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에는 왜 세금이 붙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151)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13:47-50)
착각은 자유다.
흔히들 착각은 자유이고 세금도 안 붙는다고 말한다. 착각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과 진리를 혼자만 전혀 엉뚱하게 알고 있으면서 계속 자기가 옳다고 우기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든 분명 개인의 자유에 속한다. 그런데 세금이 안 붙는다는 표현이 재미있지 않는가? 혼자만 잘못 알고 있다면 필연적으로 부정적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예컨대 미국의 소득세 납부 마감이 4월 15일인데도 5월말로 착각하고 태평치고 있다간 혼자만 벌금을 물어야 하지 않는가?
문제는 인간은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이가 배우고 체험한 것이 각기 다르다. 누구나 수시로 크고 작은 착각에 빠질 수밖에 없다. 간혹 그 피해가 심각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런 착각 중에 가장 큰 것이 무엇인가? 피해가 너무 커서 절대 해선 안 되는 착각이다. 그럼에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착각 말이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하나님이 실존하지 않고 또 그래서 마지막 심판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예수님의 천국에 관한 마지막 일곱 번째 비유는 그 착각으로 물어야 할 벌금이 얼마나 위중한지 설명하고 있다. 우선 49절에 “세상 끝”에 일어날 일이라고 밝혔다. 개인의 죽음보다는 세상 역사의 끝과 마지막 심판을 강조한 것이다.
‘그물’(47절)도 어부 혼자서 던지는 작은 그물이 아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어선 여러 척들이 큰 그물을 연결하여 바다 밑을 훑는 일종의 저인망이다. 어떤 고기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물을 던진다고 하지 않고 바다에 친다고 했다. 또 물고기를 잡는다고 하지 않고 몬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각종 물고기를 모는 것은 심판에 유대인 헬라인 남종 여종 등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든 이가 동일한 자격과 신분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가로 그물을 끌어내어서 좋은 것은 담고 나머지는 버려져 물가에서 썩거나 기껏 퇴비로 밖에 쓰이지 못한다.(48절) 또 의인과 악인을 ‘갈라낸다’(49절)는 원어의 뜻은 완전한 격리를 말한다. 다시 바뀌거나 서로 섞일 가능성은 제로라는 것이다. 사람이 죽은 후는 물론이고 예수님이 재림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제 2의 구원 찬스가 없다. 갈릴리 어부 출신인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를 정말 실감나게 이해했을 것이다.
‘풀무 불’(50절)의 심판이란 계속 풀무질을 해대기 때문에 영원히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뜨거워지는 불이다. 그래서 울며 이를 간다고 했다. 극심한 고통을 참는 모습이다. 특별히 이를 간다는 것은 그곳에서조차 여전히 하나님에 분노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완악하게 거부하고 싫어했던 이 땅에서의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으로선 이 땅에서 구태여 벌을 주어 그 착각에 세금을 매길 필요가 없다. 심판은 스스로 자초한 결과이며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상태가 세상 끝날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정말로 순진해서 착각하는가?
그런데 불신자들이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순진해서, 시쳇말로 사차원이라서 착각하는 것일까? 만약에 아무리 말해도 못 알아먹는데도 심판했다면 하나님의 심판에는 하자가 있고 그분이 너무나 가혹한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고 심판도 없다는 이 착각만큼은 모든 인간이 착각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불신자들도 사실은 자기들이 착각하고 있는 줄을 알고 있다. 만약 착각이라고 시인하면 그 때는 온전한 진리 쪽으로 방향 선회를 해야만 한다. 또 그랬을 때에 따라올 결과가 싫기 때문에 일부러 끝까지 착각하는 척하는 것이다. 또 처음에는 착각을 가장하다가도 자꾸 착각 속에 자신을 숨기다보면 진짜로 그것이 진리인양 혼동 내지 고집하게 되는 것이다.
올해는 한국이나 미국에 대통령을 뽑는 대선이 있다. 모든 후보자들이 꼭 자기가 당선될 것이라는 일종의 착각에 빠져 있다. 여론 조사가 불리하게 나와도 그렇다. 심지어 지지율이 자꾸 낮아지면 자기 최면마저 건다. 착각 속으로 자기를 계속 밀어 넣어야 추종자들의 지지와 후원을 받을 수 있다. 또 만에 하나 떨어져도 정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미국 대선에는 아주 특이한 후보가 한 명 나왔다. 당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알고도 즉, 전혀 착각하지 않았는데도 자기 돈을 써가며 출마했다. 오바마와 롬니 두 후보는 물론 미국민 전체 나아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착각에서 깨어나라는 경고를 하기 위해서다. 거의 매번 대선에 나오는 로스 페롯이라는 무소속 후보가 바로 그다.
그의 경고인즉, 미국의 재정적자를 급속히 획기적으로 개선하지 않으면 곧 미국이 망한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미국은 그동안 생산보다 달러를 찍어내어 흥청망청 살아온 것이나 다름없다. 또 그것을 전 세계가 용인했다. 그런 미국에 자기들 물건을 팔아야만 자기들도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일본, 서독이 미국정부가 발행한 국채를 엄청나게 보유하고 있는데도 지금 같은 불경기에 그것을 처분하여 나라 살림에 보태 쓸 수 없다. 미국이 그 돈을 갚을 여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파산하면 전 세계도 함께 파산하게 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울며 겨자 먹기 식이 된 것이다. .
페로는 20년 전의 4조 달러였던 재정적자가 지금은 16조 달러로 늘어났고 앞으로는 정말 눈사람처럼 불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과 전 세계는 이미 휴지나 다름없는 달러뭉치를 짊어지고 경제적 풀무 불로 서서히 다가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당장의 조금 힘든 것을 못 참고 계속 달러를 찍어 내겠다고 두 후보가 공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인정하기 싫을 뿐이다.
불신자들도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내심 인정한다. 나이아가라 폭포나 그랜드케년을 방문한 자들 모두 입을 벌리고 한동안 말을 못 잇는다. 정말로 창조주가 있긴 있는가보다 느낀다. 최근 광대한 우주를 파헤치는 천체물리학이나, 인체의 DNA를 나노 단위로 분석하는 유전공학 등이 연구를 하면 할수록 마지막에 만나는 벽은 바로 창조주다. 창조주라야 모든 문제가 풀리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미궁으로만 빠져드는 것이다.
이제는 느낌으로가 아니라 최첨단 과학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된 것이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1:20) 또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모두가 천벌을 받을 놈이라고 욕한다. 죽음을 눈앞에 둔 자치고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자는 없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1:19)
그래서 하나님의 실존과 그분의 심판을 부인할 핑계는 전혀 없다고 성경은 선언한다. 다른 착각은 몰라도 이 착각만은 근본적으로 절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짜로 처음부터 끝까지 몰라서 완전히 착각이었던 자를 하나님이 가혹하게 심판하는 그런 불공평한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착각은 절로 생기지 않는다.
거기다 실은 그 어떤 착각도 갑자기 불쑥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 착각을 유발하는 이전의 착각이 있는 법이다. 그 착각은 또 다시 그 이전의 착각이 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는 착각은 하나님이 없다는 착각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이 없다는 착각은 영적인 세계가 없다는 착각에 기인한다. 영적 차원이 없다는 것은 이 땅은 물질로만 이뤄졌고. 인간도 물질이라는 착각이 그 바탕이다.
다른 말로 이 땅의 실존과 가치는 오직 눈에 보이는 것에 국한한다는 착각이다. 물질계 안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이 전부요, 최고라는 착각이다. 인간이 이 땅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는 창조 세계 안에서 인간의 눈에 보이게끔 존재한다면 이미 창조주가 아니요, 반드시 창조와 초월해서 있어야 하기에 눈에 보일 수 없다는 사실을 조금만 추리해 봐도 논리적으로 합당한 결론임을 그들도 알고 있다.
나아가 우주 만물을 당신이 운행, 섭리, 주관함도 알고 있다. 일 년 365일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해는 매일 아침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이 모든 것이 우연으로 일어날 일이 아님을 안다. 하나님이 인생만사를 통치하고 자신의 인생길도 주관하고 있음을 시인한다. 심지어 힘든 일이 생기면 나름 기도도 한다.
말하자면 인간이 최고라는 최초의 착각의 경우는 그 이전의 착각이 없다는 뜻이다. 착각 대신에 하나님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인간의 소원 내지 고집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인생이 범해선 안 되고 가장 피해가 큰 이 착각만은 절대 무지 무식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스스로 최고가 되겠다는 탐욕과 집착에서 나온 것이다. 의도적, 고의적, 끈질기게 하나님을 부인 거역한 것이다. 하나님이 없어져야만 인간이 최고가 되기 때문이다. 자기 기분과 소견대로 신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짐짓 착각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부인하기 뭐하니까 하나님은 있되 심판은 없다고 강변한다. 또 심판이 없다는 주장도 아무래도 뒤가 댕기니까 심판이 있는데 착하게 산 자 즉, 도덕적으로 평균 이상인 자는 구원 받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최소한 평균 이상은 된다는 착각 속에 사는 것이다. 모든 불신자가 다 그러면 도대체 평균 이하의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감옥에 있는가? 그럼 감옥에 갇힌 죄수의 숫자가 전체 인구의 50%는 되어야 하지 않는가?
인간이 원죄로 그 영혼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이 하나님을 전혀 모르거나 알 수 있는 능력 자체를 완전히 상실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과 심판이 없다는 것이 착각인 줄 알면서도 고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일부러 착각인 양 가장하고선 하나님께 거역하니 이 얼마나 타락한 증거인가? 어찌 그분께 용서 받을 수 있겠는가?
불신자들은 하나님과 심판의 부재(不在)가 착각인 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시인하면 지금껏 즐기던 것 다 포기하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싫고 귀찮은 것이다. 요한 사도는 참 빛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고 했다.(요1:9-11) 그 이유를 예수님은 자신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 가운데로 오면 그 악한 행위가 드러날까 염려한 것인데, 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요3:19,20)
그 착각이 내포하는 또 다른 의미
인간이 최고라는 교만은 이기적 탐욕이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우기는 것은 어리석음을 넘어서 고집스런 집착이다. 이런 탐욕과 집착은 항상 “지금 당장”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 삶과 인생의 목표와 방향이 일시적 순간적일 수밖에 없다. 영원을 소망하지 않고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조금만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자는 당장의 고통을 감수하며 인내할 수 있다. 인내하는 중에 사고의 방향을 돌릴 수 있다. 지금 즐기고 있는 것이 과연 정답인가? 진리는 따로 없는가? 필연적으로 탐구하게 된다. 그러나 인내를 전혀 하지 않고 지금 당장에 집착하고 있으니 싫고 귀찮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착각 속에 계속 머물러 남기로 한 것이다. 마치 바닷가 언덕에 근사한 집을 지었지만 지진 때문에 기초가 다 무너졌고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땅이 파이는데도, 삼층 베란다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바다 경치를 보는 것이 너무 좋아 계속 파티만 벌리고 있는 꼴이다.
지금 당장이라는 말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럼 자연히 나만 좋으면 된다는 결론으로 이끈다. 후손에 대한 배려조차 할 줄 모른다. 후손도 당장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의 젊은이를 보라. 대다수에게 아무 장래 소망이 없다. 그저 갈 바 몰라 방황만 하고 있다. 또 지구 온난화로 인한 자연 재앙이 자주 닥친다. 죄악은 갈수록 음흉, 간사, 포악해지며 성적 타락도 갈 데까지 가버렸다. 이런 상황을 냉철히 직시하면 신자마저 차라리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할 것 같은 생각이 가끔 들지 않는가?
아니 실제로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젊은이들이 결혼을 기피하고 있다. 시대가 결혼을 거부하게 만들고 있는 것 자체가 사람들이 성경적, 영적으로 정확한 해석을 하지 못할 뿐이지 모든 장래가 암울하다고 묵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력을 갖춘 자는 이 세대가 멸망과 심판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모든 이의 마음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도 하나님의 경고음을 다 듣고 있다. 로스 페로가 어떤 사람인지, 왜 당선 가능성도 없이 미국 대선에 무모하게 도전하는지, 아니 그가 출마한다는 사실조차 몰라도 그렇다. 피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보고 있다. 인간 만사 안에서 그분의 심판이 있음도 깨닫고 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으니 어서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자기들 심령을 두드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귀를 막고는 짐짓 아닌 척 하고 있는 것뿐이다.
신자의 치명적 착각
지금 제가 불신자의 착각을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여러분도 실은 착각한 것이다. 불신자들은 이 설교를 들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들을 엄두도 내지 않는다. 사실은 신자들도 그들 못지않게 치명적인 착각들을 예사로 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불신자들이 마지막 날에 풀무 불에 울며 이를 간다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신자들이 가는 곳은 어떤 곳인가? 그와 정반대되는 곳이다. 도무지 말로 표현조차 못하는 너무나 좋은 곳이다. 예수님처럼 영화롭게 변하여 기쁨과 감사에 충만하여 영원토록 하나님 보좌를 향하여 거룩, 거룩, 거룩 찬양하게 된다.
이 사실을 실감하고 있는가? 또 실감하는 만큼 실제로 이 땅의 삶도 그에 부응하여 살고 있는가? 최소한 울며 이를 가는 곳에는 절대로 가지 않음을 확신하는가? 혹시라도 이 땅에서 지금 내 코가 석 자인지라 예수님의 마지막 날에 대한 비유, 설교, 가르치는 말씀조차 별로 관심 없이 설렁설렁 읽고 치우는 것은 아닌가?
본 비유가 뜻하는 가장 근본적인 뜻이 무엇인가? 역사가 돌고 돌거나, 무한정 지속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천지만물과 인간을 무에서 창조하신 시작이 있다면 반드시 그 끝이 있다는 것이다. 그 끝에는 창조하신 목적이 달성될 것이다.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가?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영원토록 진심으로 기뻐하고 경배하며 감사하고 찬양토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목적을 어떻게 이루시는가? 우선 당신의 비밀의 경륜 가운데 아담의 타락과 그 모든 후손을 죄악에 가두어 놓았다. 이 땅을 공중 권세 잡은 사탄에게 미혹되도록 일시적으로 허락하셨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이 땅에서 모순과 고통과 죄악과 육체적 죽음으로 신음하게 된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인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뱀의 머리를 깨트리셨다. 대속 죽음의 구원을 태초부터 예비해 놓으셨던 것이다. 그 십자가 앞에 진심으로 겸허하게 엎드리어 하나님의 사랑 앞에 항복하는 자에게는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 그리고 때가 되면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셔서 너무나 추하고 황폐해진 이 땅을 너무나 아름다고 영화로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꾸시고 우리를 당신의 보좌 앞으로 초대하실 것이다.
본문을 쉽게 풀면 오늘 당장 예수님이 오시든 혹은 그 날이 언제 닥칠지 모르더라도 당신을 믿는 신자는 평소에는 아무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지막 날은 신자에겐 창조의 목적이 달성되어 구원이 완성되는 너무나 기쁘고 신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신자의 착각은 그래서 이미 영생을 확보했으며 인생에 대한 궁극적 정답을 소유하고 있음을 모르거나 수시로 잊는 것이다. 이 땅의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영원한 천국과 연결시키지 못하고 자꾸만 물질계 안으로 제한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정답을 이미 알고 있는 자다운 당당함, 자신감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 마지막 날의 심판이 혹시 자기에게 해당되지나 않는지 불안에 떠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구원의 사역을 다 이루셨다. 그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자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어떤 것인가?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의 참 생명과 우리의 썩어질 옛 생명이 일대일로 맞교환 된 것이다. 예수님의 참 생명은 그 본질상 절대로 왜곡, 변개, 포기, 취소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예수님의 참 생명이 우리에게 내주해 있지 않는가 말이다.
신자의 착각으로 지불하는 벌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것이라고는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명령을 내리셨는가? 무엇을 먹든 마시든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했다. 하나님이 영생을 선물로 주셨으니 이젠 당신께 접대나 아부의 뜻으로 무엇이든 바치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의 사랑, 권세, 은혜가 신자가 가는 땅 끝까지, 살고 있는 끝 날까지 함께 하는 것을 확신하라는 것이다. 그런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적은 일에도 충성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큰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태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분의 영광이 이 썩어질 몸을 통해 세상을 향해 비춰진다는 것이다.
그런 신자는 그래서 무엇에든지 의롭고, 무엇에든지 선하고, 무엇에든지 경건해질 수 있다. 물론 신자에게 자기를 스스로 높이며 조금이라도 귀찮고 싫은 것은 하지 않으려던 이전의 습성이 남아 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는 성화는 더딜 수 있다. 그러나 정말로 세상을 향했던 집착과 자기만 위하는 이기적 탐욕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실감하기에 예수의 은혜와 긍휼만 소망한다면 성령님이 의로운 길로 인도해주신다. 썩어지는 옛 습성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극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는 것 가운데는 현재의 세계적 불경기나 지구 온난화로 인한 자연재앙도 포함된다. 그로 인한 고통이 신자만 피해간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로마서 5:3이하의 말씀대로 예수 십자가 안에서 이미 정답을 소유하고 있기에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는 것을 성경은 놀랍게도 “믿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라고 선언한다.
우리가 연약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예수를 믿을 생각은 추호도 없을 때에 그분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만큼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의 확실한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 소망을 부끄럽지 않게 해주신다고 했다. 신자의 구원은 그분이 책임지고 완성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 어떻게 예수를 주라 시인하고 그분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그분의 십자가 은혜와 권능을 회상한다면 우리를 반드시 당신의 영광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알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에 지금 겪는 현실의 고난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다. 시쳇말로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그 안에는 마지막 날의 적그리스도는 물론 사탄도 포함된다. 조금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도 포함된다. 하나님도 당신의 사랑을 끊지 못한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응하지 않고 땅에 떨어지는 법은 절대 없다. 그분의 입에서 나간 말씀이 헛되이 되돌아오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런데도 작금 교회 강단에선 어떤 말들이 오가고 있는가? 베리 칩을 받으면 그 구원이 취소되고 다시 심판 받는다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실제로 죽이셨는데도 말이다. 당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신자를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구원의 완성으로 이끄신다. 그 구원의 효력은 신자에게 영원토록 유효하다. 세상은 예수로 인해, 예수를 위해, 예수에 의해 창조되었다. 신자의 처음과 끝도 오직 예수의 은혜일뿐이다.
거기다 예수 십자가 외에도 구원의 길이 있는 양, 예수의 재림과 심판이 없는 양, 가르쳐지고 있다. 하늘에서 예수님이 보시면 얼마나 통탄할 일이겠는가? 다시 이 땅에 내려와 십자가에 또 죽을 수는 없다. 십자가는 영단번의 구원이자 은혜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남은 것은 마지막 날의 심판뿐이지 않는가?
참 빛은 오직 예수뿐이다. 지옥의 풀무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고 더 세어지기만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참 빛도 갈수록 광채가 더 난다. 이 땅에 죄악이 관영되고 어둠이 짙어질수록 더 빛날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은 정말로 참 복음의 은혜를 끝까지 붙드는 당신이 택하신 소수의 남은 자들에게만 비춰질 것이다.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 불평, 불신하는 것만큼 큰 신자의 착각도 없다. 또 현재 이 땅에 눈에 보이는 환난과 문제와 여건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않는 큰 착각이다. 착각에는 세금이 안 붙지만 그 결과는 책임져야 한다. 하나님이 사랑을 의심하는 자는 그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의 권세와 은혜와 사랑은 하나도 줄지 않았는데 그것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신자와 기독교만 갈수록 힘이 빠지는 것이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불신자 시절의 착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없고 그분의 심판도 없다는 착각은 완전히 버리고 대신에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린 자의 구원의 완성은 그분이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럼 대체 염려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10/7/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