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와 불신자가 확실하게 다른 점

조회 수 427 추천 수 29 2010.02.21 21:5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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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와 불신자가 확실하게 다른 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시간과 공간의 역할

창조 전에는 시간은 아직 작동되지 않았지만 텅 빈 공간은 있었다. 그 공간 안에 하나님이 피조물을 채워 넣은 것이 창조다. 말하자면 공간이란 어떤 물질이나 존재가 자리를 점유하여 위치하고 있는 영역이 된다. 가로, 세로, 높이 셋으로 측정할 수 있는 수리적(數理的) 차원이다. 공간은 인간이 그 길이, 높이, 넓이, 부피, 무게 등을 실측하여 그 실체를 가름할 수 있다.

공간 안에 물질만 있고 시간이 없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수백만 년이 지나도 그저 그냥 물질일 뿐이다. 아니 사실은 시간 자체가 없으니 그런 기간이 흐른 것이 아니다. 단지 시간의 역할을 추론하기 위해 가정해 본 것이다. 따라서 시간의 주된 역할은 물질을 변화시키거나 존재로 하여금 활동하게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공간을 점유하는 어떤 것이라도 시간에 따라 성장, 발전, 쇠퇴, 소멸한다는 뜻이다.  

그럼 장구한 세월 동안에 진화가 일어났다는 뜻인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바위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바위일 뿐이다. 바위를 구성하는 물질에 변화는 일어나지만 스스로 활동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화를 제대로 분석하려면 물질만으로 구성되어 활동하지 못하는 ‘물체’와 스스로 활동하는 ‘존재’를 구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 중에 “Diamond is forever."라는 영화가 있었다. 아무리 다이아몬드가 변함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언젠가는 산화과정을 거쳐서 썩게 마련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물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부패뿐이다. 썩지 않으려면 생명이 활발하게 움직여야만 한다. 생명이 없는 물질은 썩을 수밖에 없다. 생명이 내재된 물체가 바로 존재다.  

그런데도 진화가 뜻하는 바는 태초 전부터 선재(先在)한 물질의 상태에서 생명이 나타나는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럼 가만두면 썩을 수밖에 없는 물질이 스스로 산화작용의 부식을 막으면서 어떤 존재(생명이 있는)를 합성 내지 창출했다는 의미가 된다.

바위, 흙, 물, 공기를 보라. 수백만 년이 흐르면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할까? 스스로 썩는 것을 방지하는 것도 아예 불가능하지 않은가? 정말 물질이 스스로 썩는 것을 방지할 수만 있어도, 다른 말로 지구상에 산소가 완전히 사라진다면 진화는 그나마 일말의 타당성을 가질 것이다. 문제는 산소가 없으면 어떤 생명체도 생존조차 못하는데 어떻게 생명체가 태동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 시간의 더 구체적인 역할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인가? 물질의 변화보다는 생명체로 활동하게끔 하는 것이다. 시간은 생명체가 출생, 성장, 성숙, 쇠퇴, 죽음과 연관해서만 온전한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다. 예컨대 봄, 여름, 가을, 겨울 같은 계절의 변화는 농작물과 가축과 그것들을 돌보는 농부의 활동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반면에 바위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햇빛이 비취나 캄캄한 밤이 되나 아무 변함없이 그냥 바위일 뿐이지 않는가?
        
외부로부터 물질에 생명이 투입되지 않고는 스스로 활동이 가능한 생명체로는 절대 바뀌지 못한다. 생명체에게만 시간이 시간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기에 생명이란 그래서 공간만 차지하고 있던 물체에 시간을 덧입힌 셈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시간과 더불어서 생명체의 활동도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예컨대 태양과 달의 운행이 없이는 지구 안에 아무리 물과 공기가 풍부해도 생명이 활동은커녕 발생조차 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그럼 태양과 달도 지구상의 생명체를 위해 만들어졌기에 절대 인간의 경배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신4:19)  

선재한 물질이 장구한 세월을 거쳐서 생명을 잉태하여 진화했다는 주장은 물질이 시간도 만들어냈다는 것과 같은 뜻이 된다. 비유컨대 바위가 물과 공기와 땅의 아미노산을 흡수하여 스스로 활동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태양과 달을 만들어서 움직이게 하고 있다는 주장인 셈이다.

그렇다면 진화론자들은 태양과 달보다는 오히려 바위를 경배해야 할 판이다. 거대한 자연물 안에 신이 있다는 정령주의나, 신의 흔적이 새겨졌다는 자연숭배는 오히려 신의 존재라도 인정하는 순진한 면이라도 있다. 그러나 진화론은 신을 부인하려고 출발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물질로 신을 삼았다. 하나님의 존재를 아예 부인했을 뿐 아니라 그분의 피조물을 그분보다 높여버렸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이 얼마나 완악한 죄이겠는가?

시간이 진화를 가능케 하는 수단이 아니다. 순전히 이론적으로 말하면 스스로 시간을 만들어낼 수단이 있는 존재라야 그나마 진화도 가능해진다. 물질과 시간은 영원토록 서로 별개의 영역에서 따로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물질과 시간을 연결시키기 위해선 생명으로 그 둘을 엮어 주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분은 창조주 하나님뿐이다. 그분에 의해 물질에 생명이 주입되는 순간 비로소 물체가 존재 즉, 한 생명체로서의 의미와 가치가 생기게 된다.

말하자면 생명이 태동된 그 자체로 모든 생명체는 자기에게 부여된 시간을 열심히 살아가야할 근거와 능력이 부여된 것이다.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말이다. 모든 생명체가 가장 존귀하게 여겨야할 첫째 가치가 바로 생명 그 자체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겸허히 인정하고 경배하며 자기에게 부여된 시간(여기서는 생명과 동의어가 됨)을 정말로 귀하게 가꾸어야만 한다. 실제로 동식물은 그런 이치에 너무나 충실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마련해준 영역과 그분의 섭리 안에서 생존하고 번식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인간이 되어서 그분을 부인하면 아무리 생명이 있어도 호흡한다는 사실 외에는 동물은커녕 그저 바위와 같을 뿐이다.  

공간은 시간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서두에 말했듯이 공간이란 물체가 위치를 점유하거나, 존재가 활동하고 있는 영역이기에 눈에 보이는 곳이다.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해 감지, 인식, 분별, 판단할 수 있다. 반면에 시간은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물체나 존재 밖에 있으면서 단 한 순간도 중지하거나 지체하지 않고 찾아왔다 물러가버린다.

모든 인간은 눈에 보이는 공간과 보이지 않는 시간의 두 차원 안에서 살게 마련이다. 어느 누구도 이 둘을 벗어날 수는 결코 없다. 그리고 공간 안에 눈에 보이는 것들은 단순 인식의 범주에 속한다. 공간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전부 동일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시간은 단순 인식만으론 부족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선 예상, 기대, 추측 밖에 못한다. 그러나 인간이 품고 있던 그런 것들과 상충되게 사태가 진행되어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저 우연히 일어난 일로 치부하든지 그 배후에 주관하는 자가 따로 있다고 믿든지 둘 중 하나의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시간을 대하는 이런 인간의 태도는 아주 심각한 주제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무엇인가? 출생과 죽음이라는 두 정지된 순간을 이어주는 기간이다. 바로 자기 일생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기 일생을 그저 운(fortune)으로 치부하여 어영부영 살아가는 자와 어떤 절대자가 주관한다는 믿음(faith)으로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자 둘로만 나뉜다는 것이다.

인간은 절대로 시간을 주관할 수 없다. 자신에게 시간의 시작인 출생과 그 끝인 죽음을 아무도 주관할 수 없기에 애초부터 시간은 인간의 통제 밖에 있다. 따라서 자기 일생을 그저 운으로 치부하는 자는 시간을 통제 못한다는 측면에서만은 인생을 제대로 인식한 셈이다.

그러나 그들의 결정적 하자는 따로 있다. 시간은 스스로 통제 못하니 공간만이라도 주관하겠다고 자기 인생의 목표를 정해버린 것이다. 공간 안에 눈에 보이는 것들로 채우되 이왕이면 더 화려하고 풍요롭게 채우겠다는 뜻이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들의 형통과 안일만이 자기 인생의 유일한 관심사가 된다.

바꿔 말해 공간을 아름답게 채우면 시간도 아름다워지리라 믿는 태도다. 이는 너무나 큰 착각이자 스스로 자기 모순을 범하는 짓이다. 이미 미래는 너무나 불확실해서 자신의 통제 밖이라는 전제하에 인생을 살아가기로 해놓고선 또 다시 기를 쓰고 미래를 조금이라도 덜 불확실하게 만들어보겠다고 나선 꼴이지 않는가?

말하자면 그들에게도 믿음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공간 안에 채운 것들로 자기 미래는 아름답고도 안전하게 보장된다고 믿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며 물질이 자기 인생을 살찌우게 해준다는 유물사관의 믿음이다. 멀리서 아련히(?) 도움을 주는 태양과 달보다도 오히려 지금 당장 내 눈 앞에서 나에게 필요한 물질로 신을 삼은 것이다. 예수님이 이런 믿음을 비유로 통렬하게 지적한 적이 있다.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6-21)

이 비유에서 예수님이 부자가 가진 믿음을 서술하는 방식에 아주 두드러진 특징이 하나 있다. 무엇이겠는가? 모든 문장의 주어가 “내”라는 일인칭이다. 부자는 우선 내가 열심히 일해 많이 벌겠다고 한다. 또 내 곡간을 크게 지어서 즉, 자기가 속한 공간 안에다 물질을 최대한 풍요롭게 채우겠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 “여러 해 쓸 물건”으로 인해서 자기 영혼마저 평안히 쉬고 즐거워하겠다고 말한다. 부자가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라고 했으니 스스로 의도적으로 굳힌 믿음이라는 뜻이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안전과 행복을 물질이 보장해주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공간이 풍요로워지면 시간도 자연히 그렇게 되리라 믿은 것이다.

바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이 물질에서 우연히 창조되었다고 믿는 불신자들의 믿음이다. 자기들이 믿는 것이라곤 오직 눈에 확실히 보이는 물질 뿐이니 당연히 그 물질에 매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물질은 절대 미래를 보장하지 못한다. 이미 말한 대로 공간에서 시간을 제외하면 남는 것은 물질 뿐이며 역으로 물질에 시간이 부여되면 썩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물질로 시간을 지배하려 생각하니 너무나 어리석지 않는가?

한마디로 불신자는 필수불가결적으로 연계된 몇 가지 잘못을 범하고 있다. 우선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미래이긴 해도 물질이 풍부해지면 아름다운 미래가 보장될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인간도 통제 못하는 영역을 아무 지정의가 없는 물질더러, 물질은 오직 인간의 조종대로만 효용가치가 있는데도, 통제하게끔 완전히 내어 맡긴 것이다. 물질이 신이 될 수밖에 없고 반면에 인간은 물질보다 더 낮추어 버렸다. 물질의 노예가 되려고 자청한 것이다.  

결국 평생을 통해 오직 물질을 모으는 일에만 투자한다. 모든 시간을 동원해서 공간을 풍요롭게 꾸미려고만 한다. 결국 공간을 위해 시간을 허비한 셈이다. 일생의 기간 동안에 자기보다 물질을 더 높이 받드는 일만 하다 만다. 인간을 물질에서 우연히 진화된 존재로 보는 사고에선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물질이 이 땅에 우연히 인간이 되었다가, 여전히 자신의 어머니이자 선조가 되시는 물질을 효성스럽게 받들며 살다 죽는 것이다.  

시간이 공간을 변화시켜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이와 반대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무엇보다 공간 뿐 아니라 시간도 함께 만드신 분을 온전히 믿어야 한다. 시간은 반드시 하나님만이 시작케 해서 그분만이 마치게 할 수 있다. 역사를 주관하는 존재는 결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시간에 매여 출생, 성장, 쇠퇴, 사망만 할 뿐이다. 시간의 주관자만이 역사를 움직일 수 있는데 그분은 오로지 한 분 하나님이다. 문자적 의미 그대로 그분의 이야기(His-story)가 역사다.

간혹 인간이 스스로 시간을 주도한다고 혹은 할 수 있다고 믿는데 이는 너무나 큰 착각이자 교만이다. 단적으로 한 개인에게 시간은 출생과 동시에 시작해서 죽음으로 그 역할을 마치는데 과연 어느 누가 그 둘을 스스로 주관할 수 있겠는가? 시작과 끝도 조절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시간을 주도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전3:1,2,8,9) 성경은 범사를 진행 열매 맺게 하는 즉, 시간을 주관하시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고 인간 스스로 시간을 통제하려는 것은 노고만 더하며 아무 이익도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역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원리는 인류 공동체뿐만 아니라 각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의 모든 시간을, 또 그 안에 발생한 범사를 그분만이 주관하신다. 한 인간의 일생도 단순히 자신이 스스로 채워 넣은 이야기(Autobiography)가 아니라 그분의 이야기로만 가득 채워져야 한다. 그래야만 정말로 참 인간답게 살았다는 증거다.  

예컨대 아기가 첫돌을 맞았다는 근본 의미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피조물, 특별히 인간이란 생명체가 활동할 수 있도록 예비해놓은 시간적 차원을 한 번씩 겪어 보았다는 뜻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시간 패턴에 따라 자신의 신체 리듬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앞으로 몇 년을 더 살게 될지 몰라도 그 육체는 저절로 계절에 적응할 것이다. 신체에 저장된 시계를 하나님의 시계와 정확하게 조절하여 맞춘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품 안에서 첫 한 주기를 그분의 호흡과 맞춰본 셈이다.

범사에 기한이 있다고 한 전도서 기자는 시간을 주관하려는 인간의 노고가 헛된 까닭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3:11)

먼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범사에 기한이 있다고 해서 인간더러 일부러 인내케 하여 고생시키려는 뜻이 아니다. 죄에 찌든 불완전한 인간이 맺는 열매는 여전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완전하신 그분께서 때를 주관하여 인간에게 가장 유익하게 해주시려는 의도다. 불신자처럼 단지 미래를 통제, 예측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일생을 그저 운으로 여겨선 그 인생은 불완전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종잡을 수 없는 헛됨으로 그칠 뿐이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다는 말도 그분의 인간을 향한 사랑의 깊이, 높이, 넓이, 부피, 무게를 도무지 인간이 추측도 못한다는 뜻이다. 범사에 당신만의 때에 당신만의 놀라운 은총과 권능으로 채우시는 것이 그분이 시간을 주관한다는 의미다. 공간만 대상으로 자기 인생 전부를 실측할 수 있다고 믿는 불신자와는 달리 신자는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 가운데 자기 일생 즉, 시간 전부가 붙잡혀 있다는 것을 믿는 자다.    

결국 솔로몬의 탄식대로 어떤 인간도 자기 힘으로 물질을 쌓아서 미래를 아름답게 만들려 해선 헛되고 헛된 수고일 뿐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되지도 않는다. 예수님도 그럴수록 좀과 동록과 도적들에게만 좋게 해줄 뿐이므로 썩지 않는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권했지 않는가?

아무리 능력이 출중한 인간이라도 범사의 때를 자기 힘으로 통제할 수 없으므로 영원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만이 시간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이 된다. 물론 하나님의 때를 인간이 예측할 수 없기에 하나님 품 안에서 그분 뜻대로 사는 것이야말로 바로 영원을 사모하며 영생을 얻는 것이라는 뜻이다. 자기 인생의 시간을 자신의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시간으로 바꿔서 채워 넣을 때에 바로 온전한 인생을 살 수 있는 법이다.  

따라서 인간으로선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14절)이 시간을 아름답게 가꾸는 가장 지혜로운 일이 된다. “사는 동안”이란 바로 인간이 누리고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의 전부이지 않는가? 또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해야만 한다.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인간이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기”(14절) 때문이다.  

한마디로 신자는 불신자와는 반대되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불신자는 바로 눈앞의 공간을 아름답게 채우면 미래의 시간도 그렇게 변하리라 믿는 자다. 공간으로 시간을 다스리려 한다. 공간을 다스리려면 그 안에 물질로 채우는 수밖에 없다.

신자는 그 반대로 미래의 시간을 아름답게 채우면 현재의 공간도 그렇게 변한다는 것을 믿는 자다. 역으로 현재의 공간을 아름답게 채우려면 반드시 미래의 시간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 시간으로 공간을 다스리는 자다. 시간 안에 채워 넣을 수 있는 대상은 결코 물질이 아니다. 바로 기뻐하며 선을, 그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공간에는 물질로만, 시간에는 일로만 채워 넣을 수 있다는 설명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아직 확정되지 않았고 예측도 불가능한 미래의 시간을 아름답게 바꾸려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1-3)

공간을 점유하는 눈에 보이는 물질들이 시간으로 제한되는 인생을 절대 아름답게 꾸미지 못한다는 뜻이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그럴 수 있다. 신자는 지금 바로 눈앞에 실상과 증거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어도 믿음으로 그분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해야만 자기 시간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다.  

요컨대 신자의 선행은 단순히 윤리적인 덕을 실천하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도덕적 선은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실천해야 한다. 신자는 창조주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을 만드신 뜻을 정확히 분별하여 그대로 실현해야만 한다. 예수님의 부자 비유에서 결론내린(눅12:21) 그대로다. 오늘 밤에도 우리 영혼을 도로 찾을 수 있는 하나님만 온전히 믿기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않는 것”이다. 대신에 자기에게 허용된 시간 차원 안에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 즉, 하늘의 보물로서 이 땅에 채우는 것이다.

2/8/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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