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은 문화 충격이 없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동물도 낮은 수준이긴 하지만 지정의가 있으며 심지어 언어가 있어 의사소통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지정의는 오직 생존과 번식이라는 본능에 의해서만 작동되어지도록 창조 때부터 미리 프로그램화 되어 있습니다. 동물이 배가 고픈데도 몸이 아프지 않는 한 절대 스스로 굶지 않습니다. 나아가 금식하여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겠다고는 꿈도 꾸지 못합니다.
그 본능은 한 개별적 종(種)이 살 수 있는 환경과 체계에서만 한정적으로 적용되어지는 아주 단순한 차원입니다. 말의 세계, 개의 세계, 심지어 인간과 가장 닮은 원숭이의 세계도 그 생태계적 영역은 아주 좁게 제한되어 있습니다. 연어처럼 수천 마일을 주기적으로 여행하는 경우도 그들의 생존 양식은 아주 단순하며 수만 년 동안 변하지 않습니다. 연어가 헤엄쳐서 가는 그 거리는 인간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멀어도 헤엄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또 정해진 경로를 이탈하는 법도 한 번 없으며 이탈하는 순간은 바로 죽음이 기다립니다. 비록 연어가 세계 곳곳에 지역적으로 산재되어 있을지라도 그 생활양식은 어디에도 똑 같습니다.
그래서 동물에게는 특별히 복잡한 말이 필요 없습니다. 생존과 번식의 기능만 담당하면 되므로 아주 단순하고도 반복적인 소리만 하면 됩니다. 다른 동물의 세계에까지 간섭하고 영향을 주고 관리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다른 동식물의 영역과는 오직 먹이 사슬로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먹이 사슬 또한 창조주의 섭리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땅, 물, 하늘 어디에서나 다른 동식물의 세계에 영향을 주고 관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생래적(生來的)으로 광범위한 가능성을 지니고 물리적 사회적 다양한 환경에 효과적으로 적응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 어디에, 어떤 환경에 인간이 처해 있어도 나름대로 특이한 생활 방식을 개발해 잘 적응하며 그 주위 환경도 인간의 편의와 안락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잘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의 언어입니다. 에스키모는 눈에 대해 수십 가지 설명이 가능합니다. 아프리카 누어 족은 가축을 묘사하는 데 400가지 이상의 단어가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자기들이 처해 있는 환경을 정밀하게 분석하여 적응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나아가 언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출발시키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는 반드시 문화가 만들어지게 마련입니다. 문화는 인간만이 창출하고 누릴 수 있는 고유의 것으로 동물에게는 문화란 존재하지 않고 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들에겐 오직 생존과 번식만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동물세계에선 문화적 갈등(Culture Shock)이 아예 없습니다. 반면에 인간의 세계에는 다른 지역에 가면 문화적 갈등을 겪게 되는데 그것을 일으키는 가장 큰 요인이 바로 서로 다른 언어인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면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는 미국인이 아시아에 오면 당장 언어가 통하지 않아 당황합니다. 그러나 그를 따라 온 개는 여전히 개의 세계에 바로 적응할 수 있습니다. 특정한 종(種)의 한정된 영역 안에서만 적응할 수 있다는 원리는 개는 개로서의 역할만 하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충족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개의 세계에선 표현이 이상하지만 자기들 견종(犬種-ethnic group)사이에도 언어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는 세계 어디를 가도 개끼리는 얼마든지 쉽게 소통이 됩니다.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그 반대로 세계 어디서나 어떤 영역에서나 어떤 일도 다 할 수 있지만, 단 하나 언어만은 통일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하나님이 "온 지면에 흩으시고 언어를 혼잡하게“(창11:7,8) 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뜻은 통일된 단일 공동체, 말하자면 세계 제국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시 바벨탑처럼 인간 스스로 이 땅의 주인과 왕이 되어 하나님을 배척하고 대적하는 짓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지면에 흩으셨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세상에는 부국(富國)과 빈국(貧國)이 어차피 있게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민족은 복을 주고 어떤 민족은 저주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라와 인종과 지역을 따라 그 사는 형편이 서로 달라야만 그것들을 초월하여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 제국이 되면 오직 독재와 전횡과 규격화만 있으며 모든 자원이 배급제 체제로 운영되거나, 제국이 그 생산과 유통 과정 전부를 책임지므로 구태여 이웃끼리 사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바벨탑으로 인간의 언어를 혼잡케 하고 지면에 흩으신 것이 인간을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아래 인간끼리 더욱 섬기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제국이 되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관계가 실종되기 때문입니다. 부모 자식, 부부 사이, 친구 사이에도 진정한 효도, 신뢰, 우정, 사랑 등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단적인 예로 공산 독재 국가에서 아들이 부모를 고발하지 않았습니까?
나아가 언어가 통일 됩니다. 단일 언어가 되면 단일 문화가 형성됩니다. 요컨대 인간 사회가 개 같은(?) 사회로 바뀐다는 뜻입니다. 문화적 충격도 없고 언어의 장벽도 없어져 개가 전 세계 어디를 가도 개끼리 금방 통하듯이 인간도 그렇게 된다는 뜻입니다. 생활이 편리해지고 전 세계가 일일 생활권이 되어 삶의 질이 균등화 되는 것은 바람직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거대한 조직체 내지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하고 개라는 차원마저 넘어서 아예 로봇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당연히 진정한 이웃 사랑은 눈 닦고 찾아볼래야 찾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지금 같이 현저한 기술적 진보를 이루고 지구상의 모든 영역을 다스릴 수 있게 된 것이 인간이 그 수준까지 진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큰 오산입니다. 우연과 돌연변이를 통해 아메바에서 그 수많은 종과 고릴라를 거쳐 인간이 되었다고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인간 특유의 지정의를 아메바나 고릴라 같은 수준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인하는 셈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는 당신을 닮은 고급한 지정의만 주었을 뿐 아니라 아주 복잡한 음절로도 말을 할 수 있도록 동물과는 전혀 다른 특이한 인후(咽喉) 구조를 주었습니다. 세계 곳곳의 다양한 지역과 환경에 충만하고 정복하여 다스릴 수 있게 말입니다. 에스키모가 눈을 수십 가지로 표현했다는 것은 연중 내내 내리는 눈(雪을) 40 종류로 분류해 각각에 대응하여 생활할 수 있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특유의 눈 문화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문화를 만들어 눈을 정복했을 뿐 아니라, 그 정복한 결과가 문화이기도 한데 그 가장 근본 수단이 말이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현재의 인류 문명을 탄생 시킨 것은 진화가 아니라 인간의 특이한 구강구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강구조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고릴라에서 인간으로 훌쩍 뛰어 넘어 오면서 구강구조도 순간적으로 변했다는 것은 도저히 사리가 안 맞는 억지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가장 먼저 하도록 한 일이 모든 피조물에 이름을 붙이게 한 것입니다. 예컨대 눈의 종류를 분간하게 만들어 그것을 일일이 말로 표현하게 되면서 문화가 창출되었고 그 혹독한 환경의 자연도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현재 이 세대가 나아가는 방향을 보십시오. 인터넷만한 초스피드로 세계화, 지구화의 길을 나아가고 있습니다. 언어도 다시 하나로 통일되려 합니다. 각 나라와 인종 간의 문화의 차이가 없어집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십자가의 예수님은 완전히 색이바랜 옛날이야기 책의 케케묵은 주인공들이 되어 갑니다. 제 2의 바벨탑을 향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문화는 전혀 창출하지 못하고 인간의 문화만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생활이 편리해지고 풍족해져 가는데도 사람들은 오히려 더 불안해합니다. 하나님과 자꾸 더 멀어져 가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일 따름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개 같은 생활이 더 좋다고 합니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유일한 길은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뜻에 맞는 문화를 만들어 나갈 때뿐입니다.
5/21/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