 모든 것이 그저 흘러지나가서 소멸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소멸되기에 인간의 존재를 비롯한 삶의 모든 것들이 아주 가벼운 느낌을 준다는 것입니다. (*)
인생이란 실체가 정말로 부평초처럼 그저 흘러가는 것이라면, 혹은 인생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단지 한 인간이 그런 인식의 바탕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둘 중 어느 경우가 되어도 인간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습니다. 도덕적 의무도 구태여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인생의 목표나 가치를 논하는 것 자체부터 무의미합니다. 태어난 것조차 헛되고 헛된 것으로 한탄하고 치워야 합니다. 한 마디로 이 우주는 물질로만 이뤄졌기에 인간에게 의미 있는, 아니면 의미를 부여할 만한 한 것은 단 하나도 없이 텅 비워져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우주에 진정한 중심이 있다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인생에게 생명을 주고 앗는 주인이 따로 있다면 인간의 사고, 말, 행동이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그 온전한 중심에 자신의 전부를 걸어야 합니다. 또 그러면 우주 전부를 주관 운행하시는 영원한 분과 자신이 연결되었기에 깃털 같이 가벼운 찰나적 존재에서 곧 바로 너무나 무겁고도 소중한 존재로 바뀝니다.
당연히 인생에 온전한 의미가 생깁니다. 인간에게 책임과 도덕적 의무도 따라 옵니다. 각자의 고유한 인생에 목표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불확실성과 불가능성의 미래도 그분의 뜻 안에서는, 인간이 미리 알 수는 없어도 이미 그분과는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되었기에, 온전한 확실성과 가능성으로 바뀝니다. 잠간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 같은 인생일지라도 정말로 기쁨과 감사함으로 열심히 살아야 할 보람이 날마다 충만해집니다.
그 반대로 우주의 중심이자 인생의 불확실성과 불가능성의 주인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면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당연히 허탄한 자랑이 됩니다. 나아가 하등의 책임, 의무, 의미, 보람, 가치, 목표도 없이 사는 것인지라 당연히 한 번뿐인 인생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그 인생을 허락하신 분에게 아주 악한 짓입니다. 자살을 하거나 허랑방탕하게 사는 자식이 부모에게 가장 큰 죄인 되듯이 말입니다.
나아가 인생이 얼마나 안개 같은지 알면서도 자신의 출생과 죽음을 관장하면서 인류 역사를 의롭게 이끌어 가시는 분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면 죄입니다. 스스로 깃털 같이 가볍다고 여겨지는 자기 존재를 태산의 바위 같이 무겁게 바꿔 주시겠다는 제의를 완강하게 고의로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때문에 내가 살고 죽으며 또 그분의 인도로 이 것 저 것을 하고 있다는 온전한 고백과 실천이 바로 선입니다. 그 반대는 당연히 악이요 죄입니다.
세 종류의 인간들
지금은 누구에게나 참으로 어려운 시기입니다. 앞으로는 더욱 더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당면한 문제들을 상품도 아니고 돈을 무한정 찍어 낸다고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환난은 인류 역사 이래 항상 있어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환난에 대해 대응하는 태도일 뿐인데, 그 반응에 따라 크게 세 종류의 인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환난을 오직 돈으로만 해결하려는 자입니다. 인생은 이 땅에서 먹고 사는 것에 풍요하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환난은 하나 해결해도 또 다른 것이 계속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미래는 전혀 예측도 통제도 불가능한데도 자기 힘으로 둘 다 가능하다고 끝까지 착각하고 삽니다. 연속적으로 문제만 해결하다가 평생을 보냅니다. 제대로 돈을 벌지도 못하면서 환난에만 묶인 인생입니다.
둘째는 인생에 환난은 계속 있기 마련이며 인간의 예측과 통제를 벗어난다는 진리까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생은 그저 흘러가고 마는 것으로 우주는 주인이 없는 텅 빈 것으로 봅니다. 부평초같이 살되 기껏해야 자기 사고의 틀 안에서만 자유와 고상함을 누려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 존재를 초월할 수는 없기에 정신적 사치이자 허사로 끝납니다. 심지어 허사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마저 알면서도, 최소한 짐작은 하면서, 끝까지 우주의 실제 주인 앞에 무릎 꿇지 않고 고집을 부리다 인생을 마쳐버립니다.
마지막으로 본문대로 “주의 뜻이라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 것 저 것을 하리라”는 태도로 사는 자입니다. 우주와 자신의 영원한 주인이 따로 있기에 그분에게 모든 확실성과 가능성의 문호를 활짝 열어 놓는 자입니다. 찰나의 무료함을 참지 못한 가벼운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자신에게 전가되어졌기에 영원을 소망하는 반석 같은 인생입니다.
그분의 뜻과 계획 가운데서 거룩한 존재로 변하여 세상에 아름다운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인생의 일차적 목표입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가 형성되었기에 모든 주위 사람과도 온전한 사랑과 참 섬김으로 이어집니다. 인생으로서의 진정한 의미와 목표와 가치를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서 추구합니다.
한 마디로 절대적 진리이신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며 동행하기에 더 이상 눈앞의 여건과 환난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미래의 불확실성과 불가능성도 결코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인생의 한계를 초월하여 진정한 자유와 온전한 풍요를 그분 안에서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XXX 님의 12주기 추모 예배로 모였습니다. 추모 예배는 고인을 기념하고 회상하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오히려 살아 있는 자가 죽음이라는 넘을 수 없는 장벽 앞에 엄숙하게 서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므로 겸손해지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부평초 같은 인생이라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한 번뿐인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다시 한 번 점검해 보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죽음이 있기에 오히려 인생은 반드시 소중하고 고귀해져야 합니다. 따라서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종류의 인생 중에 자기는 어디에 해당하는지 진지하게 검토해봐야 합니다. 또 잘못되었다고 인식된다면 당장에 바꿔야 합니다. 당장 내일 일을 알 수 없기에 더 지체할 수는 없습니다.
간혹 신자임에도 은연중에 첫째나 둘째 사고를 여전히 갖고 있는 자도 있습니다. 첫째는 인생에 전혀 유연성이 없습니다. 오직 돈에 묶여서 그 노예로 사는 것입니다. 둘째는 비교적 유연성을 가지려 해보지만 사실은 자신에게만 유연해진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인생은 그렇고 그렇다는 체념에 유연해진 것뿐입니다.
세 번째는 인생의 모든 유연성을 오직 하나님에게만 열어 놓는 자입니다. 무엇이든 하나님께 기도하며 묻기에 자신이 정말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할 수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인생의 불확실성과 불가능성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입니다. 우주의 주인을 바로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주일날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다 신자가 아닙니다. 정말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으로 이미 영원한 존재로 바뀌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절대적 진리이신 그분을 머리로만 붙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 실현하고 있어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사랑이 증거 되어져야 합니다. 당연히 현실적 환난에 대해서도 온전한 믿음으로 반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날마다 죽음 앞에 정말로 겸손해져서 하나님에게 모든 가능성을 열어야 합니다.
물론 위에 든 세 가지 인생에 대한 선택과 실천은 순전히 개인의 자유에 속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르는 피치 못할 최종 결과 또한 자신의 책임임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본문 성경 말씀을 통해 단연코 말씀드릴 수 있는 한 가지 진리는 있습니다. 그 선택과 결과는 헛되어 보이는 인생이기에 그저 헛되게 살고 마느냐, 아무리 겉으로는 헛되 보여도 내면으로는 결코 그럴 리 없으니 우주의 주인을 찾고 의지해서 정말 참되게 살아 보느냐를 구별 짓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3/8/2009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소설 내용과 그 의미를 분석한 근본 개념은 "용기 있는 기독교"(데이비드 웰스 저작, 부흥과 개혁사 번역출간)의 174/5 페이지에서 일부 발췌 인용하여서 제 의견을 보충했습니다.
본 사이트의 주제에 맞아 함께 나누려고 올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