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화룡점정(畵龍點睛)

조회 수 188 추천 수 6 2012.07.16 23:07:37
복음의 화룡점정(畵龍點睛)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26:39)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세 번이나 기도하며 그 잔을 피하고 싶어 했습니다. 주님의 이런 주저함이 교회 안의 봉사에도 순종하기 힘들어 하는 우리의 영적 수준과는 결코 비교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 생명을 걸어야 하고, 그것도 엄청난 고통까지 수반한다면 솔직히 기도해볼 것도 없이 도망가기 바쁩니다. 실제로 3년 간 동고동락했던 제자들마저 꽁지에 불붙은 양 도망갔지 않습니까?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 당시 사람들은 수차 보아서 익히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참으로 시사(示唆)하는 바가 많습니다. 우선 십자가의 고통이 인류가 고안한 처형방식 중에 가장 크다는 것은 역으로 말해 하나님의 죄에 대한 분노와 저주가 그만큼 엄청나다는 뜻입니다. 또 수제자 베드로마저 세 번 스승을 부인할 정도라면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죄에 대한 온전하고도 정당한 하나님의 심판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과 이후의 그분을 모르는 모든 자연인들은 십자가에 달려야 마땅한 하나님의 불같은 죽음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강제적으로 매달리지 않는 이상 절대 자발적으로는 십자가에 오르지 않습니다. 다른 이를 위해선 더더욱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피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세 번의 주저와 무관하게 자발적으로 십자가에 오르셨던 것입니다. 역사상 십자가 처형을 당한 자는 수도 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그것도 남을 위해 오른 이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이 또한 그분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는 수많은 근거 중의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어떻게 세 번씩이나 주저했을지 조금은 미진하다는 느낌을 솔직히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그 주저함이야말로 너무나 큰 은혜가 됩니다. 세 번이나 주저하지 않았다면 십자가 은총은 확 줄어듭니다. 단순히 은혜가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복음으로 완전해지지 못합니다. 세 번 주저한 것은 그분이 완전한 인간이었다는 뜻입니다. 또 그래서 모든 인간을 대속할 제물로써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으로 생각해보십시오. 겟세마네의 피가 땀이 되는 기도가 없었다면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 고통에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기에 아무런 주저함과 갈등 없이 그냥 게임이나 운동하듯이 골고다로 갔다는 뜻이 됩니다. 실제로 죽지 않고 가짜로 죽은 척 한 것이 됩니다. 결국 십자가에 달린 분은 이단들의 주장처럼 허깨비가 됩니다. 아니면 인간의 죄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만 뽐낸 꼴이 됩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할 제물로써 조건을 전혀 갖지 못한데다 허위로 쇼를 한 것에 감동을 받고 회개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어리석고 죄에 찌들어 있어도 그 정도까지 영적으로 무지하지는 않습니다. 영혼이 타락했어도 하나님이 심어주신 영성과 양심의 희미한 흔적은 물론 이성적 분별력은 남아 있습니다.  

순전히 이해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이율곡이 공부는 하지 않고 종일 놀면서 말썽만 피우자 엄마인 신사임당이 어떻게 했습니까? 잘 아시는 대로 스스로 당신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피가 나도록 때렸습니다. 만약 직접적인 연관 없는 이웃 아저씨나 같이 놀던 악동 친구가 그랬다면 율곡이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공부 안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긴 들었어도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서 그러느냐, 왜 내 일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느냐라는 반감이 더 컷을 수 있습니다. 또 아버지가 당신의 종아리를 때렸지만 워낙 튼튼해서 피는커녕 멍도 들지 않았다면 회개가 절실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사임당은 율곡의 잘못을 심판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혈육 관계의 가족이자 자기를 낳아준 엄마였습니다. 단순히 자기를 때리는 시늉만 하거나 조금 세게 때려서는 큰 효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로 피가 나도록 엄청 세게 때렸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분이 그랬습니다. 율곡으로선 그렇게까지 사랑하는 엄마의 기대를 저버리고 그 가르침을 거스르는 잘못을 범했다는 처절한 회개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신사임당이 자기 종아리를 회초리로 피가 나도록 때리겠다고 결단했을 때에 그 아픔이 어떠리라는 것도 분명 알았을 것입니다. 또 두려워서 여러 번 망설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서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예수님도 피가 땀이 되도록 기도할 정도로 십자가 고통을 두려워했기에 세 번이나 주저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기에 과감히 골고다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그 극심한 고통에 비추어 수십 번이 아니고 단지 “세 번 밖에 주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죄인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악에 빠져 하나님을 기뻐하지도 찾지도 아니하는 이 세상에 당신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당신을 거역하고 심지어 미워하여 원수 된 인간에게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죄 중에 있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확증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한두 번이 아니라 “세 번 씩이나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그분의 구속제물로서의 완전성을 입증합니다. 죄를 저주하여 그 죄인을 심판해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가 완벽히 실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십자가의 사랑만 강조하면 복음은 반으로 경감됩니다. 아니 반쪽 복음이란 복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너무나 싫어하십니다. 아예 곁에 오지도 않으시고 공존조차 못하십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그 더럽고 추한 죄의 형벌을 스스로 자신의 몸으로 받으시는 모멸과 수치를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로 가는 길에 세 번이나 주저했다는 사실을 두고 우리의 게으른 신앙을 변호하는 핑계로 삼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너무나도 십자가의 은혜와 권능을 약화시키는, 아니 무시하는 영적 무지입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도 즉, 그분의 십자가의 핵심적 의미를 알고 나서도 아직도 복음을 그 정도로밖에 이해 내지 적용하지 못하니 그분께서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시고선 인간을 구원할 방도가 과연 있었겠습니까?  

주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는 당신의 삼 년간 공사역의 끝에 필수적으로 붙는 마침표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선언에 붙어야 하는 부호는 느낌표입니다. 세상을 향한 사랑과 긍휼에 찬 안타까움을 호소하는 외침이므로 수사법상 느낌표가 적합합니다. 용을 그리고 눈을 그리지 않으면 용이 안 됩니다. 그 처참한 십자가에 달리기를 세 번씩이나, 그와 동시에 세 번밖에 주저한 것은 바로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신 복음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인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의 세 번 주저함을 경시하여 자신의 불순종에 대한 핑계로 삼는 것 외에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간혹 그분의 십자가 은혜에만 마냥 취해 있다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그렇게까지 사랑해서 구원해주시다니 눈물을 흘리면서 소녀 같은 감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대부분은 여전히 주님의 거룩한 계명과 소명 앞에 주저할 때가 많습니다. 또 연약하고 어리석은데다 옛 습성이 남아 있어 수시로 죄에 빠집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은 우리더러 절대로 그런 자리에 머물러만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자각하여 회개하는 것은 아주 좋은 것이지만, 그것으로 그치거나 혹은 심한 죄책감에 빠져 다른 일을 하지 못해선 오히려 복음을 가장 복음답지 못하게 만드는 짓입니다. 우리의 의도하지 않았고 또 미처 모르는 불찰이긴 해도 주님이 가장 원하지 않는 일입니다. 사단이 그 배후에서 그런 우리 모습을 보고 조롱하며 즐기고 있고 심지어 조종하고 있음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하게 주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새 생명을 얻은 자입니다. 죄악과 사단과 사망에 당당히 맞서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와 빛을 주위에 드러내야 합니다. 자기에게 맡겨주신 모든 사람과 사건들 속에서 주님의 그 풍성하신 사랑을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 믿은 후에는 정말로 그 믿음으로 한 걸음씩 진군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헌신한만큼 전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진토 같은 체질이나, 아직도 어린 아이 수준에 머무는 믿음이나, 계속해서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은 어리석은 영성을 다 잘 아십니다. 또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감안하고 합력하시면서 복음 안에서 갖게 된 우리의 새 생명을 더 풍성한 생명으로 늘려 주십니다. 죄에 빠져 당신과 원수 되었던 자마저 당신의 거룩한 친 백성으로 바꾸어주셨는데, 이제 그분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기도하면서 행하는 일에 더 놀라운 권능과 은총으로 함께 하지 않을 리가 있습니까?  

미국의 영적 대각성 운동을 선도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더럽혔지만 오히려 그분의 거룩하심을 더 밝히 드러냈다.”고 말했습니다. 인류의 죄악으로 인해 당신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가 더렵혀졌습니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이 가장 안타까워하신 것은 창조 후에 심히 좋아하셨던 인간이 죄로 더럽혀졌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얼룩지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그분의 거룩하심은 더 밝히 드러났습니다.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저하는 세 번의 기도를 했다고 하나님의 영광은 절대 줄어들지 않습니다. 인자로서의 그런 연약함이 오히려 하나님 구원의 은혜로움과 영광스러움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복음을 정말로 복음답게 완성시킨 것입니다. 주님께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거나 거역할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단지 십자가의 완전한 대속제물로써 바쳐지기 위해서 주님마저 필수적으로 거쳐야 했던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복음 안에 이미 “들어와 있으면서도” 수도 없이 쓰러지고 넘어지고 심지어 죄에 빠지고 회개조차 안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 안에 이미 “들어와 있기에” 얼마든지 풍성한 새 생명을 누리고 주위에 나눠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연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만약에 십자가 앞에서 계속해서 저는 죄인이라는 고백만 하고 있으면 용을 그려놓고 눈을 그리지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용처럼 보여도 사실은 용이 아닌 것입니다. 복음이 신자로 십자가에 엎드리게 만든 것은 반드시 일어나서 당당하게 죄악이 관영하는 세상을 향해 맞서 싸우기 위해 걸어가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주님이 우리가 가는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걸어가 주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지금 눈이 없는 용 같은 복음만 계속 그리고 있지는 않는지요?

7/9/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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