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8:17-19 하나님의 보고를 받고 있는가?

조회 수 564 추천 수 12 2009.09.09 00:19:46
운영자 *.108.165.77
하나님의 보고를 받고 있는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18:17-19)


하나님은 당신께서 하려는 일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운 아브라함에게 숨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것도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려 가시는 도중에 일부러 그에게 들린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간인 그에게 사전에 보고를 하고 어떤 일을 수행한 셈입니다. 물론 그의 조카 롯을 배려한 조치이긴 하지만 아주 대단한 일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시점이 흥미롭습니다. 그가 고귀한 아비라는 아브람 대신에 열국의 아비라는 아브라함으로 개명을 하고 하나님의 언약에 온전히 동참한 징표로 할례를 한 직후였습니다. 열국의 아비로 삼는다는 것은 그를 통해 인류 역사를 이뤄나가겠다는 뜻이므로 어쩌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미리 통보해주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 뜻을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고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하기에 오늘날의 신자 또한 열국의 아비가 되어야 합니다. 바꿔 말해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사전에 보고 받을 수 있는 신분이 된 셈입니다. 신자를 통해 천한 만민이 복을 받고 인류 역사가 거룩하게 진행되어져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 같은 곳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최소한 그런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전 통보는 받아야 합니다.

우리와 크게 연관이 없는 일인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전설이나 동화의 주인공처럼 위대한 천재나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우상숭배를 했었고 마누라를 동생이라고 두 번이나 속여 팔아넘겼으며 여자들에게 휘둘린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만 살아계신 하나님의 실제적인 보호와 인도를 받았을 뿐입니다. 바꿔 말해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세례를 받은 신자라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사전 보고를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에게 보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보고라고 표현하니까 괜히 불경하게 느껴질 뿐인데,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어떤 형태로든 알게 해주십니다. 신자가 왜 기도하고 말씀을 봅니까? 그분의 자신을 향한 뜻과 계획을 알고자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신자로 알게 해준다는 의미가 말하자면 보고 아닙니까? 나아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는다는 것이 바로 그분의 계획과 뜻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 즉 역사가 자신을 통해 진행된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현대 기독교의 문제는 신자들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로 열국의 아비가 되라고는, 아니 세례를 받는 순간 이미 그렇게 되었다고 아예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례로 여호와의 언약에 동참했다는 것이 그로 인해 주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며 또 그와 그 자식들로 의와 공도로 행하게 하려는 목적임을 알지 못합니다. 당연히 신자들은 그저 자기와 가족만 복 받으려 들지 열국의 아비가 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인류 역사가 자신을 통해 진행되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합니다.    

교회 안에서 이뤄지는 사역도 어떻게 하면 신자가 개인적 안위와 형통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는지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경건을 훈련하고 영성을 개발하는 사역마저 엄밀히 따져 보면 그 지향점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이 땅과 이 세대를 향한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관심이 거의 없습니다. 가르치는 자부터 그러하니까 신자들은 사실 책임이 없습니다.

단적인 표현으로 하나님 혼자서 역사를 꾸려 가느라 고군분투하고 있는 셈입니다. 곳곳에 소돔과 고모라가 번창하고 있어도 하늘로 유황불이 떨어졌다는 소식은 전무합니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자가, 심지어 곳곳에 소돔과 고모라가 있다고 사실대로 말하는 자마저 찾기 힘듭니다. 교회마다 드려지는 예배는 신자 개인의 감정적, 심리적, 현실적 만족을 채워주기에 급급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만족’이 아니라 ‘일시적인 만족감’으로 마취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어떤 것입니까? 신자에게 바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로마서는 11장까지 십자가 복음의 내용을 설명한 후에 12장부터는 복음 안에 들어온 신자가 행해야 할 일에 대해 말합니다. 따라서 ‘그러므로’는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 받았으므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자라면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도록 자기 몸으로 산 제사를, 즉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 전부를 그분의 뜻에 맞추어 헌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론 무엇보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려면 마음을 새롭게 해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말했듯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해 의와 공도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선하고 온전한 뜻을 분별하는 것도 그가 하나님의 통보를 받았듯이 기도와 말씀으로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자신과 가족의 안위와 형통을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추구하는 것입니다. 교회마저 신자에게 그 일만 제공하고 있다면 “무슨 수” 가운데 “하나님의 수”를 포함시켰다 뿐이지 내용적으로 하나 다를 것 없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는데 이 세대를 본받고 있습니다. 참으로 웃기고 기가 찰 노릇입니다. 신자의 인생의 목적이 불신자와 똑 같고 그 수단만 다르지 않습니까? 현대판 도적이 최신 전자 장비로 감쪽같이 훔쳤으니 구식 도적을 본받지 않았다고 우기는 꼴입니다.

본받지 않아야 할 내용은 나쁜 점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려면 당연히 이 세대의 나쁜 점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안위와 형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로 인해 서로 경쟁, 시기, 질투, 분쟁하고 그 과정에서 이웃에게 고통과 실패를 안겨준다면 나쁜 것입니다. 나아가 신자의 경우는 그 일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릴 수 없기 때문에 잘못입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자신의 주인으로 섬길 수는 결코 없습니다.

이 세대를 둘러보십시오. 죄와 악이 흘러넘치고 썩어서 그 냄새가 진동합니다. 예컨대 소돔과 고모라의 때처럼 동성애가 버젓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누리를 수 있는 더 고상한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악이 선이라고 큰소리치는데도 제대로 반발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단에서조차 죄와 심판에 대해 설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첫 설교가, 아니 지상사역 내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다”고 설교했음에도 그분의 도를 가르친다는 교회가 그러합니다.  

바로 현 세대를 두고 성경이 이미 예언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1-5)

이 예언이 어느 세대에게나 다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인간이 자기와 돈을 사랑한 것은 항상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과 자기를 지금만큼 극도로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인생에서 오직 그것만이 목표가 되는 바람에 다른 모든 것은 깽판을 쳐도 좋다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부모를 거역하고 참소하고 절제하지 못하고 사나워지고 조급해진 것 등은 분명 오늘 날의 특징이지 이전 세대, 아니 우리 부모 세대만 해도 없었던 일이지 않습니까?  

특별히 주목할 것은 원통함을 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의 흐름은 그 원통함을 교회가 나서서 풀어주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에 잘못은 결코 없지만 그것만 하려고 해선 분명 잘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작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두고도 경고하고 있지 않습니까?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능력이 없다”고 말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내적 치유에 치중하여 사람들이 위로 받는 것이 경건의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모양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그보다 먼저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 세대야말로 말세이며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부터 해야 합니다. 회개하라고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 특별히 신자들부터 천하 만민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나눠주지 못해 그분의 거룩한 역사를 담당하지 않고 있는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열국의 아비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경건의 능력입니다.  

신자의 주위에 하나님의 계시는, 아니 당신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신자에게 보고하는 것은 지금은 더 넘쳐나고 있습니다. 살아계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이 당신께서 꼭 하셔야 할 일에 결코 등한히 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믿음을 가진, 아니 상식을 가진 신자라면 이 세대에서 본받지 말아야 할 나쁜 점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또 그것들이 넘쳐나면 어떻게 되리라는 것쯤은 성경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신자라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없다는 것은 강단에서 그런 경고가 실종되는 바람에 멀쩡한 신자들의 눈과 귀와 생각마저 이 세대에 물들어 마비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역자를 필두로 신자가 이 세대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도처에 소돔과 고모라가 있다는 사실 만이라도 외치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듣든지 말든지 간에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때에도 롯 한 명 뿐이었지 않습니까? 당장에는 그의 세대로부터 아주 이상한 놈 취급을 받았지만 그 혼자만이 생명을 구했음도 분명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2/20/2008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창18:17-19 하나님의 보고를 받고 있는가? 운영자 2009-09-09 564
50 창17:11,12 진정 세례 받은 신자인가? 운영자 2009-09-09 495
49 창17:5 신자로 창씨개명을 했는가? 운영자 2009-09-08 478
48 창17:1 하나님 앞에 완전한가? 운영자 2009-09-08 531
47 창16:7-10 누구를 감찰하시는가? 운영자 2009-09-08 676
46 창15:7,8 징조 대신 보증을 받아라. 운영자 2009-09-08 494
45 창15:4-6 참 믿음의 본질 운영자 2009-09-08 512
44 창15:2,3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운영자 2009-09-08 493
43 창15:1 아브람이 정작 두려워했던 까닭은? 운영자 2009-09-08 562
42 창14:23,24 믿음을 키우려 들지 말라. 운영자 2009-09-08 674
41 창14:21-24 아브람의 절반의 성공 운영자 2009-09-08 448
40 창13:6-8 최초의 사회개혁자 아브람 운영자 2009-09-08 482
39 창13:3,4 온전한 믿음의 기도 운영자 2009-09-08 543
38 창12:5 참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운영자 2009-09-08 537
37 창12:4 동행(同行)이냐 선행(先行)이냐? 운영자 2009-09-08 523
36 창12:3 믿음의 후손이 되어 있는가? 운영자 2009-09-08 656
35 창12;2 파이프인가? 컵인가? (2) 운영자 2009-09-08 573
34 창12;2 파이프인가? 컵인가? (1) 운영자 2009-09-08 602
33 창12:1 예수보다 사단의 때를 보는 신자 운영자 2009-09-08 494
32 창12:1 더러움을 실감하는가? 운영자 2009-09-08 515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