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쌍(two pairs)의 창조 이야기

조회 수 473 추천 수 31 2010.02.21 22: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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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쌍(two pairs)의 창조 이야기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창1:3-5)


창조와 진화의 증거는 없다.

불신자들은 창세기 1장에 대해 이런 황당한 기록이 어디 있느냐고 반발한다. 단 6일 동안에 천하 만물을 말씀 한 마디로 다 만든다는 것이 가능이나 할 법이냐고 따진다. 특별히 하루란 해와 달이 만들어진 넷째 날 이후라야 생기는데 어떻게 첫 세 번의 창조를 시간적으로 3일이라고 표현하며 또 그렇게 밖에 걸리지 않느냐고 한다. 전혀 믿을 수 없는 가공의 설화를 가지고 신앙의 첫 출발로 삼는 기독교인들을 지능이 떨어진 저능아로 간주하기도 한다. 신자들이 정 그렇게 주장하고 싶다면 창조의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그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창세기 기사의 하루 길이가 각기 다르다고 답한다. 하나님에게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기에 그 하루는 만 24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답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신자에게만 먹히지 창조마저 부인하는 그들에겐 아무리 해명해봐야 종교적 수사에 불과해진다.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한 증거를 내어 놓으라는 것은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질문이다. 인간도 단지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 위치의 인간이 창조의 증거를 들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 뿐이다.

첫째는 하나님과 함께 창조에 동참한 경우다. 이는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능력을 가져야 하다는 뜻인데 아예 말이 안 된다. 또 현대 첨단과학으로도 기존 물질에서 생명을 지닌 세포 하나 못 만들어 내는데 아무리 하나님과 함께라도 인간이 맡을 만한 역할은 실제적으로 하나도 없다.

둘째는 최소한 하나님이 인간을 가장 먼저 만들어 창조의 전 과정을 볼 수 있게 된 경우다. 그러려면 물, 공기, 빛, 채소, 과일 등을 만들기 전에 인간부터 만들었어야 한다. 그러면 나머지 것들이 만들어지는 동안에 인간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는가? 가장 고급한 동물인 인간은 결국 성경 기록처럼, 아니 진화론도 인정하듯이, 모든 생존 환경이 구비된 다음 맨 나중에 창조되었어야만 했다.

결국 어떤 경우가 되었든 인간이 증거를 수집할만한 지각을 지니게 되는 시점은 이미 창조가 끝난 후다. 창조 자체의 증거를 댈 수는 도무지 없다. “저 총각의 부인의 이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처럼 사실상 “범주의 오차”(mistake of category)에 해당된다. 갓난아이더러 어떻게 태어났는지 말해보라는 것과 같다. 젖먹이더러 아예 임신과 출산에 대한 책을 저작해내라는 꼴이다.

간혹 그런 불신자의 부추김에 흥분해서 그럼 “진화의 확실한 증거는 있느냐?”고 반발하는 신자들도 있다. 이것도 사실 엄밀히 따지면 동일한 범주의 오차를 범하는 셈이다. 진화는 장구한 세월 동안에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미생물에서 인간까지 오게 되었다는 학설이다. 수십억 년이나 되는 기간의 모든 자료와 증거물을 제시한다는 것도 아예 불가능하다.

진화에선 또 종에서 종으로의 변화는 돌연변이로만 설명한다. 이를테면 원숭이에서 갑자기 인간으로 돌연하게 변이했다는데 그 중간 종의 증거를 대라고도 할 수 없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원숭이에서 원시인이 나타났으니까 원숭이가 가장 많은 아프리카 같은 곳에선 지금쯤은 원시인이 많이 나타나 있든지 그 흔적이라도 분명히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전혀 그렇지 않은 결정적 하자는 있다. 어쨌든 진화론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장구한 세월”과 “돌연변이”는 원천적으로 증거물의 제시 자체를 거부하는 이론이다.    

물론 진화론자들이 화석을 증거로 내세우긴 한다. 그러나 화석은 장구한 세월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임이 최근에는 서서히 밝혀졌다. 만약 한 동물이 산 채로 매몰되어 오랜 기간 퇴적물이 쌓였다면 오히려 썩어서 형체가 없어지게 된다. 순간적으로 물샐 틈 하나 없이 흙속에 파묻혀서 산소로 인한 부패작용이 봉쇄되어야만 화석이 생긴다. 화석은 오히려 노아홍수 같은 대대적인 지각 변동을 입증하는 증거물이 될 뿐이다.

결국 창조는 인간이 결코 참여할 수 없다는 면에서, 진화는 장구한 세월 전부를 입증할 수 없다는 면에서 자료와 증거물이 없다. 아예 둘 다 증거물, 자료, 실험으로 입증될 성격이 아니다. 학술적으로 따지면 둘 다 어디까지나 아직 입증되지 못한 가설(theory)일 뿐 완전히 확인된 공리(axiom)가 아니다.

그럼에도 둘 중 하나는 누가 뭐래도 완전한 진리이기에 절대로 둘 다 동시에 가설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인간을 만든 존재가 창조주 하나님이든지 단순한 물질이 그 기원이든지 둘 중 하나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것도 아담의 때부터 태양이 빛과 열을 발하는 일을 멈추는 날까지 그러하다. 반드시 하나는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이다.    

창조에 드러난 일곱 원리

그럼 대체 어느 쪽이 진리이며 또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비유컨대 범죄는 분명히 일어났는데 물증이 없는 경우와 같다. 그럼 당시 주변 정황과 주위 사람들의 증언 등으로 심증을 가지는 수밖에 없다. 확실히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범죄 증거물이 없다면 그 범죄가 반드시 일어났을만한 근거나 이유는 따져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창조 증거물을 제시하기가 애당초 불가능하다면 창세기 1장도 과학적 논문처럼 대할 수는 없고 또 그렇게 대해서도 안 된다. 자구 하나 하나에 집착해 문자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물증을 찾으려는 헛된 시도가 된다. 그보다는 기록 전체에 드러나는 창조의 원리를 참조하여 심증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 원리들은 1장 전체 기사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표현을 보면 유추할 수 있다. 모든 고대 서책이 그러하듯이 구약성경도 처음에는 구전(口傳)으로 전해내려 왔기에 외우기 쉽도록 동일한 표현들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또 반복해서 표현한다는 것은 그 내용을 강조하려는 뜻이다.    

본문으로 일부만 인용했지만 1장 전체에서 반복되는 표현들이 무엇인가? 우선 “하나님이” 라는 말이 계속 등장한다. 창조의 주체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 분 외에 그 어떤 것도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질이나 인간이 결코 인간을 만들 수 없다는 뜻이다. 필연적으로 모든 만물의 시작과 운행과 종말은 오직 그분께 달렸다. 그분은 당신의 절대적 주권과 책임 하에서 만물을 탄생, 생존, 성장, 쇠퇴, 소멸시킨다.

요컨대 그분을 떠나선 어떤 생명도 호흡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모든 생명체가 그분이 앗아가면 죽게 마련이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자기 친부모를 외면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부인하면 자기 선조가 물질에서 진화된 원숭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아무리 안락하게 평생을 마쳤어도 물질 내지 짐승의 삶을 즉, 참 인간이 아닌 삶을 살았을 뿐이다. 최대한 잘 봐주어 그 인생은 고아원에서 보낸 것과 같다.
      
둘째는 그분이 “가라사대”라고 하셨다. 말씀으로 모든 창조를 이루셨다는 것이다. 어떤 신선 같은 노인이 요술 방망이를 들고서 빛이 있으라고 큰 소리를 쳤더니 빛이 생겼다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만의 뜻과 계획을 갖고 창조했다는 것이다. 말이란 상호 의사소통(communicate)하는 기능도 있지만 그 이전에 자신의 생각을 밖으로 표출(reveal)하는 것이 더 근본적인 역할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려는 당신만의 의지와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분이 그렇게 마음먹었다면 그대로 이뤄지지 않을 리도 없다.    

그래서 세 번째로 나타나는 반복적 표현은 “그대로 되니라”이다. 하나님이 갖고 계셨던 창조 계획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완벽하게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분의 계획이라면 이미 그 자체로 완벽했을 뿐 아니라, 창조된 결과도 당연히 그러했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한다. 창조된 결과를 하나님이 스스로 평가하시고는 완전히 만족하셨다는 뜻이다. 스스로 마음먹은 그대로 완전하게 이루실 수 있는 존재는 전 우주에 하나님 한 분뿐이다. 뒤집어 말하면 다른 모든 존재는 그분의 피조물이기에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순간 자연히 모순과 왜곡과 허물과 고난이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다섯 번째로 등장하는 반복 문구는 “각기 종류대로”이다. 창조의 범위 내지 수준을 설명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더 이상 진화가 필요 없는 완벽하고도 성숙한 개체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종과 종 사이에 중간 개체가 없다는 것이다. 창조된 바로 그 당시에 이미 모든 종류가 모든 면에서 그 종류로서 완전했다.  

이를테면 인간이 원숭이에서 원시인으로 그리고 현대인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뜻이다. 맨 처음 인간이 어떤 모습이었을까? 온몸이 곰처럼 털로 뒤덮였을까? 아니다. 노아 홍수 이전에는 지구가 아주 온난했다고 한다. 불을 사용하여 부드러운 음식을 조리해 먹기까지는 시일이 좀 걸렸으므로 어금니가 더 많았고 턱이 더 강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방한(防寒)을 위한 털이 구태여 필요 없었고 옷을 만들 수 있는 지능만 있으면 되었다. 또 피라미드 같은 고대유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초기 인간들은 지능적으로 오히려 현대인을 능가했을 수 있다. 나아가 공해가 없고 스트레스가 덜해서 그 지능을 마음껏 발휘했을 것이다.  

여섯 번째는 “칭하시고”라는 말이다. 이름을 부여한 것은 모든 피조물의 전적 소유권과 주권이 하나님 당신께 있다는 뜻이다. 각각의 개체에게 피조세계에서 감당할 기능과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창조 전체에 관한 계획도 있었지만 각 개체별로도 하나님 고유의 계획과 뜻이 따로 있었음을 의미한다.

마지막 일곱 번째의 반복되는 어구는 “이는 ~째 날이니라.”고 하면서 창조의 순서를 매겼다. 시간에도 일정한 질서를 부여한 것이다. 공간을 점유하는 물체 뿐 아니라 시간도 당신의 주권 하에 있다는 뜻이다. 모든 피조물의 운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이 주관하신다. 인류 역사도 인간이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이야기(His-story)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창세기 이야기

만약 진화론자가 창세기처럼 상기 일곱 가지 원리에 적용해서 인류의 기원을 기록한다고 가정해 보자. 말하자면 인류를 생성한 주체, 방식, 사전 계획의 유무, 결과, 수준, 소유권, 시간적 차원 등등에서 진화를 진술해보자.

“영원 전부터 수많은 종류의 물질이 선재(先在)해 있었느니라. 물질들끼리 사전에 의도된 뜻과 계획이라곤 하나도 없이 그저 우연히 서로 부딪히고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저 그렇게  합성되는 가운데 아주 원시적인 아미노산이 생겨났다. 그렇게 생긴 아미노산들끼리 합쳐져 원시적 세포가 생겼다. 또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단세포 동식물이 생기고 차츰 고등 동식물로 변모 되어갔다.

그러다 수백만 년 전에 원숭이에서 돌연하게 새로운 모습으로 변한 원시인간이 마침내 나타났다. 그 원시인간은 차츰 직립 보행에 익숙해지고 여러 도구를 만들어가면서 지능이 발전됨으로써 현대인이 생겨났다. 언제 어떤 식으로 구체적으로 그 모든 변화가 진행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또 알 필요도 없다. 다만 수십억 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러서 지금 이 모습이 되었을 뿐이다.”

이 기사는 어떤 사안에 대한 너무나 단순한 서술만 있다. 그 안에 어떤 의미와 가치도 발견할 수도, 아니 부여할 수조차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물질이 우연히 변했다는 이야기뿐이기 때문이다. 물질에 어떤 궁극적 가치와 의미가 있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지 않는가?

결국 그런 변화들이 일어나는 동안에 그것을 기뻐하고 평가하고 이름 붙일 존재가 지구상에 단 하나도 없었다는 뜻이다. 바꿔 말해 인간이 나타나기 전 수십억 년 동안의 지구 상태는 허무하고도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직 약육강식의 피비린내 나는 생존 투쟁만 있었던 것이다.  

진화란 계획에 의한 완벽한 창조가 아니라 물질이 우연히 변했을 뿐이므로 아예 출발부터 무질서만 양산하게 되어 있다. 현재의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완전한 진실함, 선함, 아름다움이 생길 수는 아예 없었다는 뜻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공상과학 영화 쥬라기 공원 같이 곳곳에서 무시무시한 살육전만 횡행되는데 어떤 동식물도, 특별히 인간에게 기쁨과 만족과 평안이 있었을 리 만무하지 않는가? 그저 하루하루 죽지 않고 연명하는 것만이 지구상의 생명체가 가지는 궁극적 목적이요 가치일 뿐이다.  

하루하루가 바뀌고 계절이 순환되는 것도 사실은 우연히 된 것이다. 캘린더를 만들 필요가 없다. 시간 자체도 전혀 무의미하다. 물질이 그저 되는대로 변화되어 왔으므로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시간을 통치하는 참 주인과 역사를 이끄는 진정한 주체가 없다. 아무리 인간이 과거를 반성하며 현재에 최선을 다하고 장래 계획을 세워본들 이미 시간 자체도 우연히 생긴 것인데, 아니 물질이 만들어낸 것인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쉽게 말해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면 끝인 인생인데 매일 최선을 다해 산다는 각오와 실천이 무슨 궁극적 의미가 있는가 말이다.  

이처럼 진화론자가 기록한 인류기원사는 물질이 주체요, 물질이 우연히 움직인 결과일 뿐이다. 말하자면 지구에선 지난 수십억 년 동안 아무리 고등 생물이 등장했다 해도 결국 물질끼리 약육강식의 생존게임만 벌려온 것이다. 오직 피를 뿌리는 싸움뿐이었다. 진정한 만족과 기쁨은 아무리 눈을 닦고 봐도 없다. 그리고 그런 과정은 현재의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누가 더 물질을 풍부히 갖추어서 안락하게 사느냐를 경쟁하는 것만이 인생의 지고의 목적이 되었다. 원숭이에서 원시인, 그리고 현대인으로 겉모습만 변했지 다른 동식물을 무차별로 정복하던 싸움을 이제는 인간끼리 하고 있기는 여전하다.  
  
이제 성경 창세기 1장의 기록과 진화론이 서술한 인류기원사를 정말 솔직하게 서로 비교 평가해보자. 과연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이며 과학적 진술인가? 창조와 진화 가운데 진짜로 어느 쪽이 개연성이 높은가? 최소한 창세기 1장 기록이 너무 엉터리라서 도무지 믿지 못하겠으며 기독교 신자들은 모두 비지성적인 것 같다는 비난만은 취소해야 하지 않겠는가? 요컨대 진화의 인류기원사가 더 황당무계할 뿐 아니라 대체 그 안에서 인간이 취할 의미와 가치라곤 눈을 닦고 보아도 없지 않는가 말이다.  

창세기 1장 기록은 결코 비과학적. 비논리적, 비지성적인 가공의 설화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황당해서 못 믿겠다는 반발도 어디까지나 핑계일 뿐이다. 말로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인간을 높이 치켜세우면서도 실제 내용으로는 동식물은커녕 물질 수준밖에 안된다고 스스로 깎아내리는 짓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하나님은 무조건 부인하고 인간이 제 멋 대로 살겠다는 뜻이다.  

가장 중요한 창조의 원리

문제는 신자다. 창조의 원리를 정말 귀하게 깨달아서 실제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에 온전히 반영해야 한다. 창조의 일곱 원리 가운데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와 연결해서 신앙을 온전히 세우는 데는 아무래도 셋째와 넷째 원리, 그 중에서도 넷째인 것 같다. 창조가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완벽하게 이뤄졌고 또 그래서 그분이 아주 흡족해 하셨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놀라운 능력에 자신마저 놀라서 자화자찬 했다는 뜻이 아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능치 못할 일이 있을 수 없다.  

플라스틱 모형 비행기를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온갖 부품들을 복잡한 조립 순서대로 정확하게 따르며 완성시켰을 때는 당연히 아주 기쁘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신나는 것은 그대로 했더니 정말 모터가 작동되며 프로펠러가 돌면서 하늘로 붕 떠오를 때다. 나아가 비록 모형에 불과하지만 원격조종기로 자기가 원하는 방향과 속도로 비행기가 정확히 날면 그 기분은 말로 다 표현 못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모든 피조물들이 자기 의도대로 되어 보시기에 좋았던 것이다. 특별히 인간을 만들고 난 후에는 심히 좋았다. 모든 피조물이 처음부터 현재 보이는 모습 그대로 완벽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수정, 가감이 필요할 것 같으면 하나님이 흡족해할 리가 없다. 아니 그 이전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하자가 있을 수는 절대 없다.

따라서 오늘날 신자는 그분의 완벽한 뜻과 계획 가운데서 완벽하게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더 이상 따로 손 볼 데가 없다. 그리고 반드시 지금 그 자리, 그 모습으로 서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세상의 다른 어떤 누구와도 같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의 나와 똑 같은 자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절대 없다. 지문이 같은 자가 단 한명도 없듯이 말이다.

신자는 그래서 공장에서 대량 생산으로 찍어져 나오는 상품(merchandise)과 같은 존재가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루비똥 가방 같은 명품(premium brand)도 아니다. 비록 브랜드 제품이 일반 상품에 비해 훨씬 고가이며 모델 별로 숫자는 작아도 어쨌든 같은 제품이 꽤 된다. 세계에서 최고로 비싼 자동차가 이름도 전혀 생소한 약 250만 불짜리 스웨덴 수제품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최고의 장인들이 만든 걸작(masterpiece)이다. 그래도 일 년에 서너 대는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신자 각자는 하나님에겐 전 세계에서 오직 단 한 명뿐인 존재다. 그것도 영원토록 그러하다. 레오날드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가 오직 하나 뿐이듯이 말이다. 말하자면 신자는 하나님이 손수 빚어 만든 예술품(artwork)이다. 명품과 걸작마저 훨씬 뛰어넘는 너무나 고귀한 신분이다. 바로 그분의 자녀다. 그분을 아빠라 부를 수 있는 신분이다.

따라서 신자 각자도 자신의 탄생과 인생을 창세기 1장에 비추어 쓸 수 있어야 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OOO야 있으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 탄생한 그를 당신의 자녀라 칭하시고 그의 일생 동안 놀라운 권능과 은총으로 항상 함께 하시니라.”

반면에 불신자가 자기의 개인적인 기원에 대해 쓴다면 이미 언급한 진화론의 인류기원사와 똑같을 것이다. “태초에 선재한 물질이 아무 목적과 계획 없이 우연히 변화에 변화를 거듭해 원숭이와 원시인을 거쳐 인간으로 바뀌었다. 자기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을 기뻐한 것은 단지 육신의 부모뿐이다. 그들 또한 자기 인생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아이를 만들었으며 일생을 온전히 책임져 주지도 못한다. 평생을 그저 되는 대로 살다가 죽을 뿐이다.”

이 두 개인적 이력서를 정말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비교 평가할 수 있겠는가? 인간으로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한다면 최소한 자신의 근본에 대한 설명을 이 둘 중 하나를 확고히 선택해서 언제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인류 전체에 대한 창조와 진화 논쟁은 제쳐두고서라도 말이다.  

참 된 인생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

신자가 세상에 한 하나뿐인 예술품으로 창조되었다는 뜻은 하나님이 그 이후의 신자의 일생을 다루는 데도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두고 얼마나 애지중지 아끼며 보관했겠는가? 하나님은 신자 각자를 세상에 다른 모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양, 그래서 오직 그 신자 한 사람만 있는 양 하시고 그의 일생을 주관해 주신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해도 일대일로 만나 주시고 보호하며 인도하신다.

창조주 하나님은 절대로 광활한 우주의 저편 너머에 계시는 분이 아니다. 단순히 초월자로서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령 하나님으로 와 계신다. 그래서 우리의 눈물을 보고 한숨을 듣고 계신다. 물론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도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피할 길을 주시며 기도할 힘조차 없을 때는 성령님이 대신 간구도 해주신다.

범사를 그분이 주관하신다고 해서 일부러 어려운 일을 만들어 자신에게 매달리게 만들려는 심보는 전혀 없다. 말하자면 병 주고 약주는 분이 결코 아니다. 오직 당신의 친 자녀로 삼은 신자로 성숙하고 거룩하고 온전한 인생을 살도록 때로는 어려움을 허락하실 뿐이다.

무엇보다 당신께서 신자 각자에게 세워놓으신 온전한 계획 가운데로 반드시 이끌어 주신다. 그래서 신자가 세상에서 당신의 빛을 발하게 해주신다. 부유하나 궁핍하나, 아니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신자가 속한 공동체마다 비추이게 하신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신자를 통해서 이 땅에 확장되도록 하신다.  

바꿔 말해 인간의 진정한 자존감(self-esteem)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그것도  창세기 1장에 드러난 창조의 원리들 안에서만 온전히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로 나를 당신의 온전한 계획대로 만드셨고 또 기어이 그 계획을 완성시키는 자리에 이끄실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자존감을 어디에서 찾는가? 외모, 학력, 지성, 직업, 수입, 권세 등등에서 남들보다 뛰어날 때뿐이다. 여전히 약육강식의 틀 안에 갇혀 있다. 그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승자(winner)로서 자존감을 누릴 수 있다. 생존경쟁에서 지면 인생에서도 실패자(loser)로 전락해 자존감은 무참히 무너져 내리며 회복할 길이 없다. 실제로 최근 한 오락프로에서 키 작은 남자는 Loser라고 말한 것이 큰 화제가 되었지 않는가?  

물질이 장구한 세월 동안에 우연히 무한대의 생존경쟁을 벌리며 자신으로 바뀌었다고 믿는 자로선 당연한 결과다. 이 땅의 눈에 보이는 물질이 전부이자 인생의 실체라고 믿기에 물질을 더 차지하는 경쟁만이 인생의 승패를 가름하는 척도가 될 수밖에 없다. 또 그 경쟁의 승자만이 인생을 말할 자격이 있다.    

간혹 그런 경쟁이 스스로 느끼기에도 너무 추한 흙탕 싸움 같이 여겨지는 자칭 선각자들이 있다. 그래서 그 경쟁에서 슬며시 빠져 나와 부평초처럼 인생을 살다 말겠다고 결심한다.  구름에 달 가듯이,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살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래본들 무슨 궁극적인 의미가 있는가? 근본 사고의 틀은 자기 기원이 물질이며 물질로 인생이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절대 부인하지 않는데 말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데 말이다. 정말 문자적으로 구름과 물 같은 물질로 살뿐이다. 자기야 어떻게 생각하며 살든 객관적으로는 물질 차원에서 유일한 진리인 약육강식의 법칙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다.  

모든 신자 각자가 하나님 안에서 오직 하나 뿐인 존재라는 말은 신자끼린, 나아가 인간끼리 경쟁이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이다. 신자 간에는 winner와  loser 가 있을 수 없다.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세상에 하나 뿐인 예술품이기에 아예 경쟁이 성립 안 된다. 자신의 일생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고 또 그 계획대로 그분의 은혜와 권능으로 인도해 주시는데 다른 사람과 견주어 비교할 이유는 아예 없지 않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도 무엇인가? 하나님이 당신의 생명과 맞바꾸어서라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새로운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다. 바로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예술품임을 확신시키려는 뜻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인해서 천지만물의 주인이자 운행자이신 하나님을 아빠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릴 때에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권세가 나타난다. 세상의 어떤 악한 권세도 신자의 기도 앞에 무너지게 마련이다.

신자란 그래서 썩어질 이 땅에 대한 미련은 완전히 버리고 영생과 부활의 복락을 누릴 천국만 소망하는 삶을 살기로 그 인생의 목표가 바뀐 자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 자다. 하나님이 창조 당시에 당신의 뜻대로 되어서 심히 좋았던 상태로 이미 돌아가 있다. 그분과 정말 일대일의 친밀한 사랑을 나누며 살 수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이 땅에서 물질을 두고 인간끼리 생존 경쟁하는 틀을 벗어났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고 믿고 난 이후는 주위 사람들에게 자기가 누리고 있는 예수님의 사랑을 나눠주는 일만 하게 된다. 그래서 신자야말로 정말 순수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자다.  

예수를 믿는다는 참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해 도덕적으로 조금 선해지는 정도가 결코 아니다. 자신의 기원을 물질과 원숭이라 믿고 물질을 탐하는 생존경쟁을 하다가 인생을 마치고 말 것이냐, 인간이 과연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온전히 깨달아 참 인간답게 사느냐의 두 문제 가운데 후자를 택하여 그렇게 사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기원을 진짜로 진지하게 따지고 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겸허하게 엎드리는 것뿐이다. 그 이전에 창 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을 확신해야 함도 물론이다.

혹시 아직도 물질이 세상의 전부이자 실체라고, 그래서 자신도 물질로 시작해서 물질로 마치겠다는 고집에 사로잡혀 있다면 한 번이라도 성경이 말하는 바를 진솔하게 마음을 열고 묵상하며 읽어보라. 그러고 나서는 얼마든지 창세기 1장이 황당무계하다고 비방해도 된다. 아마도 그럴 일은 거의 없을 테니까 말이다.  

2/13/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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