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 가면 서울은 가지 못한다.
사공이 많다고 배가 산으로 갈 수는 없다 .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말한다. 배는 반드시 바다 위에서 항해해야 함에도 산에 간다는 것은 원래 목적지와는 다르게 간 것이다. 이를 두고 여럿이 힘을 합하면 배가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산마저 정복할 수 있다는 의미로는 볼 수 없다. 배에 노를 젓는 사공은 반드시 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에 대체할 사공이 있을 수는 있어도 막상 노를 잡은 자는 절대 여럿이어선 안 된다. 사공이 여럿이 되면 각기 가고자 하는 방향이 서로 달라 전혀 엉뚱한, 아니 정반대의 장소에 도착하게 된다는 의미다.
다원주의 종교관의 구원론은 한 마디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이다”는 말로 대변될 수 있다. 각 종교마다 제시하는 구원이 그 방식만 다르지 지향하는 목표가 같기에 자신에게 알맞은 종교를 골라 믿으면 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 수 있겠는가? 아니 그래도 되는가?
사공이 여럿인 경우도 처음에는 손님과 사공 모두가 바다를 향해 항해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공이 여럿인 바람에 도착한 지점은 목적지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한 마디로 목적지가 똑 같다고 도착지까지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뜻이다.
도착지가 전부 동일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우선 출발지가 같아야 한다. 또 사공이 하나가 되어서 같은 방향으로 가야만 한다. 물론 사공이 여럿이라도 가고자 하는 방향과 수단이 동일하면 도착지와 목적지는 같아진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것은 교통수단이나 여정이 달라도 출발지와 가는 방향과 목적지가 같기에 도착지도 당연히 같아진다는 뜻이다. 예컨대 부산서 여러 사람이 각기 도보, 고속버스, 기차, 비행기로 서울을 향해 출발하는 경우다. 심지어 도보로 남해와 서해의 해안도로를 따라 가든, 태백산맥을 종주한 후에 또 서쪽으로 방향을 틀든, 심지어 지그재그로 중요 도시를 다 돌되 마지막에는 인천이나 수원을 거쳐 서울로 가든 관계없다. 정말 교통수단과 경유하는 도시들과 걸리는 시간만 다를 뿐이다.
그러나 두 기차가 대전에서 똑 같이 서울을 향해 출발은 했는데 하나는 방향을 착오하여 남쪽으로, 다른 하나는 바른 방향인 북쪽으로 향했다면 도착지는 부산과 서울의 정반대인 두 곳이 된다. 현재 모든 종교에 구원의 길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로 가도 서울로 가는 것이 아니다. 예의 두 기차처럼 배에 사공이 여럿인 경우다.
종교마다 지향하는 목적지가 동일하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땅에선 마음의 평강과 현실의 행복을, 죽은 후에는 절대자로부터 죄에서 구원 받아 천국에 갈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심지어 사탄을 믿는 종교마저 현실의 평강과 사후의 영원한 보증을 약속한다.
그러나 각 종교의 출발지는 사정이 다르다. 이 땅에선 마음이 불안하고 현실이 행복하지 못하며 죄를 많이 지었기에 죽은 후에 천국 갈 자신이 없다는 것, 즉 목적지의 정반대가 출발지가 되어야 함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는 좀더 엄밀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모든 종교의 출발지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전에서 출발하는 두 기차의 비유로 돌아 가보자. 둘 다 서울로 갈 것이라고 예정했지만 하나는 북쪽으로, 다른 한 쪽은 남쪽을 향해 간다면 출발하는 역은 분명 대전이지만 하나는 상행(上行) 선로에서, 다른 하나는 하행(下行) 선로에서 출발하는 셈이다. 인간이 불안하고 불행을 겪으며 죄책감이 들어서 종교에 귀의하는 것은 대전역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종교를 가질 필요성이나 이유는 분명히 같다. 그러나 두 기차가 북행과 남행 선로에서 기관차도 정반대의 위치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종교의 정확한 출발지는 사실상 서로 다르다.
출발지가 다르다면?
인간이 종교를 가짐으로써 얻고자 하는 유익은 수도 없이 많지만 궁극적으로 따지면 사후의 구원이다.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천국과 지옥으로 영원한 운명이 갈리는 지점이 바로 모든 종교의 최후의 목적지다. 어떻게 따져도 그 목적지는 분명 하나로 동일하다.
.
반면에 출발지는 상기 기차 비유에서처럼 둘로 나뉜다. 인간이 자력(自力)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합격점에 들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과 결코 그럴 수 없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은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응당 인간은 충분히 선하고 또 얼마든지 더 선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후자는 그와 반대로 인간은 절대 선하지 않으며 아무리 해도 선해질 수 없다는 것이 전제다.
그럼에도 이 둘이 출발하는 역은 동일하다. 말하자면 모든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은 동일해서 죄에서 구원 받아야 한다는 필요성은 누구나 느낀다는 뜻이다. 그러나 완전히 서로 등을 진채로 하나는 북으로, 다른 하나는 남을 향해 출발하는 경우가 생긴다. 나아가 하나는 자기가 직접 기차를 몰고 가며, 다른 하나는 단지 승객이 되어서 기관사가 대신 몰아주는 기차를 타고 가는 것이다. 똑 같이 서울을 향해 출발한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 도착한 후에 보면 하나는 서울이고 다른 하나는 부산으로 나뉜다.
기독교(*)만, 엄밀히 말해 개신교만, 세상의 모든 종교와 다르다. 출발지와 방향과 교통수단이 각기 다 다르다. 모든 인간은 원죄 하에 영적으로 시체로 태어난다고 선언한다. 모두가 강도 살인을 예사로 저지를 만한 포악한 본성을 태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나면서부터 하나님을 알지도 찾지도 않으며 자랄수록 세상 쾌락을 찾아가기 바빠서 평생을 하나님과 원수로 지내고 만다는 뜻이다.
물론 절대자에 대한 감각 내지 인식마저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께 지음을 입은 피조물로서 신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나, 그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갖게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고 자기 인생을 걸면서까지 그분의 거룩한 뜻대로 살려는 의식은 아무도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출발지는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선 누구나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지점이다.
따라서 구원을 얻는 방향도 필연적으로 달라진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러 내러오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지도 아니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향해 올라갈 수 있겠는가? 오직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구원을 베풀 수밖에 없다.
다른 말로 구원을 얻게 되는 능력도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한 죄인에게 성령이 간섭하여 온전한 믿음을 갖게 만들어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게 해준다. 또 구원을 주신 후에도 당신께서 그 일생을 책임지고 이끌어 주신다. 생전에 이 땅에서 마음의 평강과 현실의 행복도 당신의 거룩한 뜻과 계획대로 베풀어 주신다. 신자는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기에 그분과의 직접적인 대면과 교통과 동행이 이뤄진다.
반면에 다른 모든 종교는 이와 정반대다.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을 쟁취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선하고 또 스스로의 능력으로 그 합격점에 들 수 있기에 하나님과의 직접적 대면 교통 동행이 아예 필요 없다. 아니 그럴 수 있다고 꿈도 꾸지 못한다. 출발지, 방향, 수단 모두 다 기독교와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반대다. 당연히 그 도착지도 기독교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네 스스로 알아서 해라.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은, 목적지만 동일하면 도착지도 당연히 같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한 데서 나온 것이다. 옛날 서울로 과거보러 올라가는 선비들이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일정과 경로를 통해 도보, 말, 가마, 배 등 여러 수단을 타고 갈 때나 해당되는 말이다. 전적으로 선비 혼자 스스로 판단 결정해서 가는 길이다. 반드시 그 길로만 와야 과거를 볼 수 있다고 임금이 정해주는 길이 아니다.
반면에 구원은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합격점에 들 수 있다고 자신해도 최종적으로 판단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문제는 만약 인간 스스로 구원을 쟁취하는 것이 옳고 가능하다면 하나님이 구원에서 실질적으로 행하는 역할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모범 답안에 비추어 점수만 채점한 기계나 다름 없다.
이처럼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이라는 것은 순전히 인간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입장으로 그 말을 바꾸면 어떻게 되겠는가? 수도 없이 많은 구원의 길이 있는데 네가 알아서 열심히 선행, 고행, 봉사, 희생, 계명 및 제사 준수, 등등을 하라는 것이다. “네가 제대로 했는지는 죽고 난 후에 내가 판단해 줄께. 그 중에 틀린 길이 있든 말든, 또 점수가 모자라 구원을 얻든 못 얻든 내가 상관할 바가 전혀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셈이다.
그런 하나님은 세상만사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인간이 어떤 비참한 처지에 있든 상관 않고 방치한 분이다. 죽은 후에 단순히 채점만 하여 구원과 심판으로 나누겠다면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분과의 관계는 단 하나도 형성되지 않는다. 정말로 인간을 사랑하고 그 사정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라면 당신께서 구원의 길을 정하지 않을 리가 없다. 모로 가도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인간들 스스로 혹시 이렇게 저렇게 하면 구원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고안해 놓은 여러 방안에 불과하다.
정작 이해가 안 되는 문제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자신하는 자들이 막상 죽음 앞에 다다르면 그 자신감이 완전히 상실 된다는 것이다. 지난 인생이 헛되고 헛되다는 고백과 함께 과연 자신이 하나님께 용납될지 여부에 대해 어떤 확신도 없다. 아니 그런 관념조차 전혀 없는 자도 많다. 절대자 하나님과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아무 관계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진리를 추구하며 스스로 구원을 얻고자 노력하는 자도 꽤 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죽음이라는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장벽에 부딪혔을 때에는 완전하고도 절대적 구원을 얻었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더 이상 구원을 추구할 여력과 시간이 없어 구도의 길을 완전히 마감해야만 하는 그 시점에, 그들이 그나마 확실하게 내세울 수 있는 진리라고는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니더라.”는 실토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지난 생애 동안 자기 노력과 수고로 자신을 온전히 선하고 의롭게 가꾸었기에 절대자의 구원에 이미 들어섰다고 자신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럼 그 동안에 과연 무엇을 위해 인생을 살았다는 뜻인가? 아니 과연 스스로 선해질 수 있다고 정말 확신하며 살았겠는가? 아니면 그런 자신감도 없으면서 겉으로만 인간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기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헛고집만 내세웠는가?
양심과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이가 들면서 한 결 같이 고백하는 말이 하나 있다. “모두가 내 탓이야. 내가 죄인이지.” 물론 인생을 많이 살았을수록 틀림없이 죄는 더 많이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교육과 훈련과 수양과 회개와 선행과 구제도 더 많이 할 수 있었던 것도 분명 사실일 것이다. 그럼에도 왜 모두 그런 고백을 하는가? 한 마디로 자기 죄를 자기가 무슨 수를 써도 씻을 수 없고 오히려 죄만 더 짓게 되더라는 솔직한 자백이다.
물론 이전에는 잘못이나 실패를 모두 남 탓으로 돌렸지만 지금은 자기부터 잘못한 것을 깨닫게 되는 즉, 도덕적으로 진보한 면은 분명 있다. 그러나 이전에는 죄로 안 보이던 것이 갈수록 더 죄로 인식되더라는 측면히 훨씬 강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전에는 순진하고 몰라서 죄를 짓거나 짓고 난 후에도 솔직하게 인정하고 회개도 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죄 짓는 방식이 치사하고 음흉해지며 또 그것을 감추는 방식도 교묘해지더라는 것을 본인 스스로 알아챘다는 뜻이다.
요컨대 대부분의 인간이 죽기 직전에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고 또 아무리 스스로 노력했어도 그 죄를 씻을 길이 없었다는 점만은 인정한다. 그런데도 너무나 신기하게 막상 그런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그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면에서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너무나 무지하고 무능력한 상태라는, 다른 말로 인간 스스로는 죄를 씻을 길이 없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해야 한다는 기독교 구원의 출발 선언이 성립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
예수를 믿는 것이 모로 가도 서울 갈 수 있는 수많은 종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믿는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자기 죄를 스스로 어쩔 수가 없다는 영적으로 최고로 낮아지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내려 오셔서 자신의 모든 죄를 감당하고 대신 죽으심으로써 자신을 깨끗케 씻어주신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출발지가 모든 종교와 전혀 다르다. 또 방향이 다르고 목적지로 가는 수단도 다르다. 결국 기독교가 도착하는 곳에는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는 전혀 와 있지 않다. 오직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선언하는 까닭이다.
기독교의 이 선언이 종교 간의 우열을 비교하여 일등을 매기자는 의미는 전혀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긍휼을 얻으러 나아가는 방향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비 기독교인들은 이런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고 또 들어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기독교의 출발지는 한 마디로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용서를 겸비하게 받아들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배에 사공이 많다고 항해를 올바르게 잘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산으로만 갈 뿐이다. 아무리 같은 방향으로 가는 기차가 많다고 해도 출발지와 방향이 다르면 종착역은 달라진다. 기차는 출발할 때에 이미 도착지가 정해져 있다. 도착지를 바꾸려면 선로를 바꾸어 출발지를 바로 택하는 방법뿐이다. 기독교냐 다른 종교냐의 차이 이전에 내가 정말로 하나님 앞에 죄인인가 아니면 나는 스스로 거룩해질 자신이 있느냐의 선택에 따라 구원의 출발지는 전혀 달라진다는 것이다.
세상에 종교가 아무리 많고 그 가르침이 심오해 보이고 그 예배와 사역이 거룩해 보여도 반드시 출발지부터 따져야 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줄 수 있다. 모든 종교적 사안은 항상 그분의 입장에서 심사숙고해야 한다. 인간의 영적 상태를 정확히 꿰뚫으며 인간만사를 주관하시는 유일한 절대자 하나님이라면 과연 인간들 앞에 구원의 길을 어떻게 열어 놓았겠는지 정말 진지하게 따져 봐야 한다.
다른 말로 그분이 인간을 이 땅에 방치해 두시는 분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인생의 갈등과 허무함에 대해 온전한 관심을 갖고 실제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분인지 판단해야 한다. 그분과 자신 간의 최초의 관계설정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 최초 관계는 그분 앞에 겸비하게 항복하는 것과 그러지 않는 것 오직 둘 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출발지가 둘이며 방향도 둘인데 어떻게 모로 가도 서울로 갈 수 있겠는가? 둘 중 하나는 맞고 다른 하나는 틀릴 수밖에 없지 않는가?
2/17/2009
(*) 본문에선 개신교, 그 중에서도 복음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기독교를 말합니다.
이단들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니 이브에게 "네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라고 미혹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꼬드긴다는 것이죠.
출발이 내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며 오로지 당신의 구원의 은혜로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나의 노력과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진리와 이단의 구분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방교회의 그 처참한 우리도 하나님이 되자라는 그들의 찬송가가 나오게 되는 것이고 불교도 열반이 스스로의 수행과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사탄은 다른 길을 제시한 것이었고 그 길이 아주 많아진 것이죠
하지만 그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진리인데 현대의 개신교나 천주교에서 다른 길들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음에 가슴 아플 뿐입니다
뉴에이지로 들어오는 것들, 예전에 사탄이 미혹했던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도 길은 많아......
어차피 서울만 가면 되는거잖아? 라고 미혹합니다
그래서 그 수 많은 길들을 모두 인정하고 우리 서울에서 만나자고 하는게 에큐메니컬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성경에는 못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찍어서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대전에서 출발했는데 남쪽으로 가는 그 기차는 결국 불구덩이에 던져질 운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