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았는가?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6-28)
자살을 가장 많이 하는 직업은?
최근 한국 최고명문대학 출신의 촉망 받던 한 젊은 남자 탤런트의 자살은 여러모로 큰 충격을 불러왔습니다. 방송일보다 개인 사업을 무리하게 벌이다 거액의 사채를 끌어다 대었고 끝내는 빚 독촉을 견디지 못한 것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들에게 피해가 미치지 않게 하려는 착한 심성을 지녔음에도, 사업 실패와 주위 사람에게 도움을 거절당한 것으로 인해 자존심에 아주 큰 상처가 났던 것 같습니다.
세계적으로 자살 율이 가장 높은 직업의 종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얼핏 생각되는 대로 빚 독촉에 쪼들리는 사업가나 강제로 명퇴 당한 가장(家長)일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학생, 그것도 젊디젊은 대학생들입니다. 입시 경쟁에 쪼들린 고3의 자살이 많은 한국적 특수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공통되는 현상이 그렇습니다.
대학생이란 열심히 공부하여 목표했던 학과에 이미 입학해 인생의 푸른 꿈을 한창 키울 시기입니다. 순수한 이상(理想)에 사로 잡혀 뭔가 세상을 바꾸려는 뜻을 품습니다. 지정의와 육체적 능력도 최고조에 달해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인류를 변혁시킬 거창한 일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자기 인생과 또 앞으로 결혼해 가꿔나갈 가정에 대한 낙관적 긍정적 소망으로 가득 차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때에 자살자가 가장 많다고 합니다. 뭔가 생각해 볼 여지가 있지 않습니까? 그 동안에는 입시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이제 자기 꿈을 펼쳐 볼 시기가 되자 현실과 꿈을 진지하게 비교해 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자기 앞 길이 녹녹치 않다는 사실을 여실히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인생사의 이런저런 현실적 장애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인생은 어느 누구에게도, 특별히 공부를 많이 했든 적게 했든, 편안하지만 않습니다. 피하려 해야 도무지 피할 수 없는 험로가 곳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와 그에 따르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은 누구나 겪으며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젊은 대학생이 평생 소망을 자기 생명과도 바꿀 정도라면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열심히 추구해본들 그 소망이 달성될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세상은 그만큼 썩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끼리 또 민족과 나라들이 크고 작은 일들로 경쟁, 시기, 분열, 분쟁, 분노, 저주하며 싸우는 현장을 실제로 보게 되니까 자기의 소망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과장된 설명이 결코 아님을 우리 자신의 지난 삶을 회상해 보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지 않습니까? 어렸을 적, 아니 청년기 때에 품었던 희망과 이상을 실현해냈다고 자부할 자가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위인은 못 되었더라도 최소한 자기 가정이라도 아무 후회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꾸몄습니까? 백이면 백 그 답은 “No!”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뭣 때문에 지금껏 그렇게 고생하며 살았던 것입니까? 물론 그런 고생 가운데도 보람차고 기뻤던 일도 많았으니 그것으로 자족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데 뭐!”, 아니면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인데 뭐 복잡하게 따지느냐?”라고 반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 모두 솔직하고도 심각하게 따져 보길 원합니다. 다시 청년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이번에야 말로 정신 바짝 차리고 전혀 게으름 부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여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의미 있고 성공한 인생을 살 자신이 있습니까? 이에 대한 대답 또한 십중팔구는 “아니” 내지는 “글쎄”가 아니겠습니까? 그럼 논리적으로 어떤 결론에 이릅니까? 내 자신의 노력과 열심의 부족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장애가 모든 인생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앞에서 대학생들이 자기 이상과 현실 여건의 필연적 충돌 때문에 자살율이 높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정밀한 보충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아직 자기 이상을 구체적으로 펼쳐 보지도 않았습니다. 한창 젊을 때에 시도도 해보지 않고 미리 포기한다는 것은 가장 개연성이 적은 이야기입니다. 청년이란 무슨 일이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법이지 않습니까? 또 대학생 신분으로 소망을 펼쳐본들 얼마나 실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 보다는 대학 시절은 인간이라는 존재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가장 심각하게 고민해 볼 때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그 해답을 찾지 못하며 또 그로 인해 내면의 참 된 평강이 도무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한 것입니다. 앞으로 만족할 만한 답을 구할 가능성 또한 거의 없으리라는 것도 깨달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이상을 실현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원을 넘어서, 인생이 과연 살아 볼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해답마저 구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니 인생에는 아예 그런 가치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다른 말로 그들은 한 번 더 인생을 살 수 있다 해도 도무지 행복할 자신이 없다는, 우리 모두 심정적으로 동의한 그대로, 인생의 근본적 장애 때문에 자살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인생에 아무 의미를 찾지 못한 것입니다. 대학 시절을 제외하고는 현실적 제약, 즉 먹고 사는 일에 바빠 인생의 의미를 진지하게 탐구할 여력이 없습니다. 최고조에 오른 지성을 동원해 가장 자유롭게 인생을 반추할 수 있는 시기에 자살이 가장 많다는 사실은 이 설명 말고는 해명이 되지 않습니다.
정상에서 발견한 것은?
윔블던 테니스를 사상 최연소로 우승한 독일의 보리스 베커 선수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두 번이나 윔블던 대회를 휩쓸었으며 그 중 한 번은 최연소 선수로 이룬 것이다. 나는 부자였다. 필요한 건 돈이든 자동차든 여자든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들이 나의 행복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나는 내적 평안을 갖지 못했다. 나는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가 마약에까지 손을 댄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어떤 분야든 최고 정상(頂上)에 오른 사람들이 실제 발견하는 것은 정상이 텅텅 비어있다는 사실 뿐입니다. 오히려 정상에 오르기 전부터 정상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미리 아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물론 정상으로 올라가는 과정조차 덧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많은 보람과 기쁨이 따릅니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면 차지할 것이라고 가슴 설레며 기대했던 것에 비해 실제 감격은 너무 작고, 대부분의 경우 덤덤하거나 허무하기까지 하며, 아주 잠깐뿐이라는 뜻입니다.
정상에 오르지 못한 일반인이라고 다를 바 하나 없습니다. 때로 밤하늘에 총총히 박힌 아름다운 별자리들을 보면 참으로 신비롭게 여겨집니다. 특정한 별마다 자신이나 주위 사람의 이름을 붙이며 이야기 거리도 만들어 봅니다. 그러나 밤하늘이 언제나 멋지고 경이로운 것만은 아닙니다. 도무지 도달할 수 없는 너무나 먼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또 지금 보는 별 가운데 이미 없어진 별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불현듯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또 나라는 존재가 과연 이 우주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가 과연 얼마나 되는가에 생각이 미치면, 그래서 아주 작은 별 지구상에서조차 먼지에 불과하며 잠시 왔다가 아무 흔적 없이 곧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 앞에 갑자기 우울해지지 않습니까?
한국의 가을 하늘은 투명하고 높아서 아주 아름답습니다. 산과 들에 오곡 백화가 무르익고 말도 통통히 살찌는 계절입니다. 추석에 흩어졌던 가족들이 모여 풍성한 결실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너무나 선한 풍습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친척들 간에 흥겹게 보낸 잔치가 끝나면 아니 그런 가운데도 뭔가 부족한 부분이 있음을 결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꽉 막힌 고속도로를 오가는 고생길이나, 친척끼리 화투치다 돈 몇 푼 때문에 말다툼 한 일이나, 오랜 만에 정을 나눈다는 것이 술 취한 김에 평소 불만과 원망으로 형제끼리 대판 싸운 일들 때문이 아닙니다. 많은 시간과 비용을 쓰고 또 쓸데없는 다툼이 있더라도 오랜만에 형제 친척끼리 모여 교분을 나누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각자 자신의 내면에 온전한 만족과 평강이 있느냐를 따져 보자는 뜻입니다.
특별히 추석에는 누구라 할 것 없이 선조의 산소를 찾아가 차례를 지냅니다. 거기서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인생의 절대 진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평생을 바친 수고의 결과가, 말하자면 각자 나름대로 오른 정상이 바로 썩어 없어지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현실적으로 가장 풍성한 계절에 마음은 그 반대로 삶의 허무를 느끼며 텅 비워집니다. 인간의 결국이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엄염한 사실 앞에 겸손해지지 않을 자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무덤 앞에선 누구라도 자연히 경건해질 수밖에 없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어떻습니까? 자식들 모두 자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잘 살고 있고 가족끼리 화목하며 본인 사업도 승승장구 합니다. 기쁨과 감사만 넘치며 활기차고 충만한 나날의 연속입니다. 매사가 형통하여 걱정거리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그런 자에게도 아무 예고 없이, 그것도 따스한 햇볕이 쬐이는 봄날 오후에, 우울증이 찾아오는 것은 과연 무슨 연유입니까?
단순히 움켜쥔 행복을 놓칠 수도 있다는 불안과는 종류가 다릅니다. 따뜻한 햇볕에 잠시 정신적 긴장이 풀린 것도 아닙니다. 스쳐 지나가는 생각으로라도, 말하자면 자기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뭔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비어 있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과연 인생이 이런 것으로 전부인가라는 의아심이 고개를 쳐들며 동시에 아직도 전혀 온전하게 이룬 것이 없다는 결핍감이 따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아 부자들이 몰려 있는 올란도와 샌디에고의 자살율이 제일 높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구체적 상황은 다르지만 이런 비슷한 체험을 하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인생이 덧없이 여겨지는 이유 또한 무엇입니까? 성취한 업적이 적어서가 아닙니다. 육체적 기력의 쇠잔 때문도 아니며, 현실적 형통이나 환난과도 무관하고, 감정적 충만이나 피폐와도 직접적 연관이 없으며, 도덕적 의로움이나 죄악과도 관계없습니다. 어려서부터 뭔지 모르지만 심령 깊숙한 곳이 완전히 채워지지 않아 부족하다는 느낌이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계속해서 생겼다 지워지곤 했던 체험들이 쌓인 결과입니다.
밑 빠진 독 같은 인생
만사형통해 현실적 염려 하나 없는데도 인생에 회의가 든다는 사실은 그 원인이 세상에 귀속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추석처럼 가장 풍성하고 화목한 계절에, 특별히 조상의 산소 앞에서 저절로 겸손해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어도 죽음은 절대 해결할 수 없는 피안의 영역임을 자각함으로 생기는 무력감이지 않습니까?
그 무력감은 바꿔 말해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 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에 오는 곤혹함입니다. 이 땅에 출생하고 또 이 땅을 떠나는 일은 인간 의지가 개입할 여지라고는 없습니다. 출발과 종말을 스스로 관할하지 못하는데, 아니 최소한 정확이 어디인지조차 모르면서 그 둘 사이에 끼인 중간과정에서 참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생각 아닙니까? 평생토록 인간 내면에 의아심과 부족함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진짜 이유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무능함, 부족함, 갈급함 등을 조금이나마 일단 깨닫게 되면 정상적인 인간의 경우 어떻게 하면 그 공백을 채울 수 있는지 궁금해야 하고 또 채우려 노력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정말로 게으른 자입니다. 한 번뿐인 이 짧은 인생을 그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셈입니다. 인간이 정말 우연히 물질에서 진화되었다면, 그래서 지금도 물질에 불과한 존재라면 구태여 그 인생에, 아니 추석에조차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 젊은 탤런트의 자살에 괜히 마음 아파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차피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인데 빚에 쪼들려 사느니 일찍 죽는 것이 더 똑똑한 짓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 젊은 탤런트의 자살은 돈 문제가 객관적 이유이지만, 그 이전에 틀림없이 인생의 허무감을 도저히 메울 수 없었음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정말 인생의 참 의미를 발견했다면 매일 쪼들리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인생을 붙드는 쪽으로 택했을 것 아닙니까? 도대체 내가 지금 뭐 때문에 사는지 확신이 전혀 서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등바등 노력해 돈을 갚고 사업이 궤도에 오른들 과연 내가 행복하리라 장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가 남겨둔 아내와 가족들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 지극한 사랑과는 별도로 자신의 존재 안에 있는 근본적 결핍감을 채울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예외 없이 아무리 형통해도 심령 깊숙이 부족감을 느낀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물질이 우연히 진화되어선 절대 그런 현상이 생길 수 없습니다. 인간이 지어지기를 그렇게 지어졌다는 뜻입니다. 파스칼이 말하듯이 인간 내면에는 하나님이 채우지 않으면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지금 어떻게 말합니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을 닮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처럼 눈 코 입이 뚫리고 사지가 달린, 말하자면 휜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신선 같은 모습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과 연관해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에게 하나님 당신의 뜻에 맞추어 이 땅을 거룩하고도 아름답게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당신께서 이 땅을 다스리지만 그 다스림의 책임을 인간에게 위임시켜서 실질적으로는 인간더러 다스리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어떻게 만들었어야 합니까? 가장 먼저 당신과 서로 교통(交通)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 뜻대로 자신의 인생을 살고 이웃과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동식물과는 전혀 다르게 인간에게만은 직접 당신의 숨을 불어 넣었습니다. 지정의 외에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영을 부여한 것입니다. 인간 내면의 한 부분은 하나님의 영이 항상 차있도록 한 것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모든 피조물 중에 인간만이 절대자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그분께 기도하고 경배할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기도하고 경배하는 것은 인간만이 누리는 신성한 임무이자 아주 특별한 축복이기에, 그러지 않는 자는 하나님 뜻 안에선 온전한 인간이 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최초의 인간은 그 능력과 특권을 자기 멋대로 사용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기 싫었습니다. 무엇이든 자기 마음먹은 대로 하고 싶었습니다. 특별히 먹고 마시고 입는 일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원했습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자기 자존심을 채워주는 일에 탐스런 모든 것들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차지하려 덤벼든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 일에 도움을 준다면 찾고 그렇지 않으면 가차 없이 배반, 아니 저주까지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당연히 인간의 속에 채워져 있던 하나님의 영은 소멸되고 그 자리에 사단의 영이 차지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사단으로선 인간을 구태여 귀신들린 무당처럼 자신의 직접적인 하수인으로 부려 먹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자신의 삶의 목표를 눈에 보이는 먹고 마실 것에만 집중하게 된 인간은 그냥 가만 두어도 하나님을 찾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빤히 알기 때문입니다. 간혹 인간이 하나님을 한 번 찾아볼까 마음먹을 때만 세상의 환난이나 형통을 눈앞에 둠으로써 그 마음을 현혹시키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든 인간의 상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무리 형통해도 마음 한 구석에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이 생겨버렸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 하나님이 한탄 하신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2:13) 인간의 평소에 느끼는 부족감을 오히려 하나님이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을 지으시고 지금도 다스리는 당신이기에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너무나 정확하게 아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이 진단은 불신자를 포함해 어느 누구도 쉽게, 아니 절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남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정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았던 자를 비롯해서 자살의 충동을 단 한 번이라도, 스쳐지나 가는 생각으로라도, 느껴보지 않은 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최소한 인생의 허무에 대해 뼈저린 회의를 누구나 가져 보았을 것입니다. 물질에서 우연히 진화된 물질적 존재가 자살의 충동이나 허무감을 어떻게 느낄 수 있습니까? 아예 말도 되지 않는 것 아닙니까?
정상이 비워져 있다면?
그럼 인간에게 아무 소망이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소망은 너무나 간단하며 아주 가까이 바로 곁에 있습니다. 지금도 다른 웅덩이를 파면서 물을 채우려고 아등바등 되는 인간을 너무나 불쌍히 여기시는 창조주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내 속에 정말 세상의 어느 것으로도 채울 수 없지만 그분만으로 채워지는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분께 정말 무릎 꿇고 지난 세월의 우물 파는 일은 허사였으니 당장 중지하겠다고 실토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세상의 여러 종교 중에 하나를 택해서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마다 교회 나와 예배보고 헌금 드리며 십계명을 지키려 노력하고 이웃에 사랑을 베풀려 훈련하는 것은 신앙의 결과적 모습일 뿐입니다. 그런 외적 모습만으로 기독교 신앙도 다른 종교와 동일하다고 여겨선 안 됩니다.
성경은 첫 마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선언합니다. 특별히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인간이 정말로 인간답게 살라면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벗어나선 아무리 살아도 가슴 속에 텅 빈 것을 채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 이후의 인간들은 이미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로 떨어진지라 스스로 그분을 찾아갈 능력을 잃었습니다. 아니 그럴 마음조차 없어졌습니다. 하나님 믿는다고 먹을 것이 생기느냐 차라리 내 주먹을 믿고 말겠다고 큰소리칩니다. 세상에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데 혈안이 되어 있으면서도, 남들에게 큰 잘못을 한 것 없다는 한 가지 핑계만으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울 것 하나 없다고 고개를 쳐듭니다.
인간의 그런 교만과 완악함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정말 이름 없는 한 시골 마을의 목수로 이 땅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애통해 하는 자의 한숨과 눈물을 지우셨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면서까지 다른 우물을 파고 있는 인간을 안타까이 여기며 사랑하셨습니다. 또 부활하셔서 당신의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모든 죄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심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타적 사랑의 최고의 모범을 보이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인간 중에도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자 있습니다. 부활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말씀 한 마디로 죽은 자도 살리고 폭풍우도 잠재우려 오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 당신으로 오신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밖에 계시며 우주 만물을 지으신 분이 인간의 한계 안으로 자신을 축소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고통과 시험을 직접 체험하시고 그 고통과 허물과 죄악을 몸소 짊어지셨던 것입니다. 항상 허무함과 갈급함으로 방황하는 인간더러 십자가를 보고 충만케 해주실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고 간절히 호소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인간과 만물을 만드신 후에 이 땅의 슬픔과 고난과 죄악 가운데 특별히 죽음에 그냥 버려두신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모든 인간더러 알게 하시려는 뜻입니다. 인간은 절대 우주에 그냥 방치된 존재가 아님을 제발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은 물질에서 우연히 진화된 물질적이며 한시적 고등동물은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려는 뜻입니다.
인간이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한 위대한 능력을 가진 초인이 벌린 매직 쇼에 불과해집니다. 진화를 믿는 자들에게 그분이 아무 의미가 없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인간들이 자기를 만들어준 그 분, 다른 말로 낳아 준 부모마저 외면하고 아니 저주까지 하며 제 멋대로 살고 있는 모습을 도저히 그냥 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당신과 원수 된 인간마저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든 세대 인간들이 확인할 수 있도록 인간 역사 안에 당신이 직접 드러내 보인 사건입니다.
인간이 까닭 모르게 느끼는 영적 결핍감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그 내면이 채워지지 않으면 절대 해소되지 않습니다. 천하의 탕아로 지내면서도 출세 가도가 눈앞에 탄탄히 펼쳐졌던 어그스틴에게도 세상 모든 것을 다 쥐어도 내면의 그 부족감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도 결국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 꿇으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만드셨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게 될 때까지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인간이 참 인간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짐승과 방불하다가 이제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바뀌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을 갈등하기에, 아니 스스로 전혀 조정 못하기에, 그 중간 과정 전부를 하나님의 의로운 손 안에 맡기는 것입니다. 동물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기도하는 것 봤습니까? 아니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이라도 합니까? 인간은 다르지 않습니까? 추석에 차례 지내고 가족끼리 모여 화목하게 지내지 않습니까?
만약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거부하면 어떻게 됩니까? 크게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지금과 똑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단 하나 인생의 참 기쁨과 진정한 의미는 평생을 두고 찾지 못합니다. 요컨대 과연 인생이 이것으로 전부인가라는 의아심을 죽을 때까지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물론 수시로 불현듯 생기는 자살하고 싶은 충동도 지울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해도 충만히 채워지지 않는 내면을 갖고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는 것이 오히려 바보이지 않습니까?
지금 기독교라는 종교가 가르치는 어떤 관념적 원리를 추구하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자살하고 싶은 충동이 불현듯 일어나는 것이 인간의 실존적 체험이듯이, 한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완전히 항복하는 일도 분명한 실존적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자신을 낮추어 심령의 결핍감을 예수님 앞에서 겸허히 인정하면서 스스로는 아무래도 그곳을 채울 수 없으니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자신을 이 사망의 몸에서 구해달라고 진심으로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의 영이 그곳을 채워주십니다. 어거스틴처럼 비로소 그분의 품 안에서 참된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진짜로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해주십니다.
사람들이 그 탤런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이유는 각양각색일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따져보면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예수 밖에 있는 자로선 전혀 남의 일 같지 않고 바로 자기 일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자기가 그런 처지에 빠졌더라도, 아니 지금의 내 처지와 비슷한데도 나는 감히 용기가 없어서 못한 일을 그가 해냈기에 마음 한 구석에는 부럽기까지 할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 믿는 신자가 보는 관점은 전혀 다릅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제대로 받아 들였다면 절대 자살하지 않았으리라 확신하기에 너무나 안타깝게 여겨집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인생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귀한지 미처 몰랐던 것이 참으로 아깝기 그지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께 기도하고 경배할 수 있는 인생이 정말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모르니까, 가짜 우물만 파다가 스스로 그 우물파기마저 그만 둔 것인지라 왜 주위에서 예수부터 소개해 주지 않았는지 통분할 정도입니다. 그의 바로 곁에 예수님은 언제나 서 계셨고 그 또한 주님을 겸손히 바라보기만 해도 되었는데 말입니다.
지금 당신의 상태는 솔직히 어떠합니까? 인생에 충만한 의미와 기쁨을 체험합니까? 그래서 전혀 후회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만약 예수를 모르고도 그렇다고 말한다면, 속에 있는 진짜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는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 우연히 진화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분의 품 안으로 돌아가지 않는 인생은 겉으로 아무리 화려하고 풍성해 보여도 가면으로 치장한 헛된 인생일 뿐입니다. 그 거짓은 죽음이 닥치면 금방 탄로 나기 마련인데도 끝까지 가면을 벗지 않으려 드니 헛되고 헛되며 어리석기까지 하다못해 너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9/15/2008
목사님 너무나 명문입니다
대학생으로서 그리고 성도로서 너무나 공감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