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리듬의 휴일과 참 안식의 주일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2:2,3)
정미한 성경 기록
하나님은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심으로써 창조 사역을 마쳤다. 다섯째 날까지 천체들과 지구의 자연환경과 동식물을 모두 만들었다. 인간 창조를 위한 예비과정이었다. 여섯째 날에 당신의 형상을 닮게 인간을 만드신 후에 심히 좋게 여기셨다. 천하 만물이 당신의 계획대로 완벽하게 창조되었고 무엇보다 당신을 대신하여 이 땅을 다스릴 인간을 만드심으로써 아주 흡족해 하셨다.
그리고 일곱째 날이 이르매 안식을 취하셨다. 그러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완전히 휴식한 것은 아니다. 창조 사역을 마친 후에 이제는 그 피조물을 통치 운행하는 사역은 아무런 쉼 없이 이어가셨다. 그러나 따로 이 날을 안식일로 정한 것에는 참으로 많은 의미가 있다.
일 년 365일은 30일 단위의 12달로 이뤄진다. 이런 달력을 만든 것은 해와 달의 자전과 공전 주기를 계절과 기후의 변화에 맞추어 관찰한 결과다. 창조과학회 같은 보수진영은 문자 그대로 24시간씩 6일 만에 창조를 마쳤고 제 7일을 안식일로 정했다고 주장한다. 능치 못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인지라 그런 단 시간에도 얼마든지 만물을 만들 수 있고 또 오류가 전혀 없는 성경 기록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진화론자들은 수십억 년의 장구한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순전히 시간적으로 따져 창조가 얼마나 걸렸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인간을 만드신 분이 그 생체주기(Biorhythm)를 일주일 단위로 정하셨다는 것이다. 인간은 6일간 일하고 7일 째 하루는 쉬어야 올바른 정신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열흘, 보름, 한 달씩 일한 후에 하루 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모두 만성스트레스, 직업병, 직장안전사고, 만성허약체질, 정신병 등에 걸릴 것이다. 반대로 이삼일만 일하고 하루 쉰다면 전부 베짱이 같은 게으른 자, 아예 놀고먹으려는 자, 일을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는 만년 열등생들로 변할 것이다.
비유컨대 자동차는 이전에는 3천마일, 최근에는 성능이 좋아져서 5천마일마다 엔진오일을 갈아주게끔 되어 있다. 자동차를 설계 제작할 때에 엔진과 오일의 상관관계를 정확히 알아서 정한 주기다. 만약 어기면 엔진에 무리가 생겨 빨리 마모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설계제작하신 분이 7일째 하루는 쉬어야만 제대로 활동할 수 있다고 정한 것이다.
성경의 창세기를 과학적 데이터와는 동떨어진 신학적 저술이라고만 간주해선 안 된다. 모든 것이 사실이며 그 안에 과학과 전혀 상충되지 않는 실제적 진리가 숨겨져 있다. 아니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이미 창조된 사물을 사후에 관찰하여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법칙을 찾아내는 작업이지 않는가?
바꿔 말해 과학 자체를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다. 신앙은 과학과 모순 상충 되지 않으며 과학을 다 포괄하면서도 초월할 뿐이다. 자동차를 만든 인간이 자동차보다 지능이 모자랄 리는 없다. 동일한 지혜로 비행기, 우주선도 만들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계시해 놓은 책이며 그분 최초의 위대한 과업인 창조를 그 첫 장에 기록하고 있다. 성경도 과학을 초월하긴 해도 모순, 상충되지 않으며 오히려 과학보다 더 정확한 기록일 뿐이다. 하나님께는 오직 진리만 있고 거짓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맞은 첫날은 휴일
흥미롭게도 하나님은 6일간 먼저 일을 하신 후에 마지막 7일 째에 휴식하셨다. 물론 창조라는 사역만 마친 것뿐이지만 어쨌든 쉬셨다. 그러나 첫째 인간 아담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 땅에서 맞은 첫날이 바로 안식일이었다. 창조된 날은 얼떨결에 하루를 보내었다고 가정하면 그 바로 다음날 하루를 충분히 휴식한 후에 6일간 노동을 한 것이다.
이처럼 세상만사를 하나님이 직접 주관, 통치, 운행하신다. 인간은 그분의 일에 동역자, 청지기로 참여만 할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 당시에 계획한 뜻은 인간으로 안식의 즐거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 땅에서 정말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노동은 그런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죄로 타락하여 인간은 피조세계와 함께 그분의 벌을 받았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고 인간은 얼굴에 땀을 흘려야만 식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노동이 안락과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단지 생존을 위한 목적으로 전락되었다. 차츰 일과 일의 결과로 얻게 되는 소유가 인생의 목적으로 변했다. 모든 사람들의 삶의 목적이 물질 소유로 바뀌니까 서로 많이 차지하려다 죄를 더 많이 짓고 그 결과 인간 세상에 환난과 곤고가 끊이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이 원래 인간에게 소망하고 계획하신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되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29:11) 그러나 하나님의 타락 이후의 인간을 향한 뜻도 징계를 하긴 해도 여전히 창조 당시처럼 평안을 주는 것이었다.
아담이 맞은 첫날이 안식일이었듯이 오늘날 신자도 주일이 일주일의 첫날이라는 개념이 있어야 한다. 지난주의 일을 반성만 하는 마지막 날이 아니다. 새로 시작할 일주일을 차분히 계획하여 기도하며 새 믿음 안에서 새 소망을 키우는 날이 되어야 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2-14)
바울 사도는 이전에 행한 지난 일은 다 잊는다고 한다. 오직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걸어가는데 궁극적으로 천국에서 누릴 영광이요, 현실적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소명을 실천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부르셨기에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면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주일이 첫날인 것은 바울의 고백 같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좇아가는 일을 새로 시작하는 일주일을 위해 준비하라는 뜻이다.
신자가 주일에 지난 잘못을 회개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푯대를 향해 제대로 걸어가는지 방향을 잡는 것이다. 따라서 회개도 단순히 도덕적 잘못을 반성하는 수준이어선 안 된다. 정말 자신이 하나님이 부르신 코스대로 올바르게 가고 있는지 견주어보고 잘못 간다면 수정하는 회개여야 한다.
무엇보다 새 일주일을 큰 기대와 설렘을 갖고 맞아야 한다. 주일을 첫날로 삼은 이유는 하나님이 지난 주간보다 더 큰 사랑과 권능으로 신자를 인도하시겠다는 뜻이다. 반드시 새로운 일과 새로운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 새 주간은 지난 주간과 전혀 달라질 것이다. 신자도 지난주보다 새롭고도 더 큰 소망, 기대, 각오, 헌신, 순종으로 새 일주일을 맞아야 한다. 아담이 세상에서 처음 맞은 날이 안식일이었는데 그에게 펼쳐진 첫 일주일에 하나님의 축복이 날마다 얼마나 신기하며 풍성했겠는가? 그처럼 신자에게도 새 한 주간의 너무나도 오묘하고 위대한 그분의 은혜의 막이 열리는 바로 전 날이 주일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오늘날의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킨다. 구약성경만 믿기 때문에 일주일의 마지막 날에 안식하는 것이다. 제 7 안식교도 마찬가지다. 그들 또한 구약성경을 더 강조하며 율법적 문자적으로 지키려 하니까 그 순서만 따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입장에서 따지면 문자적으로도 일주일의 첫날이 안식일에 해당됨을 알지 못한 것이다.
복 받은 주일
하나님이 안식일을 제정하신 진짜 중요한 뜻은 따로 있다. 이미 살펴본 일주일의 첫날에 대한 영적 의미는 어쨌든 그 순서에 기인된 것이었다. 그런 순서와 상관없이 안식일 자체의 순수한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날이다. 그럼 주일을 성실히 지키고 또 교회에 가서 기도 열심히 하면 복을 받는다는 뜻인가? 기독교 신앙에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본문이 뜻하는 바와는 거리가 멀다. 신자 즉, 당시로선 아담에게 복을 준 것이 아니다. 일곱째 날 자체에 복을 주었고 또 그 내용도 그 날을 거룩하게 한 것뿐이다. 과연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창조하면서 복을 준 대상이 셋 있었다. 그 대상들과 복을 받은 내용들에 어떤 공통점 내지 상이점이 있는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동물들이었다. “하나님이 그들(짐승, 새, 물고기 등)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1:22) 생육, 반성, 충만해지는 복을 받았다. 그러나 스스로 생존 번식만 하면 되지 구태여 따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동물로선 생존하고 번식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자 복이었다.
둘째는 “하나님이 그들(사람, 남자와 여자)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8절) 생육, 번성, 충만해지는 것 외에 동물이 받지 못하는 복을 받았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을 정복하고 생물을 다스리는 청지기가 되는 복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가장 먼저 모든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 인간과 동식물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인간이 실행할 최초이자 최고의 덕목이요 임무다. 당연히 인간끼리 뿐만 아니라 자연을 사랑해야 한다. 순전히 인간의 현실적 풍요와 안락을 위해서, 그것도 자기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만, 지구를 정복해선 안 된다. 과거 제국주의의 식민지 수탈, 최근의 자원 확보 경쟁, 무차별적 개발, 환경오염 등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우리 스스로 왜곡 파괴시킨 것이다. 필연적 결과로 지구온난화에 따른 재앙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 그 피해의 정도가 급격히 심화될 것이다.
동물과 인간은 움직이는 생물이기에 당연히 번성해지는 복을 받았다. 인간은 또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고유의 소명을 받았다. 그런데 복 받은 세 번째 대상인 일곱째 날은 무생물이다. 일주일의 일곱째 날로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니까 따로 번성할 일이 없다. 그럼에도 곰곰이 따져보면 앞의 두 복과 연관되는 점은 분명히 있다.
우선 전혀 활동하지 못하는 대상에 하나님이 복을 따로 주실 이유는 없다. 무생물은 생물이 번성할 수 있게 하는 여건과 수단일 따름으로 이미 다 주어진 상태다. 하나님으로선 이 땅에서 활동하면서 당신의 창조목적을 수행하고 있는 대상에 한해 복을 주실 필요가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안식일도 흘러가는 시간으로 움직이는 생물과 같다. 해, 달, 지구의 움직임에 의해서 생긴 것이 시간이다. 천체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럴 리는 없지만,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시간은 실제로 단 일초도 쉬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가? 또 인간은 그 움직이는 시간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며 희로애락을 맛보고 생로병사를 겪지 않는가?
말하자면 시간도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하려고 활동하고 있는 셈이다. 아니 한 번의 쉼도 없이 흘러가므로 그분의 일을 가장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세상은 위대한 창조의 시작이 있었기에 마지막 날의 엄위한 심판도 있을 것이다. 시간 안에서 그분의 거룩한 역사는 당신의 백성을 통해서 이뤄지고 있다.
움직이는 생물과 인간과 함께 흘러가는 시간에 복을 주신 뜻은, 한마디로 인간은 열심히 일하는 것 자체가 복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대로 그분의 일을 시간 허비하지 않고 하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그렇게 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창조에 부여한 세 가지 복 중에 일부 내지 전부를 놓치게 된다. 동물과 시간은 정해진 법칙에서 어긋나는 법이 절대 없으니까 그분의 복을 잃을 염려도 아예 없다. 반면에 인간만 자유의지를 갖고 있기에 인간 자신의 복을 찾아 누리지 못할 뿐 아니라 동물과 안식일에 허락하신 복까지 손상 파괴할 수 있는 것이다.
거룩한 주일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다고 한다. 이제 이날이 받은 직접적인 복인 ‘거룩’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자. 주일에는 죄를 짓지 말고 세속적인 활동마저 모두 끊고 오직 교회에서 섬기며 경건하게 보내라는 뜻인가? 틀린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거룩해진 결과이지 그 자체가 거룩의 본질은 아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거룩’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선하고, 의롭고, 경건한 모습들만 연상한다. 죄악과는 아예 담을 쌓아 더럽고 추한 면이 전혀 없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래서 인자와 사랑이 흘러넘치며 도저히 그 앞에서 고개를 들 수조차 없는 의로운 분으로 인식한다. 이 설명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거룩한 결과이지 본질은 아니다.
거룩이란 다른 모든 것과는 구별하여 따로 떼어 놓았다는 의미다. 주일을 그렇게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이다. 하루 시간의 길이는 똑 같고 일하지 않고 휴식하며 교회 가는 것만 다른 날과 다른데 그럼 그렇게 쉬고 예배 보는 것이 거룩한 주일이라는 뜻인가? 이 또한 거룩해진 결과이지 본질이 아니다.
사실 거룩(Holy)은 영광, 은혜 같은 단어처럼 오직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단어다. 하나님이 최고로 의롭고 선하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그분은 다른 피조물과는 전혀 다르다는 뜻이다. 그냥 다른 것이 아니라 아예 비교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분은 창조주로서 세상 만물을 지으신 분이며 시간과 공간마저 초월해 계신다. 영원토록 스스로 자존하신다. 그 분외의 모든 것은 그분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분께 의존하지 않고는 번식, 활동, 생존은커녕 아예 이 땅에 존재조차 하지 못한다. 자동차를 만든 포드와 그가 만든 자동차를 비교할 수는 없다. 아무리 아름다운 자태와 신비한 색깔을 나타내는 도자기라도 도기장이와는 아예 그 차원이 다르지 않는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임재하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모세는 동족을 출애굽시키라는 소명을 받았다. 그는 동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볼 텐데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물었다. 하나님의 대답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3:14)였지만 원어로는 단순히 주어와 be 동사를 합친 형태 즉, "I am."이라고 한 것뿐이다.
우리말로 바꾸면 “내다.”라고 한 셈이다. “나는 ~~다.”라고 하면 무엇으로 수식하든 그와 동일체가 되거나 비슷한 특성을 지닌다는 뜻이 된다.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과 같거나 비슷할 수도 없다. 인간의 어떤 정교한 논리적 설명도 그분에 대한 충분한 묘사가 되지 못한다. 심지어 그분은 이름도 없다. 이름이 상징하는 어떤 특정한 의미에 그분이 묶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부모님의 성함을 남들 앞에서 함부로 부르지도 못한다. 글자 하나씩 떼어서 말한다. 물론 부모에 대한 최대한의 공경을 드러내는 뜻이지만 부모는 그만큼 자식에게 세상 어떤 사물이나 사람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라는 뜻이다. 또 자식이 부모에게 이름을 묻는 법도 거의 없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다”라고만 하면 다 통하지 구태여 누구라고 이름을 밝힐 이유도 전혀 없다. 한 가정의 아버지도 자식에게 이런 존재일진대 천하를 지은 분과 인간 간의 관계는 아예 비교도 되지 않을 것 아닌가?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어떤 것과도 전혀 다른 분이다. 감히 비교도 되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진실하며 선하고 아름답다. 어떤 더럽고 추한 것과도 아예 공존조차 할 수 없다. 전지전능하시다. 은혜와 긍휼에 다함이 없다. 어떤 피조물도 그분의 완벽하고도 의로우신 주권에 따른 섭리와 통치를 벗어날 수 없다.
예컨대 선한 것은 인간과 공유할 수 있는 특성이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과 전혀 다르다는 점만은 그분만이 갖는 유일한 특성이다. 바로 이 “다름”이 거룩의 본질이다. 아주 선하고 의롭고 경건한 모습 즉,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거룩의 의미도 그분의 다른 특성 중의 하나다. 요컨대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다른 날과는 전혀 다르다는 의미로 따로 떼어서 안식일로 제정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떼어 내면 거룩해진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안식일이라고 해서 일을 쉬고 교회 가서 예배드리는 것 빼고 다른 날과 특별히 다를 것이 없지 않는가? 그냥 주일에 예배드리라고 하면 되지 구태여 거룩하게 했다고 말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거룩이라는 단어도 오직 하나님에게만 적용된다고 했지 않는가? 다시 모세가 소명 받는 장면에서 거룩의 의미를 더 추적해보자.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6) 모세가 서있는 곳은 광야 가운데 있는 호렙 산의 척박한 땅이었다. 전혀 아름답거나 기름진 땅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떨기나무도 사막에 아주 흔한 마른 덤불 같은 나무였다. 아무리 그런 곳이라도 거룩한 하나님이 임재해 있기에 거룩한 땅이 되었다. 인간이 감히 신을 신고 밞을 땅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라면 일단 거룩한 것이다. 그분은 더럽고 추한 것과는 절대 공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주 만물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맞지만 그 사물 자체가 거룩하다고 말할 수 없다. 또 세상만사를 그분이 다스리지 않는 법도 없다. 말하자면 어느 사건, 장소, 시간이라도 그분의 거룩함은 함께 하는 법이다. 그러나 그 모두를 거룩한 일, 장소, 때라고는 칭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으로 다른 것과 특별하게 구분해서 분리시켜야 거룩해지는 것이다. 따로 구별된 그것에 하나님의 거룩이 분리 될 때부터 강력히 임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고린도에 있는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고전1:2)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예수 안에서 거룩해졌다고 한다. 아예 명칭마저 성도라고, 영어 표현으로는 성자라는 의미의 Saint, 부르고 있다. 천주교에선 생전에 위대한 업적을 올린 자 중에서 사후에 엄격한 기준으로 심사하여 성자라는 칭호를 따로 수여한다. 그러나 성경은 지금 그냥 평범한 교인을 성자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 믿었다고 당장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었기에 하나님이 죄 없다고 칭해줄 뿐이다. 예수님의 의가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 신자에게 덧입혀지는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전혀 의롭지 않고 수시로 죄를 짓는데도 거룩한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여겨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따로 불러내어서 성령의 간섭으로 구원의 선물을 주시고 당신 자녀로 삼아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의해 그분에게 불려 나와서 그분과 함께 하면, 다른 말로 세상에서 분리되면, 거룩한 것이다.
바로 안식일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른 날과 구별해서 따로 떼어내었기에 거룩해진 것이다. 그분이 따로 떼어낸다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달라진다. 물론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는 권능과 은총은 모든 날에 동일하다. 그러나 일주일 주에 구별한 특정한 날에, 특별히 따로 불러낸 당신의 백성과 함께, 당신께서 종일 같이 지내시기에 거룩한 것이다.
좀 더 실감나게 설명해보자. 불신자 시절에 주일마다 교회 가는 신자들을 보고 어떻게 비방했는가? “아니 일주일 중에 겨우 하루 쉬는 날에 등산이나 골프를 가서 피곤을 풀어야지 뭐 하러 하루 종일 교회에서 예배보고 봉사하는지 이해가 안 되네. 정 그러려면 새벽예배에 갔다 온 후에 쉬어야지. 오히려 종교적 열성으로 스트레스가 더 쌓이는 것 아니야?”
그들은 주일을 신체 리듬을 잘 유지하기 위해 푹 쉬는 날이라고만 여긴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생물에게 주신 창조의 첫째 복은 받았다. 자기 종의 생존과 번식만 도모하는 짐승들이 받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 말이다. 말하자면 불신자의 주일은 사자가 며칠간 먹을거리 사냥을 끝내고선 한숨 자는 것과 그 수준과 내용에서 동일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더 새롭고도 풍성하게 새 일주일을 준비해 놓았을 것이라고는 전혀 꿈도 꾸지 못한다. 새롭게 시작하는 일주일도 오직 자기 마음과 능력과 노력에 달렸을 뿐이다. 당연히 더 많은 노동으로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된다. 또 많이 쉴수록 힘이 더 난다. 그러니 많이 쉬기 위해서라도 많이 차지해야 한다. 결국 물질에 묶이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야 주일이 거룩해지는가?
신자의 안식은 전혀 다르다. 우선 생체리듬은 어차피 하던 일을 멈추니까 자연히 되찾게 된다. 교회에서 정서적, 영적 안정을 얻으니까 회복이 더 빠르다. 지난주를 반성하는 마지막 날만도 아니다. 너무나 기대되는 새 일주일을 예비하는 데 초점이 더 맞춰진 날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받은 근심, 상처, 환난, 핍박 등을 주님의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뒤에 있는 일은 잊어버려야 한다. 물론 주님 앞에 잘못한 일이나 죄도 씻어 달라고 함께 꺼내놓아야 한다. 또 세속적인 즐거움과 일들은 벗어버리고 오직 주님과 함께 하루 종일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에 부어주신 그분의 은혜와 권능만을 회상하면서 그분께 감사와 영광과 찬송과 경배를 돌려야 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을 다시 확인하는 날이어야 한다. 그래서 삶의 목적과 인생의 방향이 올바르게 가고 있는지 점검하고 수정해야 한다. 앞으로 일주일, 한 달, 아니 평생을 그분의 부르심의 상을 위해서 푯대를 향해 앞으로만 걸어갈 것을 재다짐, 헌신하고, 실천을 시작하는 날이어야 한다.
특별히 안식 후 첫날에 이뤄진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는 날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 안에서 더 이상 끊어질 수 없는 신분, 소속, 위치, 특권을 누리고 있음을 정말로 확신해야 한다. 구원의 취소는 더 이상 없으며 이미 영생을 소유한 자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신자가 가는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주님이 동행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세상의 사람과 죄악과 사단과 사망이 전혀 두려울 것이 없기에 그것들 앞에 당당히 맞서는 힘을 키우는 날이어야 한다. 정말 온전한 평안을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천국의 보장된 영광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환난 가운데도 그 소망을 가꾸며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주일을 생체리듬을 회복하는 정도로만 생각하면 불신자와 하등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의 창조의 뜻 안에선 짐승과 같을 뿐이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정해 놓은 예배드리는 날이니까 교회 간다는 정도로만 그치면 안식교나 유대교와 같은 수준이다. 극단적으로 교회 일 말고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면 바리새인의 위선으로 돌아간다.
예수를 제대로 믿는 신자라면 예수 안에서 정말로 참 안식을 누려야 한다. 단순히 구원 받았다는 안도감만으로는 참 안식에서 많이 부족하다. 창조부터 주일을 따로 떼어 거룩하게 만드신 뜻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거룩한 하나님이 주일을 거룩하게 만드셨다는 그 뜻이 얼마나 귀한지 확신해야 한다. 그래서 정말 주님과 함께 전혀 다르게 주일을 보내는 자에게는 정말 전혀 다른 그분의 복이 넘치게 된다.
요컨대 주일을 따로 떼어서 온전히 지키는 것이 신자의 의무로만 여겨선 결코 안 된다. 정말로 너무나 큰 축복이자 특권이다. 세상 사람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은혜와 평강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넘친다. 특별히 하나님이 자기로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세상 앞에 드러내는 동역자로 삼았음을 확신하고 수행하고 있는 자에겐 더더욱 그러하다.
결국 신자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첫째 기준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느냐에 달렸다. 아니 인간이 정말로 인간답게 살고 있는지도 점검하고 또 그렇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도다. 주일 예배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 십자가 예수님, 두 분의 권능과 은혜를 깨달아 그 가운데서 살게 하는 성령님의 품 안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참 안식은 단언컨대 절대로 없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창조 당시에 이미 교회와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 작정하였고 그 은혜 안에 들어와 누릴 사람만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4-16) 이 진리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기”(히4:3)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정말로 주일을 따로 떼어서 거룩하게 하셨다. 아무리 평일과 똑같이 해가 뜨고 지는 하루라도 진짜로 거룩한 날이다. 거룩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신자라면 이 날에는 거룩하신 성삼위 하나님 앞에 정말 겸비한 모습으로 신을 벗고 엎드리게 된다. 단순히 그분께 예배드리는 정도가 아니다.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진정한 감사와 기쁨과 평안과 안식이 넘치게 된다. 나아가 주님의 뜻대로 자기가 속한 모든 공동체에 그분의 빛을 비춰서 거룩하게 바꾸려는 열정으로 가득 차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거룩한 성도가 되었다. 주님의 거룩함에 걸맞게 신자도 거룩해져야 하고 거룩하게 행해야 한다. 특별히 새로운 일주일의 삶 가운데 거룩을 실천하기 위해 준비하며 주일을 보내야 한다. 여러분은 거룩하게 주일을 지내는가? 또 이미 거룩해진 성도라는 확신은 있는가? 그전에 주일이 얼마나 거룩한지 확신하는가?
3/22/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