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선택받을 대상이 아니다.

조회 수 2101 추천 수 206 2008.12.04 19:03:07
하나님은 선택받을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과 하느님
  

흔히들 하나님은 한 분이고 모든 종교가 그 한분 하나님을 똑같이 믿는데 믿는 방식만 다르니까 자신에게 알맞은 종교를 선택하면 된다고 말한다. 언뜻 아주 논리타당하고 합리적인 사고인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따져 보면 이 만큼 모순된 말도 사실은 없다. 구체적으로 따져 볼 내용이 여럿인데 맨 먼저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부분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절대자가 한 분이라는 것에 반론을 제기할 자는 거의 없다. 문제는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여부이지 만약 존재한다면 당연히 한 분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여럿이라면 반드시 맡은 역할이 달라지고 그 능력에서조차 우열(愚劣)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결국 궁극적으로 절대적 능력을 가진 완전한 한 존재만이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가 서로 다른 절대자 셋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속성과 능력과 사역 등 모든 면에서 상호 한 치의 상이점이 없이 동일하다. 숫자적으로 삼위로 표현했다고 해서 다신론의 의미는 전혀 없다.]  

물질계에 묶여 있는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신령하고 초자연적 능력을 지닌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의 숫자마저 하나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이 있고 그 아래 선한 천사들이 있다. 또 악한 영의 수괴인 사단이 있으며 그 아래 온갖 귀신들이 있다. 그렇지만 물질계와 영계 그 모두를 통치하는 절대적 하나님은 여전히 오직 한 분뿐이다.  

절대자가 한 분이라는 점을 다 같이 인정한다는, 아니 당연히 사실이며 진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동양사상이 주장하는 (음양) 이원론은 틀렸다. 절대자가 하나라는 진리가 이미 용납되고 있다면 세상을 다스리는 두 신 내지 능력이 있다는 주장은 단순히 숫자만 따져도 비진리가 된다. 비록 세상이 움직여나가는 현상이 표면적으로 그렇게 보인다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그 결과를 설명한 것일 뿐 우주만물이 운행하는 원리가 될 수는 결코 없다.  

이원론은 간단히 말해 세상 역사는 선한 신(혹은 세력)과 악한 신의 싸움의 결과라는 것이다. 선한 신이 이기면 태평성대가 되고 악한 신이 이기면 재앙이 따른다. 그럼 각각의 신이 승리하여 다스리는 어떤 특정 시기가 따로 있다는 뜻이다. 또 인간은 어쨌든 승리하는 쪽의 신에 붙기만 하면 그 당대로선 세상에서 형통하고 또 사후에도 구원이 보장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요컨대 악한 신을 믿어도 구원 받는 경우가 있는 셈이다. 나아가 구원도 인간이 순전히 요행으로만 두 신 중의 하나를 고르는 복걸 복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지 않다. 세상에는 분명히 성령과 악령이 있다. 그러나 악령은 궁극적으로 성령에 패배하게 마련이다. 하나님이 일시적으로 지역과 세대, 또 사건과 사람에 따라 사단에게 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은 그분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식의 하나일 뿐이다. 하나님의 권능이 사단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있고 또 한 분이라면 그분은 당연히 절대적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있을 확률은 100% 아니면 0% 둘 중 하나다. 그러나 귀신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성령이 있고 하나님 존재 확률도 100%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100%라는 존재 확률이 맞는다면 이미 그 자체로 그 하나님은 당연히 완전한 절대자다.

만약 영적 세계에서 절대적인 통치자 한 분이 없이 여럿이서 서로 힘을 다투어 이기고지는 것이 실상이라면 그런 영적 차원은 솔직히 무시해도 된다. 말하자면 그리스 신화처럼 각종 신들이 서로 영역 다툼을 하면서 인간보다 더 사악한 짓들을 예사로 저지른다면 초자연적 존재일망정 절대자가 될 수는 없다. 실제로 수많은 귀신들이 때로는 이상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목격해도 아무도 그 귀신을 절대자 하나님으로 숭배하지 않듯이 말이다.

단순히 영적 존재의 숫자는 아주 많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삼아서 믿고 따르며 감사와 경배와 찬양을 돌릴 수 있는 대상은 당연히 한 분 절대자다. 어느 모로 따져도 이미 보편적으로 합의한 그대로 하나님은 분명 한 분임에 틀림없다.

기독교에선 그 절대자의 이름을  유별나게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따지고 보면 한국기독교 만의 아주 특유한 이름이다. 영어로는 The Lord, The God 인데 정관사를 붙여서 그 주님 혹은 유일한 신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일반적인 주인, 상관, 신들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어감을 지니며 정관사가 없고 대문자로 표기하지 않으면 절대자라는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다.  

기독교가 서양에서 전래되면서 최초로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에서 사용한 호칭은 하느님이었다. 이 번역에 참여한 선교사 존 로스는 선교보고서에서 “‘하늘(heaven)’과 ‘님(prince)’의 합성어인 ‘하느님’이 가장 적합한 번역어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다 개역성서를 펴내는 과정에서 아래아(·)가 홀소리 ‘ㅏ’로 일괄적으로 변경되면서 하나님이란 호칭을 쓰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개신교만 독특하게 사용하는 이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영어로 치면 신(神) 즉, 단순히 영적 존재라는 뜻보다는 유일한 절대자(The Only Being)라는 의미가 강조된다.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더 성경적인 의미가 되었다. 카토릭이 사용하는 ‘하느님’이 친숙하면서도 하늘에 있는 신이라는 뜻은 분명하지만 자칫 단순한 영적 존재일 뿐이라는 뉘앙스를 지닐 수 있다.  

알지 못하는 신도 믿는 인간  

각 종교 간에 명칭이 어떠하든 불신자들도 흔히 말하듯이 절대자가 한 분뿐임은 확실하다.  그러면 동양적 이원론뿐만 아니라 유일신론을 제외한 신에 관한 다른 여러 이론도 자동으로 배제 되어야 한다. 가장 먼저 그리스 신화처럼 다신론(多神論)을 주장하는 종교는 틀린 것이다. 설령 다신론을 옳다고 믿어도 그 중에 최고실력자 신은,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처럼, 있게 마련이고 또 있어야 한다. 결국 궁극적 숭배의 대상은 여전히 하나다.

그래도 바다나 산의 신처럼 지역적 혹은 기능적으로 각기 다른 하부 신들에게 경배할 수 있지 않느냐는 주장은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 예컨대 비가 오면 커피나 우산장수에게는 좋을지 몰라도 선글라스 장수나 골프장은 공치는 날이 된다. 각기 구름의 신과 태양의 신에게 경배 드리면 인간이 신들끼리의 영역 다툼을 부추기는 셈이다.

또 장소와 사건과 사람에 따라 도대체 어떤 신에게 경배 드려야 할지 분간할 수조차 없다. 혹시라도 잊어버리고 경배 못 드리는 신들이 있을까 염려된다. 실제로 초대 교회 당시에 그리스 사람들이 그런 잘못을 방지하기 위해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비석을 만신전(萬神殿)에 세워두고 함께 경배 드렸다고 놀랍게도 성경이(행17:23)기록하고 있다. 특정 종교를 갖지 않은 일반인도 때로는 자신과 가족의 안위와 형통을 나름대로 절대자에게 빌면서 실제로 각종 종교의 신들 이름을 아는 대로 거명한 후에 마지막에는 천지신명 모두에게 즉, 이름 모르는 모든 신들에게 빈다고 대놓고 말하지 않는가?

불신자들도 인간사가 뜻대로 되지 않는데다 도무지 원인조차 알 수 없는 엉뚱한 환난들이 생기니까 신들끼리 영역 다툼이 일어났거나 괜히 신경질을 부린 것이라고 이해한다. 따라서 모든 천지신명에 대고 빈다고 하는 말은 각 지역과 시대마다 신이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각 종교마다 서로 다른 신을 섬긴다고 말해야만 모순이 없고 정당한 태도다.

그러나 아무 이유 없이 신들이 신경질을 내거나 자기들끼리 싸운 부작용을 인간에게 부담지우는 신들이라면 사실상 경배드릴, 그것도 잔뜩 갖다 바치면서까지 빌 이유는 도무지 없지 않는가? 다시 말하지만 설령 신들이 많다고 해도 결국은 그 모두를 통괄 조절하는 절대자가 필수적이다. 순수한 의미의 다신론은 성립되지 않거나, 설령 옳다고 해도 별로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과 우주를 동일시하여 만물 가운데 잇는 모든 것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범신론(汎神論, Pantheism)도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현대 사회가 큰 고목이나 기암괴석을 신으로 모시는 일은 벌써 미신으로 간주해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 모든 것이 신이며 특별히 인간 자신이 신이라는 뉴에이지 사상은 극성을 떨고 있다.

이는 비인격적이고도 불완전한 것 모두를 신으로 삼는다는 오류는 제쳐두고 절대자 하나님은 한분이라고 보편적으로 합의한 사실마저 부인하는 꼴이다. 결국 영적 존재는 많지만 정말로 인간이 경배 드리고 그 인도대로 따라야 할 대상은 한 분뿐이라는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절대자에게 경배를 드리고 인도 받기는 싫다는 즉,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는 욕심과 교만에서 나온 사상일 뿐이다.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궁극적 절대자가 있다면 한 분이다. 만약 둘 이상이 되면 기독교의 삼위일체 같이 모든 면에서 같지 않는 한에는 반드시 우열이 있기 마련이고 또 그 중 가장 우월한 하나만 절대자가 된다. 그럼 그 최고 강자는 마땅히 완전하고도 영원하며 유일한 절대자다. 그러나 실상은 종교들이 하나님이 한 분으로 똑 같다고 하면서 여러 신을, 심지어 인간을, 섬기는 종교가 많고 또 한 신을 섬기더라도 영원하고도 궁극적인 절대자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택할만한 종교는 셋뿐이다.

절대자가 한 분뿐이라면 그분은 인간에게 선택 받을 대상이 절대 아니다. 오직 인간이 경배와 찬양을 바쳐야만 할 대상이다. 다른 말로 설령 인간이 종교를 선택할 수 있다 쳐도 가장 먼저 그 종교가 정말로 궁극적인 절대자 한 분만을 섬기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따지면 선택할 수 있는 종교의 숫자는 금방 극소수로 좁혀진다. 현재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종교 중에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신구교 합쳐)만이 절대적인 유일신을 믿는 종교다. 또 한 분뿐인 절대자를 경배하려면 무엇보다 그분이 정말로 어떤 분인지 탐구해야만 한다. 역으로 말해 어떤 분인지 탐구한 결과는 반드시 분명하게 옳은 한 분만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절대적 유일신을 가르치는 상기 세 종교의 하나님도 따지고 보면 서로 다른 특성을 갖고 있다. 구원의 방법도 아주 다르다. 한 분이 여러 종류의 다른 특성을 가질 수는 있지만 한 종류에서 서로 상충하는 다른 특성을 나타낼 수는 없다. 또 전혀 다른 구원의 길을 계시할 리도 만무하다. 신이 다중인격자이거나 여러 신이 아닌 다음에는 말이다. 누차 말했지만 다중인격자 같은 신이라면 경배할 가치와 의미가 없고, 올바르지만 신이 여럿이라면 결국에는 궁극적 절대자 한 분이 남는다. 바꿔 말해 종교를 택하기 전에 반드시 어느 신이 온전한 절대자인지 연구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절대자의 숫자 하나만 가지고 간단히 따져 보아도, 하나님은 한 분이고 모든 종교가 그 한분 하나님을 똑같이 믿는데 믿는 방식만 다르니까 자신에게 알맞은 종교를 선택하면 된다는 말이 얼마나 모순인지 금방 판명 난다.

그런데도 이런 설명을 듣고도 모든 종교는 다 옳다고 끝까지 우기는 자가 의외로 많다. 그만큼 모든 인간이 영적인 문제에서만은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를 만큼 너무 무지하다는 뜻이다. 거기다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거룩한 절대자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 자리에 인간이 들어서서 제 멋대로 인생을 살며 세상을 다스리려는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이 너무 강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죽었다 살아온 자가 천국의 구원과 지옥의 심판을 증거 해주어도 믿지 못한다고, 사실은 않는 것이지만, 말씀하셨다.(눅16:19-31) 모든 세대의 인간들의 영적 실태를 예리하게 지적한 진리다.

인간 스스로 자랑하는 이성적 논리를 조금만 동원해도 신에 대한 주장들 대부분에서 모순과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아예 그러지 않으려 한다. 영적으로 무지한 정도를 넘어서 영적으로 시체라는 뜻이다. 또 조금 따져 본 자도 끝까지 그 오류를 눈치 채지 못하거나 어렴풋이 알게 된 것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을 쏟지 않는다. 말하자면 끝까지 자기 고집대로만, 그 고집이 완전히 틀렸거나 틀릴 가능성이 다분해도. 살겠다는 심보다. 바로 그것이 인간이 유일하신 궁극적 절대자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 하에 있다는, 증거다.

인간이 영적으로 무지할수록 영적 차원을 깨닫게 해주는 절대자를 오히려 겸비하게 찾아야 하지 않는가? 인간이 원죄 아래 있다는 의미가 포악한 죄를 지을 습성을 타고났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문제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자력으로 구원을 취득하겠다고 노력하는 종교인들 가운데 수십 년을 면벽 수도해도 정말로 완전한 절대적 진리에 이른 자는 아무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른 말로 영적으로 완전 장님이자 시체인 인간에게는 당신의 실체와 뜻을 당신께서 명백하게 계시해 줄 수 있는 그런 절대자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만약에 우주만물을 질서 있게 운행하고 인간만사를 공정하게 통치하는 절대적으로 선한 궁극적 존재가 없다면, 나아가 있어도 그런 사실을 모든 인간이 전혀 모른다면 세상은 아무런 살 가치가 없어진다. 오직 힘 센 자가 약한 자를 착취하는 것이 이 땅에서의 지고의 선이자 인간 구원의 절대적 방도가 된다. 폭력과 무력에 의지하는 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활용적인 지식, 독점적인 정보, 의로운 사상, 공평한 사회적 제도, 심지어 종교적 선행으로도 얼마든지 가장 힘센 기득권층이 될 수 있다.

결국 인간만이 활개 치는 세상에선 인간 중에 최고 권력자는 나오게 마련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모든 인간이 눈에 불을 켜고 노력, 수고, 분쟁할 수밖에 없다. 바꿔 말해 이 땅에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남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이 인생 최고의 목표다. 잘 먹고 잘 산다는 의미 또한 꼭 화려하고 풍요롭게 사는 것이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Well Being처럼 남에게 구애 받지 않고 자기 원하는 대로 삶의 질을 높이며 사는 것이다. 이랬든 저랬든 스스로 오직 자기 기분과 성질대로 사는 것만이 절대적 가치가 된다.  

물론 그렇게 산다고 해서 자기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없는 한 제 삼자가 구태여 문제 삼을 것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절대자가 있다면 그래서 최후의 영원한 심판이 있다면 그런 삶으로 구원 받을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마저 아예 무시하겠다면 이 땅에서 자기 기분과 능력대로 사는 삶이 과연 진정한 행복과 만족과 안락을 지속적으로 줄 수 있는지 심각하게 따져 봐야 한다. 다른 사람 앞에서 행복한 척 보여주는 가식적 삶 말고 자기 내면의 진짜 실체를 있는 그대로 남에게 전혀 영향 받지 않고 스스로 정확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모든 인간은 하나 같이 자의적 선택에 전혀 의거하지 않고 이 땅에 그저 출생하게 되었다. 그럼 그 이후는 자신의 전부를 걸고서 살아야할 자신만의 당위성은 자의로 선택 결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최소한 궁극적 절대자에 대한 자신의 입장만은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자신의 뿌리를 찾는 길이자 실제로 이 땅의 삶을 어떻게 행복하게 살 것인지에 가장 우선적으로 또 가장 많이 영향을 미치는 길이기 때문이다.  

12/3/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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