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진짜로 창조한 세 가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세 번에 걸쳐 ‘태초’라는 단어와 연결해 창조와 동시에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살펴보았다. 지금껏 창조가 공간 차원에서 물체가 생기게 된 기원과 과정에만 집중 조명된 것 같아 시간 차원에서도 그 의미를 재검토해 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제 남은 세 단어 하나님과, 천지, 창조에 대해서도 알아보기로 하자.
인간 만들기 시합
유전자 공학을 최고조로 발달시킨 일단의 과학자들이 인간도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나님에게 누가 인간을 더 잘 만들지 시합하자고 제안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크리스천 유머의 하나다. 흙을 들고서 인간을 빚으려고 시도하는 과학자들을 제지하며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쓸 흙은 너희가 직접 만들어서 사용해!”
인간은 이미 이 땅에 있는 질료들을 활용만 할 줄 알지 절대 그 자체를 만들지는 못한다. 현대 과학이 동물 복제는 이미 이뤘고 아마 곧 인간 복제도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기존 세포를 이용한 것이지 세포 자체를 만든 것은 아니다.
흙에서 가장 원시적인 아미노산을 생성해낼 수 있는 확률은 10에 제로가 64개 붙은 것 분의 1이라고 한다. 제로가 12개만 붙어도 1조분의 1의 확률이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달에 인간을 착륙시켰다가 지구로 무사 귀환시키는 데는 제로 13개 붙은 것 분의 1의 오차까지 점검한다고 한다. 그것을 넘어서는 오차는 우주에서조차 발생할 확률이 아예 없기에 무시하겠다는 뜻이다. 양성에 막대한 경비가 드는 우주비행사의 생명을 걸어도 그렇다.
그럼 원시 아미노산이 DNA 구조를 만들고, 그것이 세포를 형성하며, 또 인체의 조직과 장기를 구성하고, 나아가 모든 장기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온전한 기능을 하는 인간이 태어날 확률은 대체 얼마일까? 그 확률에 붙은 제로의 개수는 틀림없이 무한대일 것이다.
고급 두뇌의 외부적 도움은 전혀 없이 물질에 우연이 겹쳐 원시 생명체로 변한다는 주장은 너무나 어불성설이다. 우연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아주 미미한 확률을, 예컨대 백만분의 일을 뜻한다. 모든 우연마다 그 정도 확률은 다 있다. 그런 우연과 우연들이 겹쳐질 수 있는 확률 또한 그러하다. 그럼 최소 단위 물질에서 인간까지 이어지는 그 우연의 연쇄 사슬의 길이는 대체 어디까지 갈까? 전 우주를 다 돌고도 남지 않겠는가?
진화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어쩌면 무리한 이론임을 내심 자인할지 모른다. 그래서 장구한 시간만 소요된다면 얼마든지 그런 우연도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제로가 64개 붙어도 아예 불가능한 확률은 아니지 않는가라는 뜻이다. 이는 정말 억지 중의 최고 억지다.
우선 창조와 진화 둘 중의 하나가 반드시 진리이기에 둘 중 어느 것이 50%를 넘기는 확률 즉, 개연성을 가졌는지 따져야 한다. 물론 확률로만 따지면 둘 중 하나는 절대적으로 100% 다른 하나는 0%라는 것이 더 정확한 진술이다. 둘 중 하나는 절대적 진리이고 다른 것은 절대적 허위이기 때문이다.
개연성은 단순한 확률 혹은 가능성과는 다르다. 지금처럼 고려할 대상이 둘 만 있는 경우에는 확률이 50%를 넘어야만 개연성을 가진다. 흙에서 원시 아미노산이 생성될 확률이 제로가 64개 붙은 것 분의 1이라고 했다. 어쨌든 확률적으로 전혀 가능성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개연성이란 차원에선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므로 진화는 이미 거론대상에서 제외되어야만 한다.
그런데도 만약 바위가 태양을 만들었다고 말하면, 앞글에서 언급한 대로 진화가 실제로 의미하는 바인데도, 어떤 진화론자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바위와 태양은 그 격이 너무 차이가 날 뿐 아니라 아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상에 이미 있는 물질에서 지구상에 생존하는 물체가 생성되어졌다는 데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엄밀히 따지면 사실은 이 둘은 같은 내용인데도 말이다.
지구상에선 물질이 저절로 인간이 되었다는 즉, 바위가 태양을 만드는 것 같은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 공기, 태양 등,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이미 다 마련되어 있었다는 전제를 두고 따지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미생물이 활개치고 변화될 수 있는 여건인지라 어떤 무리한 이론을 전개해도 무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그 물, 공기, 태양, 물질 등은 대체 누가 어떻게 만든 것인가? 진화론 창시자 다윈조차 진화의 시발을 창조를 전제하고 이론을 전개했지 않는가? 다른 말로 아무리 그럴싸한 이론과 자료로 진화를 뒷받침해도 물, 공기, 태양의 기원도 그 이론으로 규명해내지 않는 한 아무런 타당성, 아니 가능성조차 표방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지만 제로가 64개 붙은 확률이라도, 진화는 사실상 제로가 무한대 붙은 것과 같은 확률이지만, 어쨌든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은 궤변 중에 궤변에 불과하다. 예컨대 한 사람이 일 년 내내 슈퍼로또에 당첨되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말과 같다. 누가 들어도 그 말의 근거가 사실상 제로가 64개 붙긴 해도 미미하게나마 살아있는(?) 확률도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절대적 진리나 비진리를 절대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는 신념이다.
“이런 생각이 가지는 문제점은 아무런 타당한 이유 없이도 가능성의 근거를 증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추론할 수 있다면 아무리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이라도 다 설명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있을 법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무한한 우주 속 어딘가에서는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기만 하면 모든 설명이 가능하게 되는 것과 같다.”(하나님을 누가 만들었을까? 래비 재커라이어스와 노만 가이슬러 편저, 사랑플러스 2005년, p 78)
말하자면 진화론은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되지 않는 “창조주 하나님은 있을 것 같다”는 너무나 자연스런 생각을 억지로 부인하려는 눈물겨운 시도라는 것이다. 또 어쨌든 창조주 하나님만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어떤 억지를 동원해서라도 절대 버리지 않겠다는 힘에 벅찬 노력이다.
하나님 앞에서 이만한 큰 죄도 없다. 윤리적인 잘못과는 아예 차원이 다르다. 자식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부모는 다 용서할 수 있다. 언제든 사랑으로 품어주며 더 성숙하게 변화시키려 한다. 그러나 자식이 친부모와 절연하고서 집을 나가버리는 일만큼 부모 가슴을 아프게 하는 죄는 없지 않는가? 진화가 도무지 있을 법하지 않는 일임에도 자기를 지은 창조주를 부인하는 구실로 삼는 인간의 말로는 그분의 심판일 수밖에 없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인 까닭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리는 까닭은 그분이 직접 육성으로 말씀하시고 인간이 받아 적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그분에 관해 가장 정확하게 설명된 유일한 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인간 선각자가 추측, 상상, 고안, 묵상, 자각해서 기술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계시한 것을 성령의 영감을 통해 인간으로 깨닫게 하고 또 저술케 한 것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증명한 것이다.
하나님이 행한 가장 첫 번째의 자기 증명(self-proof)은 바로 만물이 결코 진화된 것이 아니라 당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장구한 세월이 지난다고 해서 물질에서 아미노산이 무조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장구한 세월과 무한대 크기의 우주라는 두 가지 차원만으로는 인간 생성의 타당한 가능성이 절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성경에는 무조건 창조를 믿으라고 강요하는 뜻은 추후도 없다. 창조에 대해 정말 성경만큼 정밀하고도 의미심장하게 기록한 책이 없다는 것이다. 제대로 그 의미를 파헤친다면 창조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최소한 창세기 기록에 대한 정밀성과 합리성에 대해선 더 이상 군말이 없어진다. 인간이 기록했지만 창조의 의미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너무나 정확히 기록했다. 그것도 수천 년 전에 말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가 성령의 영감을 통해 저자에게 전해졌고 인간 기록자는 그 뜻을 전달하는 메신저였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로 물건을 만들어낸다는 뜻을 나타내는 단어가 셋이 있다. 먼저 ‘바라’는 완전한 무(無)에서 유(有)를 조성하는 것으로 문자 그대로 창조를 말한다. 말하자면 흙을 이용해 아미노산을 만들려는 인간 과학자와는 달리 하나님은 아예 흙부터 만들고서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이 창조의 뜻이다.
둘째는 기존의 피조 된 기본 물질에서 더 고급하고 좋은 것을 만든다는 뜻의 ‘아사’가 있다. 과학자들이 줄기 세포를 이용해 복제 동물을 만드는 것과 같다. 인간은 창조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조된 영역 안에서 개선만 이룰 수 있다.
마지막 셋째는 ‘야찰’로 ‘아사’와 비슷하지만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특별한 존재를 만든다는 뜻이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것이 ‘아사’가 된다면 일일이 손으로 걸작을 만드는 것이 ‘야찰’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 스포츠카와 제임스본드가 타는 특수차량을 비교하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에서 이 세 단어가 쓰인 용례(用例)를 하나씩 살펴보자. 먼저 무에서 유를 창조한 ‘바라’는 당연히 가장 먼저 1:1에 사용되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아무 것도 없던 빈 공간에 물체를 만들어 넣기 시작한 것이다. 또 기존 물질을 개선하여 다른 것을 만든 ‘아사’는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16절)에서 해와 달을 만든 것에 나타난다. 마지막 특별한 목적을 갖고 특수한 존재를 만든 ‘야찰’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2:7)에 사용되었다. 인간의 창조에는 하나님 고유의 계획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한글이나 영어 번역본에도 이 세 가지 의미는 각기 다른 동사로 구분하여 반영되었다. 무에서 유는 "창조(創造 create)"가, 더 나아진 물체가 되는 것은 "만드시고(make)"가, 마지막 특별한 존재로 되는 것은 “지으시고(form)"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창세기의 기록이 참으로 정미하지 않는가? 흔히 반발하듯이 황당무계한 설화도, 단순히 진화를 부인하고자 하는 기독교의 교리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 전혀 없었던 세 가지는?
그런데 이것으로 전부가 아니다. 더 세밀한 기록이 있다. 인간 선각자가 자신이 고안해 기록한 종교경전에 그친다면 도무지 수 있을 수 없는 그야말로 놀라운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하신 그분의 절대적 말씀임을 부인하려야 할 수 없는 말씀이다.
무에서 유를 만든다는 ‘바라’라는 단어가 창세기에 딱 세 번만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그 말은 그 전에는 세상에 아예 없다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진 것이 셋 있다는 뜻이다. 과학자가 있는 것을 활용해서 더 나은 것으로 개선시킨 정도가 아니라 순수한 창조에 의해서만 생기는 것들이다.
과연 그 셋이 무엇이겠는가? 한 번 추측해보라. 도무지 추측이 안 되는가? 기독교 신앙을 이미 가진 자도 그럴진대 다른 사람들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만약 도무지 추측조차 안 되면 창세기가 인간의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결코 기독교의 독선적 주장이 아님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은 앞에서 이에 대한 너무나 정확한 힌트를 이미 주었다. 우리말로 ‘창조’라는 단어가 쓰인 세 곳만 찾으면 된다. 또 다른 힌트는 인간은 분명히 창조되었다는 점이다. 인간에게 무에서 유로 바뀐 즉, 하나님만이 창조할 수 있는 세 가지가 있다는 뜻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세 요소를 유추하면 된다. 지금쯤은 어렴풋이 감이 잡힐 것이다.
우선 이미 말한 대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는 당연히 포함된다. 태초에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물체들을 만들어 넣었다. 그러나 아직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할 뿐이었다.(1:2) 그럼 무에서 유가 된 것은 무엇인가? 바로 물질이다. 화학적으로 원소기호로 표시할 수 있는 원자들이다. 종교적으로는 티끌, 흙 같은 단어로 서술하는 가장 기초적인 물질이다. 과학자들은 인간을 만들기 위해 어떤 최첨단 수단을 동원해도 무에서 흙은 만들지 못한다. 진화도 창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물질 그 자체는 오직 하나님만이 만드실 수 있다.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21절)에 두 번째로 창조란 단어가 사용되었다. 여기서 무에서 유로 된 것은 또 무엇인가? 움직이는 생물을 만드셨다. 물질 스스로는 절대 생명을 창출하지 못한다.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우연에 우연을 거쳐 진화한다고 해서 생명체가 태어나지 않는다. 물질의 외부에서 하나님이 생명을 부여해야만 생명체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셋째 날에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12절) 낼 때에도 이미 생명이 있는 식물이 창조되었다. 그러나 채소와 나무는 씨가 땅에 심겨져 싹이 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땅이 생산한다(produce)는 단어를 사용해 땅의 영양분을 받아 발아된다는 뜻이다. 성경 기자는 식물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활력을 갖지 못하기에 생명에 대한 설명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창조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27절)에 나타난다. 인간의 경우만 ‘아사’나 ‘야찰’ 대신에 ‘바라’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럼 여기서 무에서 유가 된 것은 사람인가? 아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사람이 속한 동물들은 이미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하나님이 다른 생명체와는 전혀 다르며 그들이 갖지 못하는 무엇을 무에서 유로 만들어 사람에게 주었다는 뜻이다. 바로 영혼이다. 영혼은 단순히 생명과는 다르다. 생명이 진화한다고 영혼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오직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만 살 뿐이다. 말하자면 원숭이가 돌연변이로 진화하여 인간이 되었고 차츰 그 지성이 발달하여 도덕성, 종교성을 개발하여서 신(神)을 고안해 내고 종교를 창시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닮게 인간을 창조했다. 그분의 형상을 닮은 것이 바로 영혼이며 그 영혼은 하나님이 직접 인간에게 집어넣어 주었다. 영성은 원래부터 하나님이 창조해서 인간에게만 주신 것으로 인간만이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를 수 있다는 뜻이다. 동물들도 갖고 있는 초보적 지정의를 생명과 구분하여 영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 마디로 쉽게 말해 개나 돼지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창세기가 밝히고 있는 내용은 하나님이 진짜로 창조하신 것으로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물질과 생명과 (인간의) 영혼이 그것이다. 아무리 인간이 기존에 있는 물질을 활용하여 어떤 고급한 것을 만들어내더라도 이런 측면에서 창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설령 물질들이 스스로 충돌, 반응, 합성하여 새로운 물질이 나타나도 여전히 생명과 영혼은 없기에 절대 인간의 기원을 거기서 찾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처럼 창세기는 물질이 물질로 변했다는 이야기를 다루는 내용이 결코 아니다. 진화만이 그 내용을 다룬다. 진화는 물질, 생명, 영혼 이 셋을 두고 각기 그 자체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 아예 영혼은 다루지도 않는다.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 물질을 하나님과 대체했기에 물질이 우연히 변했다는 것 외에는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진화와 창조가 서로 견주어 어느 것이 옳은지 따지는 것 자체부터 아무 의미가 없다. 진화는 물질 이후만 다루지만 창조는 물질이 있기 이전의 배후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가 하나님 당신께서 너무나 정밀하고도 정확하게 계시해 놓은 그분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겠는가? 그분의 놀라운 주권과 섭리와 지혜 앞에 즉, 이 창세기 말씀 앞에 인간이 취할 태도는 둘 뿐이다. 완전히 항복하며 엎드리는 것이 그 하나이자 인간이 마땅히 또 필연적으로 보여야 할 반응이다. 아니면 제로와 방불한 진화의 확률 하나만 끝까지 붙들고서 완악하게 그분을 부인하든지 말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창세기 1:1의 ‘창조’라는 단어의 뜻은 이제 분명해졌다. 그에 따라 ‘하나님’이란 단어의 가장 핵심적인 뜻도 정해졌다. 창조주라는 것이다. 특별히 물질, 생명, 영혼을 무에서 유로 창조하신 분이다. 또 물질과 생명과 영혼을 탄생시킨 분이라면 당연히 그 셋의 보존, 성장, 운행, 쇠퇴, 종말을 주관하시는 분이다.
그럼 끝으로 살펴볼 단어는 ‘천지’(天地)다. 하늘과 땅의 전부를 의미한다. 문자적으로 전 우주 안에 있는 세상 만물이다. 나아가 눈에 보이는 물질계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도 창조하셨다는 뜻이 된다.
물론 천지라는 단어에 그런 뜻이 직접 포함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기에 당연히 영계의 영적 존재도 그분이 만드셨다. 다른 말로 사단이 창조에 관여하지 않았고 절대 그럴 수도 없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최초의 창조에는 하나님의 완벽하고도 절대적인 진선미가 반영되었다. 오직 하나님의 뜻 대로 되었고 또 그래서 그분이 심히 좋아했었다.
만약 하나님이 영계를 창조하지 않았다면 즉, 사단이 피조물이 아니라면 사단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는 뜻이 된다. 예컨대 태초부터 선과 악의 세력이 번갈아서 이겼다 졌다는 하는 장(場)이 우주라는 동양적인 음양이원론은 창조를 전면 부인하는 사상이다. 거기다 사단을 인정하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숭배하는 꼴이다.
사단은 단지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 천사가 그분을 배반하여 타락한 존재일 뿐이다. 여전히 피조물에 불과하므로 때가 되면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독생자 예수님에 의해 철저히 패배하여 그 영적인 권세를 거의 모두 다시 회수 당했지 않는가?
흥미롭게도 ‘하나님’이라는 우리말 표현이 이 창조주 개념을 가장 잘 묘사하는 것 같다. 숫자적으로 하나 즉, 한 분만 있는 분(the Oneness)이다. 세상에서 진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분이다. 창조사역을 하실 수 있는 오직 한 분이다. 어느 누구도 창조 사역을 대신 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완전하신 하나님만이 창조를 완벽하게 다 이루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를 넘어서 있고 또 그 이전에 있는 분이다. 그분이 공간을 점유하는 물체만 만든 것이 아니라 시간도 함께 창조했다고 누차 강조했다. 이제 하나님은 시공간에다 물질을 만든 위에 생명을 부여했고 특별히 인간에게는 영혼을 심어주었다. 시공간, 물체, 생명, 영혼을 초월한 분으로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다.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이기에 그분과 비슷한 존재라고는 영원토록 단 하나도 없다. 말하자면 진화는 제로가 무한대로 붙는 확률로도 즉, 아무리 장구한 세월이 흘러도 우연히 일어날 수는 절대 없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가 거주해 살고 있는 세상은 창조주 그분이 ‘바라’하여 물체를 만들고, ‘아사’로 만물을 준비한 후에, 마지막으로 인간을 ‘야찰’해서 생겨난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특성에 대해 단적으로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만세(萬歲)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이지다. 아멘.”(딤전1:17)
먼저 시간을 창조하시고 그 주인이시기에 만세의 왕이다. 시간 밖에 계시면서 영원토록 현재이신 분이 썩을 리가 없다. 또 물질이 아니라 영이시기에 그러하다. 보이지 아니한 영적 차원도 만드신 분이 인간의 육안에 보일 리도 없다. 보존과 성장과 변화와 쇠퇴와 종말이 오직 자기를 만든 창조주에게 달려 있는 모든 피조물과는 전혀 다르다. 창조주는 절대 한 분이실 뿐 아니라 스스로 자존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모든 피조물이 그분께만 존귀와 영광을 세세토록 돌려야 함도 너무나 당연하다.
그래서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약1:17) 분이다. 그림자란 빛이 비춰오는 공간에 물체로서 위치를 점유하고 있어야만 생긴다. 하나님은 빛 자체를 만드신 분으로 빛 밖에 있는 분이다. 모든 피조물은 시간이 흐를수록 썩어갈 뿐이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함이 없는 존재는 오직 그분뿐이다. 당연히 절대 썩지 않는 분이라야만 그림자가 있는 피조물에게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베풀 수 있지 않겠는가?
온전한 믿음의 출발
물질 자체는 절대로 시공간을 만들지 못한다. 이미 만들어진 시공간 안에 단지 위치만 점유할 뿐이다. 또 생명이 없는 한 결국은 썩어 없어질 뿐이다. 당연히 물질이 스스로 생명을 합성해낼 수는 없다. 그랜드케년의 바위를 보라. 아무리 웅장한들 그럴 수 있겠는가? 나아가 생명이라고 해서 스스로 지정의를 형성한 후에 사고활동을 개발해낼 수도 없다. 모든 식물을 보라. 벼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식량으로서 벼일 뿐이지 않는가?
그 무엇보다 생명이 사고활동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알 수는 없다. 사자가 아무리 자기 지정의를 이용해 먹이를 사냥해도 배부르면 잠만 잔다. 생존과 번식 외에는 관심을 갖는 것이라곤 없다. 생명에 지정의를 갖추어도 영혼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진화를 믿으니 인간의 기원을 이성적 과학적 지성적인 태도로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나 큰 착각이다. 방금 앞에서 진술한 내용 전부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그 반대를 믿는다는 뜻이 된다. 즉 물질이 시공간을 만들었고, 생명이 없어도 썩지 않을 뿐 아니라, 물질이 생명 자체도 만들었고, 그 생명이 저절로 지정의적 활동을 하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절대자란 존재를 의식하고 기도하며 예배드리기까지 되었다는 것이다. 바위가 저절로 교회에 출석하여 장로가 된 꼴이다.
요컨대 진화는 기실 진화 자체를 믿는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서두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없다는 가정을 억지로 세우려는, 아니 무조건 믿고 보자는 뜻이다. 어쩌면 창조를 믿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마치 방금 가마에서 굽혀 나온 토기가, 자기가 자기를 만들었고, 또 토기 굽는 가마도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아예 토기장이도 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과 같다. 단 장구한 세월과 우연과 우연이 겹친다면 말이다. 제로가 무한대가 붙는 확률이라도 절대로 안 일어난다고는 아무도 단언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지금 불신자를 탓하자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어차피 미혹하는 영에 묶이어 창조주를 부인하게 되어 있다. 우리 또한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나 예수 믿기 전에는 똑 같이 그랬다. 정작 문제는 신자들이 자신의 믿음을 바로 이 창조주의 놀라운 권능과 은혜에 접목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아무래도 진화는 아닌 것 같으니 창조가 옳다고 받아들인 정도의 믿음을 갖고 있다. 심지어 하나님이 진화라는 절차를 통해 만물을 창조했다는 식의 괴상한 믿음마저 등장했고 나아가 더 대접 받는 세태가 되어버렸다.
예수를 믿는 온전한 믿음은 구원 받은 이후에는, 사실은 그 전이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놀랍고도 신비한 창조의 은혜와 권능 안에서 바로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그분의 절대적 계시인 성경이 처음으로 말씀하는 구절을 온전히 이해하지 않고서 어떻게 올바른 믿음이 생길 수 있겠는가?
인간은 이 지구라는 시공간 안에 묶인 유한한 존재다. 그 수명은 칠십이요 강건해야 팔십이다. 자신이 생존 성장하기 위해선 모든 선한 것을 오직 창조주에게만 의존해야만 하는 너무나 연약한 존재다. 그럼에도 인간은 물질과 생명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혼을 그분에게서 특별히 부여받은 참으로 귀한 존재다.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인식한 인간이라면 마땅히 오직 그분께 세세토록 감사와 경배와 찬양을 돌려야만 한다. 그러면 당연히 위로부터 각양 좋은 은사와 모든 선한 것으로 채워 주신다.
하나님을 부인고선 인간의 육신과, 생명과, 영혼을 온전히 보존 성숙시킬 수 있는 길은 절대로 또 영원토록 없다. 세상에 전혀 없었고 스스로 생길 수 없었던 물질과 생명과 영혼을 창조하신 유일한 분이지 않는가? 그런 자는 자신에게 이 셋 중에 하나 내지 둘이 없다고, 쉽게 말해 동물 내지 물질일 뿐이라고 자인하는 셈이다. 요컨대 자기 안에 엄연히 있는 것들을 부인하고 어떻게 평강과 행복을 구할 수 있단 말인가?
2/15/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