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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법칙
| 現代文보기 | 原文보기 | 성서조선 第 57 號 (1933年 10月)
약육강식(弱肉强食)과 우승열패(優勝劣敗)는 움직일 수 없는 철칙인 듯하다. 자연계의 동물과 식물을 관찰하고 개인과 국가의 인류생활을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이 엄연한 법칙이 발견된다. 그러므로 강자는 더욱 이빨을 가다듬어 정복하고 다스리려고 기뻐 뛰어다녔지만, 약자는 한갓 실망과 공포에 빠질 수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으니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리라” (이사야 40:4). “교만한 눈은 낮추시느니라” (시편 18:27). 무슨 능력으로 이러한 일을 집행하시는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사실은 명백하다.
‘우승열패’의 자연법칙만이 행하여진다면 이집트의 파라오 왕조와 바빌론의 느브갓네살(Nebuchadnezzar)의 영화는 영원히 융성하여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눈’ 은 낮추신다.
진시황제의 만리장성도 다만 돌 무더기에 지나지 못하였고 독일국민의 교만을 상징하는 카이젤 수염도 하늘을 거슬러 자라지 못 할 것을 깨달았다. 독일의 육군과 러시아의 기병보다 더 강한 능력이 존재함을 생각만 하여도 떨리는 것이 사실이다.
세상에 소위 무적함대라는 것이 종종 출현했으나 이는 그 나라 해군의 성숙기를 의미하는 동시에 그 쇠퇴기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전주곡으로 봄이 ‘프로그램’을 감상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한 척의 돛단배라도 스스로 부족함을 염려하며 두려워하는 동안에는 능히 그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으나, 천하에 무적을 표방하는 함대는 세상을 요란하게 하고 결국에는 자기 나라까지 멸망케 하는 망신을 부르고야 말았다.
이는 그 ‘눈이 교만한’(high looks) 까닭이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기에 모든 인간의 허물을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나 오직 ‘교만한 눈’에 대하여서는 철저히 따지고 나무라신다.
교만한 눈을 낮추시는 일은 영원한 지존자이신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당연한일이다. 그래서 ‘우승열패’의 법칙을 우주간에 허락하시면서도, 때때로 ‘열승우패’의 법칙을 집행하신다.
과거의 역사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현재와 장래에도 부귀를 자랑하며 군대의 힘을 자랑하는 백성은 이 제2법칙의 집행을 당하고야 말 것이다.
어느 개인이나 어느 나라나 멸망하기 보다는 융성하기를 희구한다. 더욱이 내가 약할 때에 그러하다. 그렇지만 작은 법칙 위에 큰 법칙을 발견하는 것은 진리를 배우는 희열을 느끼는 바이다. 시인과 같이 하나님께 향한 신뢰와 찬송이 약동함을 멈출 수 없다.
그러니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실험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을 쳐다 보면서 세상을 관망하고자 한다. 불안한 마음으로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실로 이 ‘하나님의 법칙’을 기다릴 뿐이다.
“교만한 눈은 낮추시느니라.” 낮아지지 아니할 자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