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갈비뼈는 하나 적은가?

조회 수 545 추천 수 27 2010.08.18 18: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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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갈비뼈는 하나 적은가?


아담이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갈대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창2:20-23)


괄시만 받은 여자

여자들이 투표권을 얻게 된 것이 언제인가? 미국은 1920년, 영국은 1928년, 프랑스는 1946년, 한국은 해방 후 1948년에 제정한 첫 헌법에서 보장되었다. 겨우 80-60년 밖에 안 된다. 그 전에는 여자라면 식모, 침모, 유모, 나아가 집안의 종 같은 취급을 받았다.

물론 이전에도 나름대로 법도를 갖추고 여인을 대우해준 경우도 있지만 극히 일부 상류층 계급에 한한다. 또 평생을 서로 사랑했던 부부도 많지만 밖에서 외도하는 것은 물론 집안에 후처와 첩을 두는 일을 최근까지도 그리 도덕적인 하자로 삼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회 통념은 여자는 남자보다 훨씬 열등하다 못해 아예 남자가 멋대로 처분해도 되는 소유물 정도로 여겨왔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참정권을 필두로 남성의 족쇄에서 풀리자마자 여성 권익 운동은 만개했다. 특별히 서구 민주주의를 채택한 나라에선 수천 년의 억압에 대한 화풀이라도 하듯이 급속도로 여성 중심으로 사회 조류가 흘러가고 있다.

급기야는 기독교계에도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법이 없다는 여성 신학이 등장했다. 하나님은 징계와 심판을 하는 아버지보다는 한 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어머니 같은 분이라는 것이다. 죄에 대해 무한한 관용을 베푸시는 하나님이기에 심판을 별로 문제 삼지 않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그동안 하나님 말씀에서도 여성이 올바른 취급을 받지 못했다고 하여서 새롭게 수정된 성경들이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TNIV (Today's New International Version)을 들 수 있는데 일부 단어를 중성적, 양성적 표현으로 바꾼 것이다.  

예컨대 ‘하나님의 아들들(sons of God)’이라는 구절을 ‘하나님의 자녀들(children of God)’로, ‘형제들(brothers)’이라는 구절은 ‘형제자매들(brothers and sisters)’로 바꾸었다. 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God created man)’는 ‘man’ 대신 중성적인 ‘human beings’를 사용했다. 당연히 보수 교계의 큰 반발을 샀다.

갈빗대의 비유

본문은 여성에 관해 성경이 최초로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다.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떼어서 여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치 성경도 여자를 남자의 갈빗대 하나의 신분, 가치, 의미로 밖에 취급하지 않는 것 같다. 또 기독교계에서마저 오랫동안 이 구절을 여성 비하를 뒷받침 내지 허락해주는 하나님의 뜻으로 오해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창세기 기사를 오해해 불신자들이 풍자적 내지 악의적인 유머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우선 여자에게서 나지 않은 아담에겐 배꼽이 없었다고 한다. 또 남자의 유난히 큰 목젖도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다 하나님에게 들키는 바람에 급히 삼키느라 목에 걸려서 생겼다는 조크도 유행했다. 이브는 먼저 따 먹었기에 하나님 보시기 전에 다 먹었다는 것이다. 본문을 두고도 남자가 여자보다 갈빗대의 숫자가 하나 적다고 했다.

그럼 과연 성경이 남자의 갈빗대에서 여성을 만드셨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가장 먼저 주지해야할 사항은 어디까지나 상징적 비유적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갈빗대의 히브리 원어 “쩨라” 자체의 상징적 의미인 한 쪽, 혹은 측면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일부 주장도 일견 타당한 면도 있지만 조금은 부족한 해석이다. 아담이 분명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고 말했기에 갈빗대가 표상하는 신체적인 의미를 반드시 감안해야 한다.  

먼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것이 갈빗대를 적출하는 외과 수술을 하기 위해 마취시켜 혼수상태로 만들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담 모르게 이브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물론 아담도 이브 모르게 창조되었다. 각기 개체별로 따로 창조되었다. 서로가 상대의 창조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서로 모르게 만들어지려면 아담은 깊은 잠에 들어야 했고 당연히 하나님이 초자연적 잠을 주셨을 것이다.

창조란 오직 하나님의 고유 영역이다. 그 어떤 존재도 영향을 주거나, 힘을 합하거나, 참견을 못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볼 수도 없다. 모든 피조물은 완전히 피조 된 후에 단지 피조물로서 존재하고 생육할 뿐이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아담과 이브로선 본인의 창조 과정은 너무나 당연하게, 상대의 창조 과정 또한, 보지 못했다.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 만에 하나 보았다 해도 아예 이해조차 못한다.

그런데도 구태여 성경이 갈빗대를 빼서 만들었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모든 생물학적 기본 구조 즉, DNA 체계는 남녀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둘 다 눈과 귀, 손과 발은 각기 둘이요, 입과 코는 하나라는 것이다. 다른 것은 단지 성(性)일 뿐이다.  

아담과 이브가 완전한 성인으로 따로 따로 창조되어졌다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신분이라는 뜻이다. 남자든 여자든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만들어진 하나의 완전히 독립된 인격체다.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을 안 닮았거나 적게 닮았다는 뜻은 전혀 없다. 상호 간에 우열의 문제는 전혀 존재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정체성

또 아담이든 이브가 닮은 하나님의 형상은 그분의 인격성이지 성적 정체성까지 포함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만약 성마저 하나님을 닮게 만들어졌다면 하나님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아니면 양성을 공유한 분인지 따져야 한다는 이상한 논의가 대두된다.  

하나님은 남성, 여성, 중성, 양성 그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성 자체를 만드신 분으로 성을 초월해 계시는 분이다. 성이 갖는 가장 기본적 기능은 번식(reproduction)이다. 그분은 영원히 자존하시는 분이기에 번식이 전혀 필요 없다. 성과는 아예 무관하다.

반면에 모든 피조물은 번식해야 하기에 성적 존재, 거의 모두가 각기 자웅을 가진 모습으로 창조하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양과 음이 세상을 주도한다는 동양적 이원론은 피조세계의 결과적 양태만을 그것도 일부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 기(氣)가 하나님을 대체하는 존재, 능력, 아류가 될 수는 절대로 없다.

성의 정체성을 하나님에게마저 적용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비록 그들이 하나님이 성을 가진 존재라고 인정하지 않았을지언정, 성경 진리와는 위배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 안에 공의와 사랑이 공존하는 것이지 그분이 남성인지 여성인지는 따질 수는 없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육신의 아버지도 그러하듯이, 공의만 대변한다는 법은 없지 않는가?

그리고 아버지라는 표현은 무엇보다 당신의 자녀들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표현일 뿐이다. 말하자면 우리말 “부자(父子)”관계와 같은 표현이다. 이 용어에서 부(父)는 남성 아버지보다는 부모를 통칭하고, 또 자(子)도 남성 아들보다 자녀 전부를 대신하지 않는가? 여성을 차별하면 안 되니까 모든 글에서 “부모자녀” 사이라고 구태여 양성을 다 밝혀야 할 이유가 없는 것과 같다.

물론 성경이 기록되어져 읽히기 시작될 당시에는 분명히 남성 우월적인 사회통념이 있었고 일부 그에 맞춘 표현인 점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라는 표현을 접하는 독자 모두가 잘못을 범하기만 하면 벌주는 무서운 남성 신에만 해당된다고는 이해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세상을 통치하는 유일한 절대자라는 이미지가 더 앞선다. 하나님 어머니라고 호칭을 바꿨을 때에 느끼는 뉘앙스와 비교해보면 쉽게 그 차이를 인식할 수 있지 않는가? 하나님 어머니로는 아무래도 전지전능하신 절대자 하나님이란 확실한 개념이 내포된 표현은 아니지 않는가? 요컨대 하나님을 중성 혹은 양성 명사로 바꿀 재간도 없을뿐더러 구태여 남녀 모두 차별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 부모님”으로 바꾸면 더 혼선만 불러올 뿐이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창조의 의미만 잘 따져 봐도 우열(優劣)이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다. 우열을 따지려면 같은 종류, 자격, 조건 등에서라야 가능하다. 남성 헤비급 복서가 여성 플라이급 복서보다 센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 둘을 비교하려는 것이야말로 어리석다 못해 우스꽝스런 짓이다. 같은 급, 같은 성 안에서만 우열이 의미가 있을 뿐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아담 모르게 이브를 따로 창조했다. 개별적 독립적 존재일 뿐 아니라 아담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생물학적 기본 구성이 다르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약 아담과 동일한 존재를 만들려면 번식(reproduction) 혹은 복사(copy)의 절차만 거치면 된다. 별도로 창조할 필요가 없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존재 즉, 하나님이 부여하신 목적이 전혀 다르다. 그분의 목적을 이 땅에서 실현해야할 남녀의 기능 즉, 신체의 기계적 구조도 당연히 달라진다. 그 둘은 아예 비교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말하자면 겨우 백 년 전까지도, 어쩌면 지금까지도, 이런 면에서 모든 기독교인들도 큰 잘못을 범한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 보시기엔 아담과 이브 둘 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동등한 인격체로 지어졌다. 각기 동일하게 부여 받은 하나님의 품성을 귀하게 가꿔야 하고, 그분께 진심으로 감사와 경배를 드리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감으로써, 그분의 영광을 이 땅에 드러내어야 한다는 면에서 전혀 다를 바 하나 없다.              

여성 창조는 결혼이 전제다.

그럼에도 성경이 구태여 아담의 갈빗대에서 여자를 만드셨다고 표현한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남녀는 한 몸이 되어야 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떨어져선 살 수 없고 반드시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혼을 전제로 하여 여자를 창조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모든 인간은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브를 아담에게 이끌어 왔다고 하지 않는가?  

따라서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 결혼을 기피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따지면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된다. 구조적으로 결혼을 못할 형편이거나, 간혹 독신의 은사를 받은 자 말고는 신자라면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

구조적이라는 말은 예컨대 나면서 중병을 앓고 있어서 결혼하여 식구들을 부양하기 불가능하거나, 남자나 여자 혼자 고립된 경우를 뜻한다. 때로는 청춘 남녀 간의 숫자가 불균형이 생기는 경우도 포함된다. 한 마디로 결혼을 할 의향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서 결혼하지 못하는 것은 전혀 죄가 되지 않는다.

또 독신의 은사를 받은 경우, 예컨대 인류 발전을 위해 오지나 극지를 최초로 탐험해야 하는 소명을 받은 자 같은 경우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탐험의 길을 아내와 자식과 동행할 수는 없다. 수도원에서 평생을 성경 연구에 바치도록 하는 경우도 또 다른 예다.  

이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다. 그분의 명령을 어겼다는 단순한 차원이 아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남녀가 결혼해 둘이 함께 살아야 그 인생이 충실해진다고 의도하셨다. 독신으로 살면 인생을 충실히 맛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단순 수치로 따져도 반쪽의 인생을 사는 셈이기에 결혼하지 않는 자만 어리석다.  

아무리 아이 낳고 기르는 일이 힘들더라도 진정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그분의 뜻에 충실하면 독신보다 갑절의 아니 수십 배로 그분의 은혜를 맛보는 고귀한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독신을 고수하는 것은 그런 엄청난 축복을 스스로 차버리는 너무나 바보 같은 짓일 뿐이다. 이런 측면에선 독신 소명을 받은 자는 비록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쁨은 있지만 인생의 깊은 맛을 느끼지 못하기에 불쌍하고 안타까운 인생인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기본체계

그럼 하나님은 왜 모두가 결혼하길 원하시는가? 결혼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남녀가 만나 아이들 낳고 잘 양육하여 독립시키고 노후를 안락하게 보내는 것으로 끝인가? 그것은 신자가 아니라도 모든 이의 결혼에 해당되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하나님이 남성과 여성을 창조한 목적이 결혼으로 끝이 아니다. 결혼은 그분의 더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시는 수단이자 통로일 뿐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여성을 어떤 상황에서 창조했다고 말하는가?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20절) 아담이 열심히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있는데 그 일을 도와서 할 자를 주실 양으로 이브를 창조했다고 한다. 여자가 그 일을 섬세하게 잘 보완해 줄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남녀를 결혼시켜서 가정을 이루게 한 뒤에 동산을 다스리게 하려는 것이다. 결혼이 바로 동산을 다스리는 일이자 결혼을 통해서 그 일을 하라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다른 복을 추가로 받았다. 모든 생물은 생육, 번성, 충만하라는 복까지 받았지만 인간은 그와 동일한 복 위에 땅과 땅 위의 모든 생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청지기로서 그분 뜻대로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다스려야 한다.

신자는 이웃 사랑하는 것과 동등하게 또는 그것보다 먼저 자연환경을 잘 보존해야 할 사명을 받았다.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간접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 된다. 나아가 이웃끼리도 힘을 합해 자연을 사랑해야 한다. 이웃도 신자가 하나님 뜻대로 자연과 함께 다스릴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남녀가 서로 돕는 배필로서 함께 힘을 합해 그 일을 하기를 원하셨다. 이 땅 전체를 운행하는 일은 하나님이 직접 하시지만 땅과 그에 속한 것들을 아름답게 보존하고 가꾸는 일은 인간에게 위임하셨다. 가정을 그 일을 이뤄내는 가장 근본적인 단위 내지 구조로 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계획에선 여자가 없으면 남자는 반쪽 기능 밖에 못한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여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시킬 근본 조직인 가정을 책임지는 반 쪽 기둥이다. 여자가 없으면 그분의 일이 실현되지 않는다. 남성 혼자서 하나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여성보다 우위에 설 이유라고는 전혀 없다.

그래서 신자는 개인적으로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가정을 통해서 이 땅에 그분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현해 내보여야 한다. 부부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동등한 자격과 신분에서 힘을 합쳐서 그래야 한다. 여자의 창조에는 결혼이 전제 되었고, 또 그 결혼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가시적으로 이 땅에 구현해 보여야만 온전한 모습이 된다.

바꿔 말해 아담과 이브가 이룬 가정이 바로 최초의 교회였다는 뜻이다. 그들이 자식을 낳으면 가정이 바로 주일학교가 되었음도 당연하다. 오늘날 신자 부모들마저 자녀들의 인성과 신앙 교육은 교회 주일학교에 일임하고 자기들은 진학과 출세 교육에만 전념하는 것은 아주 큰 잘못이다. 가정 자체가 먼저 교회가 되어야 하고 또 그런 가정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다.  

하나님 뜻을 이룰 가장 기본적 단위인 가정에서부터 그분 뜻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세상은 소망이 없다는 말과 같다. 조직체 교회가 아무리 외적으로 성장 부흥해도 교인들의 가정이 무너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 교회는 이 창조의 원리부터 온전히 가르쳐서 교회 자체를 키우려하기보다는 교인들의 가정부터 변화시켜야 한다. 그러면 전도, 헌금, 기도, 성경공부 등을 독려하지 않아도 교회는 자연히 양적 질적으로 성장하게 되어 있다. 지금은 가정은 뒷전이 되어도 좋으니 교회에 충성하면 복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으니 창세기의 근본 뜻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교인들을 성경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세 종류의 가정

신자의 결혼은 그래서 타락 전의 에덴동산에서 살았던 아담과 이브의 결혼 같아야 한다.  그 가정은 정말 유토피아처럼 되어야 한다. 가족들이 집에 들어오면 모두가 안락과 평강과 자유와 기쁨을 양껏 맛볼 수 있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 주인으로 모시는 가정이 되어서 그분이 주시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히 넘쳐야 한다. 종교적 포맷에 묶인 가정을 만들라는 뜻이 아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가정이어야 한다.

불신자 가정과 비교해보면 확실한 의미를 알 수 있다. 대부분의 불신자 가정은 "집(house)"에 불과하다. 예컨대 최고급 맨션에서 살면서 아빠는 외제차를 타고 골프 실력 올리는데 여념이 없고, 엄마는 보석을 휘감고 호텔에서 계모임에 열중이고, 자녀들도 브랜드 옷만 입고 가정 교수를 두고 있어도 그것뿐이다. 가족 간의 진정한 사랑은커녕 솔직한 대화마저 완전히 실종되었다. 무슨 문제든 돈으로만 해결하려 든다. 가정은 단지 비를 피해 잠자는 곳(shelter)으로 바뀌었다.

물론 의로운 불신자들은 집만으로는 많이 부족하다고 여긴다. 가족끼리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 진정한 "가정(home)"을 이룬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가 가족 공동의 목표가 된다. 식구들끼리 외적 형편과 상관없이 진정으로 서로를 위해주는 모습이다.  

그런데 신자도 그 정도로 하나님의 가정을 이뤘다고 여기는데 결코 충분치 않다. 하나님의 뜻은 더 많이 앞서 있다.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이 가정 안에 실제로 실현되어져야 한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127:1) 정말로 하나님이 그 가정을 보호, 인도해야 한다. 단순히 하나님이 어려운 환난에서 가정을 지켜준다는 뜻이 아니다.    

작금 결손 가정이 너무 많다. 한국의 이혼율도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이혼까지 안 가도 부부사이, 부자 관계가 계속 무너져 내리고 있는 가정이 주위에 널렸다. 왜 그렇게 되는가? 교회 나가서 예수만 잘 믿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 신자 가정 중에도 온갖 문제가, 그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될 만한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가?

집에 불과한 가정을 가진 불신자들도 처음부터 가정을 돌보지 않으려 작정한 것은 절대 아니다. 나름대로 가정을 지키고 아름답게 가꾸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 수단으로 세상 물질과 권세에만 의존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하나님을 닮은 인격체가, 아니 물질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려야 할 인간이 오히려 물질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집에 돈으로 도배를 해도 집일뿐이지 가정으로 바뀌지 않는다.

또 가정이라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족끼리 화목하려 애를 쓰지만 가정을 이끌어 가는 힘이 자신들의 인간적 도덕성과 의지력뿐이다. 물론 스스로 어느 정도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도무지 인간의 힘으로 감당치 못할 위기가 닥치면 가족끼리도 얼마든지 틈이 생길 수 있다. 나아가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이 죄의 본성이 살아 있는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이기에 아무리 선한 자라도 자신의 도덕성에만 의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신자마저 가정을 화목하게만 이끌려는 것은 많이 부족하다고 말한 근본적인 이유다.  
  
신자의 가정이 하나님의 왕국이 되는 길은 가정 내의 범사에 그분의 온전하고도 거룩한 통치가 실제로 임해야 한다. 인간적 화목과 사랑 위에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가 보태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가족 모두가 개별적으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한 사람만 잘 믿어서도 안 된다. 먼저 잘 믿은 사람이 있으면 나머지 가족을 하나님 앞으로 어떻게 하든 인도해야 한다.

한마디로 당신의 참 자녀들로만 이뤄진 가정 전체가 하나님 앞에 참 기쁨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이브를 따로 만들어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지 않는가? 아담이 이브를 만들거나 길에서 우연히 만나 데리고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함께 당신께 전적으로 순종하기 원하셨지, 아담만 순종하고 이브는 아담 말만 잘 들으면 된다고 하지 않았다.

신자의 가정은 가족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섬겨야 한다. 있는 모습 그대로 끝까지 용서하고 품어줄 수 있어야 한다. 가족 중의 한 사람에게 아무리 큰 허물과 잘못이 있어도 나머지 가족이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그가 주님 안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가족들의 슬픔, 아픔, 시련, 눌림, 염려 어떤 것도 완전히 서로 털어놓고 함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전적으로 주님의 선하신 인도만 구해야 한다. 나아가 다른 가족의 어려움을 하나님 도움으로 해결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심정으로 더욱 그를 사랑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가야 한다.

물론 오늘날의 너무나 복잡하고 고달픈 삶에선 아주 어려운 과제일 수 있다. 또 사단의 공중 권세 아래 놓인 죄 많은 세상에선, 나아가 여전히 죄의 힘이 살아있는 연약한 모습인지라 온전히 그렇게 행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에서 바랐던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이 그렇기에 실제로 가족 모두가 항상 노력하여서 궁극적으로 도달할 목표는 그래야 한다.

또 그러기 위해서라도 모든 구성원이 주님 안에서 온전한 믿음으로 기도와 말씀에 전무해야 한다. 단순히 가정 예배를 보고 기도한다고 주님의 왕국으로 변한 가정이 된다는 법은 없다. 성령이 가족 모두에게 충만히 임재하고 상호 교통하여서 주님의 사랑과 능력이 실제로 가족 모두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여실히 드러나야 한다.    

집을 가진 불신자는 가정을 가진 의로운 불신자나 신자를 아주 부러워한다. 재차 강조하지만 신자의 가정은 거기서 더 나아 간 모습이어야 한다. 가족끼리 아무 문제없이 아주 화목하게 살고 있는 자들마저 신자의 가정을 보고선 뭔가 자기들에게 하나가 빠진 것 같다고 느끼고 또 부러워하게 만들어야 한다.

간단한 예로 형제끼리 우애가 돈독한 가정도 식사기도 한 번 없이 생일잔치를 갖지 않는가? 형제들이 어려우면 십시일반하며 도우고 만나면 성찬을 나누며 정말 즐겁게 지낸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은 물론 형제들의 어려운 문제를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적은 없다. 아무리 즐거운 일이 있어도 찬양하며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는 적도 없다.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자기들 존재와 삶과 인생을 거룩하게 바꿔보려는 생각 또한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가정 예배를 드리고 기도와 찬양을 해야만 하나님의 가정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 뜻대로 살려고 하는 가정에는 하나님이 세상 사람은 전혀 알지 못하는 오묘하고도 거룩한 평강과 위로와 자유와 감사와 기쁨으로 인도하신다. 예수님의 놀라운 생명력이 살아 역사하는 충만한 가정이 된다. 가정만 이룬 자가 볼 때에 그리스도의 향기와 광채가 넘치는 하나님의 왕국을 반드시 부러워하게 된다.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이런 맥락에서 신자의 가정이 다른 가정과 달라야 하는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 하나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니라.”(마19:3-6)

근자에 아무리 이혼율이 50%에 육박해도 신자는 이혼해선 안 된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 하나님이 이브를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다. 하나님이 나눌 때 즉, 죽음으로 헤어질 때만 나눠질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예수님은 이 말씀에 이어서 음행한 연고 외에는 이혼해선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9절) 역으로 말하면 배우자가 간음했을 때에 한해 이혼해도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마5:28)고 음행의 범위를 확대했다. 즉 남편과 아내 공히 실제 혼외정사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마음으로 간음죄를 범할 가능성은 상존한다. 나아가 자기에게 잘못한 자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다.

따라서 실제로 간음했어도 신자 부부는 반드시 잘못을 회개하며 또 끝까지 용서해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도저히 용서가 안 되어 이혼을 한다고 예수님의 계명을 어기는 죄는 아니다. 그럼에도 부부는 하나님이 서로 만나도록 해서 결혼을 성사시켰고 또 부부 사이를 아름답게 이끄시는 이도 하나님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두 사람만의 결혼이 아니라 무슨 일을 만나도 하나님을 주재자요 인도자요 중재자로 모시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죽음으로 나누지 않는 한 헤어지지 않겠다는 표현을 성경적으로 바꾸면 어떻게 되겠는가? 바로 아담이 말한 그대로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자신의 뼈와 살을 스스로 어떻게 잘라 나누겠는가? 절대 그럴 수는 없다. 아담은 이브를 만나 하나님이 시켜주시는 결혼을 하기 직전에 바로 그런 고백을 했다. 이브는 나와 평생을 함께 할 돕는 배필로서 하나님이 맺어주신 관계이니 제가 절대 나누지 않겠다는 진정한 고백이었다.

주지해야 할 사항은 이브라는 명칭을 아담이 붙였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성경적으로는 그 사람의 모든 점을 다 파악했다는 뜻이다. 이름 안에 모든 특성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아담은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이라는 의미로 이브라고 부르기로 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여자를 창조하신 뜻을 충분히 숙지하고 그대로 따르겠다는 뜻이었다.

우선 이브가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형상을 닮은 자기와 동등한 자격과 신분을 가진 독립된 개별 인격체라는 것이다. 또 자기와 함께 평생을 살면서 가정을 이루어야 하며 그 가정을 통해 에덴동산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가꿔야 하는 소명에 충성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평생을 두고 헤어지지 않을 것이며 아이들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로 양육하여서 그 가정을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그분의 왕국으로 가꾸겠다는 뜻이었다.

여러분의 가정은 상기 셋 중에 어디에 해당하는가? 아내를 향해 남편들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이 진심에서 우러나올 수 있는가? 남편을 향해 아내들도 평생토록 돕는 배필로서 소명을 다할 것이라고 진정으로 다짐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하나님만 주인으로 모신 진실 된 하나님의 왕국으로 변화되고 있는가?

8/2/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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