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여기 계셨더면(2)

조회 수 187 추천 수 10 2011.07.02 04:28:43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2)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11:21-24)


신통력이 넘치는 예수님

앞선 글에서 시간의 주인인 주님만이 당신을 믿는 자를 영원에서 영원 즉, 영생으로 이끌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말로 신자의 일생은 이미 보장되어 있는 천국 영광을 미리 맛보는 여정인 것입니다. 또 엎질러진 물 같은 신자 인생의 실패도 과거의 시간마저 주관할 수 있는 주님이기에 원상태로 혹은 그보다 더 좋게 바로 잡아주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와 마리아가 똑 같이 쏟아낸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이라는 불평 아닌 불평에는 공간 개념만 강조되었습니다. 문맥상 "나흘 전에 계셨더면"이라는 뜻도 분명  있지만 말로는 '여기'라고만 했습니다. 나사로가 중병에 걸려 신음하는 바로 그 현장에 주님이 부재(不在)했던 사실을 크게 아쉬워 한 것입니다.

이를 두고 그녀들에게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것으로 이해하면 큰 오류입니다. 당시는 주님이 성육신하여 인자의 모습으로 실제로 와계셨습니다. 그녀들로선 직접 대면해서 말하고 감정을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인간 대 인간으로 실제로 만난 주님뿐이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 계시지 않으면 그분은 부재한 것으로밖에 여길 수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주님은 하늘 보좌에 계시고 세계 어디의 어떤 상황에 처한 여느 신자라도 성령으로 교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아직까지는 자기들이 만나고 있는 그분이 하나님 본체이자 구세주라는 사실에 대한 온전한 확신도 없었습니다. 그저 예루살렘과 유대와 갈릴리를 오가는 랍비이자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을 드러내는 선지자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어땠습니까? 주님은 나사로가 신음하는 그 침상 즉, '여기'에 분명히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기독교 교리에 따른 객관적 진술이 아닙니다. 성경 본문이 그렇다고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14,15절)

예수님은 처음 병들었다는 기별을 받은 후 아직 사망 통보를 받지 않았고 또 그 집에 가보지 않아서 나사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랐는데도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멀리 떨어져서도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과, 틀림없이 그 시간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점쟁이처럼 신통력을 발휘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그런 정도의 능력은 인간에게는 몰라도 하나님이신 주님께는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두 자매는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 나사로가 죽어가는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 계시지 않았던 것을 한탄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조금만 일찍 예수님께 기별을 보내어 빨리 모셨으면 얼마든지 더 살 수 있었는데 젊은 나이에 요절을 했으니 말입니다. 아마도 만성병이 아니라 급성 질환에 걸려 손쓸 틈도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시간 그 장소에 일어났던 일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바로 공간의 주인이기도 되기 때문입니다. 재매들의 '여기'는 바로 주님의 '거기'였습니다. 모든 공간에 그분의 권능과 은혜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천하 만물의 주인 되시려면 당연히 천하 만물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의 전부에 그분의 숨결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야 합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되어져 가는 모든 일들을 당신께서 세밀히 주관하고 계셨습니다. 단순히 나사로의 살고 죽음만 관장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사로가 젊었기에 생전의 업적이나,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죽고 나서 따져보니 위대해서 영광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받으실 영광은 당신이 사전에 다 계획하시고 이제 그 영광을 사람들 앞에 보이시겠다는 뜻입니다.

도마를 파문하지 않은 주님만의 여유

두 자매는 가장 절실하게 필요했던 시간에 주님이 '여기'에 안 계셨던 것을 너무나 안타까워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절대 절명의 시간임에도 막상 주님은 당신께서 '거기'에 부재한 것을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전에 당신께서 부재한 곳이라곤 이 땅에 단 한군데도 없었습니다. 대신에 기뻐했습니다. 인간의 소망이 끊어짐이 그분에겐 기쁨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인간 사회에서라면 정말 맞아죽어도 쌀만한 말을 대담하게 뱉어낸 셈입니다. 친구가 죽었는데 기뻐하다니 말입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소유한 절대 군주라도, 또 아무리 심오한 사상을 지닌 현자라도 해서는 안 될 말이자 하지도 않을 말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도무지 양해가 되지 않은 언급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해 하나님조차 할 수 없는 말이지 않습니까? 사람이 죽으니까, 실상은 생사를 주관하시므로 당신께서 죽여 놓고 기뻐하다니 말이 될 법이나 합니까? 만약 주님의 덧붙인 설명이 없었더라면 틀림없이 그랬을 터인즉 주님이 기뻐하신 이유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선 너희를 위하여" 기뻐한다고 합니다. 당신의 개인적 감정이 기쁨에 겨웠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제자들 때문에 기쁘다고 해서 나사로의 죽음과 연관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제자들이 자기들 친구처럼 함께 슬퍼해주어서 기특하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변화를 미리 알고서, 사실은 그 변화도 당신께서 일으키시겠지만, 기뻐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일어날 변화가 무엇이었습니까?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 대로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림으로써 당신이 구세주 되심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 그런 당신을 믿는 자는 살아서도 죽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됨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눈앞에서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너무나 큰 실례가 되는 말을 서슴지 않고 행하는 자기들 스승이 바로 궁극적이고도 유일한 부활의 길임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어떻게 됩니까? 제자들이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되면 주님이 너무나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지당한 말씀 같습니까? 이 진술만 따로 떼어서 본다면 정말 1+1=2 같은 상식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 죽은 자를 살리러, 그것도 핍박 받을 것이 빤한 곳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참입니다. 오죽하면 제자 도마조차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그런데 주님도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말을 했지만 이 도마의 대꾸야말로 진짜 해선 안 될 말이었습니다. 스승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러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는 전혀 관심도 두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스승 때문에 죄 없는 제자들마저 어쩔 수 없이 박해를 받아 죽게 되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죽는 것은 순전히 스승인 당신의 책임이라고 미리 못 박은 셈입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선 안 된다는 한국 같았으면 절대로 입에 담아선 안 될 말이자 어쩌다 자기도 모르게 뱉어내었다 해도 당장에 파문 감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주님은 꾸중은커녕 일언반구 대응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살리려는 일을 도마가 믿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들로 믿게 하려고 베다니로 출발한 것입니다.

또 그러면서 주님은 기뻐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나사로를 되살리는 것은 당신께선 너무나 식은 죽 먹기입니다. 전혀 불가능하다는, 어쩌면 스승이 헛소리 한다고 여겼던 그 이적을 얼마 안 가 생생히 목도하게 되면 제자들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리라 미리 예상하니까 기쁠 수밖에 더 있습니까?

비유컨대 너무나 가난한 아비가 아들 생일 선물로 자동차를 사들고 가는 심정일 수 있습니다. 아들은 꿈에도 가능한 일이 아닌지라 아빠가 그런 약속을 해도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아빠가 제 풀에 한이 서려, 말하자면 거의 넋 나간 소리를 하나보다 여겼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적금을 들었던 로토에 걸렸던 차를 사들고 가는 아비의 기쁨은 하늘을 찌를 듯할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어서 주위 모든 인간들은 슬픔과 낙망에 빠져 있을 때에 주님만이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주님의 부재를 기뻐할 수 있는가?
        
지금 이천 년 전 유대 땅 베다니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이적과 의심 많은 제자 도마에 관해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나사로가 죽은 것 같은 환원불가능의 비극을 겪은 것도 아닙니다. 절망의 끝장을 맛본 것도 아닙니다. 그저 조금 힘들거나 풀리지 않은 일만 생겨도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이라는 불만이 얼마나 자주 튀어나옵니까? 그것도 거의 반자동입니다.

반자동(半自動)이라는 말은 우리 믿음 자체가 즉, 이미 굳어져서 심령 속 깊이 박혀 있는 생각이 실제로 그런 정도 밖에 안 된다는 뜻입니다. 주일날 대표기도에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이라고 읊으면서도, 이 또한 거의 반자동으로, 말입니다. 그럼 마찬가지로 기도했던 그대로의 믿음이 굳게 박혀있다는 뜻입니까?

같은 반자동이라도 둘의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이라는 불평의 반자동은 생각이 그대로 밖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무소부재하시는 주님이라는 고백의 반자동은 입술에만 붙어 있는 것입니다. 실은 미사여구를 동원해야만 더 좋은 기도인 줄 믿는 믿음의 반영입니다. 결국 두 가지 반자동은 동일하게 자기 고백한 대로 온전히 믿지도 않는 우리 믿음의 현주소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너무나 가난하다 못해 믿음의 출발조차 못한 꼴입니다. 주님이 무소부재 하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믿지 못하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에게도 변명 거리는 분명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함께 여기 계셨더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힘들고 괴롭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아무리 기도해도 형편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고 심지어 다른 흉사마저 겹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주님 언제까지 나를 치실 것입니까? 이젠 제발 나를 그만 때리십시오.”라고  절규한 것 같은 상황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끈질기게도 “지금 여기”(now and here)의 하나님만 절실히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 땅의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묶여 있는 바람에 탈피하기 아주 힘든 제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어떻게 말하고, 엄격히 따지면 말보다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죽은 지 나흘 후에도 아직도 거기”(was and there)에 머물러서 지체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도마와 다른 모든 이가 지녔던 주님에 대한 오해일 뿐입니다. 주님이 실제로 하신 말씀의 뜻은 전혀 달랐습니다. “너희가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거기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이 아니다. 나는 바로 너희가 바라던 대로 ‘지금 바로 여기’의 하나님이다. 그럼에도 너희가 그렇게밖에 여길 수 없도록 만든 후에 나중에 나의 실상을 보도록 해야 제대로 믿을 것 아니냐? 당장  뛰어가 나사로를 병을 고쳐줄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지체한 후에 죽음에서 다시 살리려는 것이다.”  

우리의 “여기 계셨더면”이라는 끊임없는 불평에 대한 주님의 한결같으신 대답은 “아니다. 나는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 아니 단 한 순간도 너를 떠난 적이 없다. 여기를 벗어나 거기로 간 적도 전혀 없다. 단지 너희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이다. 지금 이 환난도 너희로 나를 온전히 믿게 하려는 나의 일이기에 나는 너희를 위하여 너무나 기쁘다. 너희도 나의 이 기쁨에 동참하지 않겠니?”

예수님은 과거, 현재, 미래 전시간의 주인이십니다. 또 지금 살펴본 대로 여기와 거기는 물론 어느 곳이나 전공간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무덤 앞에서 말씀만으로 나사로를 살려서 스스로 걸어 나오게 하셨지만 실은 무덤 안까지 가신 셈입니다. 영계(靈堺)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당신 안에서 통일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엡1:10) 전 우주의 눈에 보이는 시공간이든, 보이지 않는 어떤 영역이든 태초부터 영원까지 그분의 은혜와 권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지금 여기에 하나님이 마치 안 계셔서 이런 어려운 일이 생기고 해결되지 않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분은 하늘 보좌 거기에 좌정하고 계시지만 하나님은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실 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주님은 신자가 온전히 믿을 때에 기뻐한다고 합니다. 그럼 믿음은 지금 현재 여기서의 내 형편이 어찌하든 하나님은 거기서 오히려 기뻐하고 계시다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을, 당장 우리 지정의로는 모순 같이 여겨지지만,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내 감정으로 항상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우리를 향해 영원토록 기뻐하시는 그 기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성경은 언뜻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이런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4-7)

6/23/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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