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 (對人관계) (산상수훈 연구 8, 1931년 9월, 32호)

마태복음 6:2~4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남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제 상급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4 이는 네 구제가 은밀하기 위함이라.   그렇게 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동기가 순수하라.   의를 행할 때 무릇 선한 일을 행할 때는 사람 앞에서 남에게 보이려는 심정을 가지기 말라.   교회에서 광고할 것이 아니요, 신문 잡지에 선전할 바가 아니다.   큰 의나 적은 선이나 오직 하나님 앞에서 행할 것이라는 모든 행위에 관한 통칙을 밝힌 것이 6장 1절이다.   다음으로 좀 더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교시하시기 위하여 구제할 때에는 어떠한 심정으로 할 것인가?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논한 것이 2, 3, 4절이다.


'구제(救濟)'라는 단어는 eleemosune 의 번역으로 (1) 자비(mercy), 연민(pity) (2) 시여(施與, almsgiving), 시물(施物, alms) 등의 뜻인데 우리 성경에는 마태 6장 2, 3, 4절과 사도행전 9장 36절, 10장 2절, 24장 17절, 누가복음 11장 41절, 12장 33절 등에는 모두 '구제'라고 번역 되었다.   사도행전 3장 2절에 '구걸'하고자 하더니 라는 것과 3절에 '구걸'하거늘 이라고 쓴 것도 원문에는 구제와 동일한 eleemosune 라는 단어이다.   이상으로 보아 '구제'라는 것은 본래 가난한 자,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자비지심(慈悲之心), 측은지심(惻隱之心)이 그 기본이다.   냉수 한 사발이나 동전 한 푼을 주는 것은 안에 있던 측은지심이 발동하는 것에 다름아닌 것이다.   물론 냉수보다 숭늉을, 찬밥보다 더운 밥을, 1전보다 1원을 베푸는 것이 더할 데 없는 일이지만 그보다도 긴요한 것은 그 연민하는 마음이 발동하는 데에 있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측은지심' 이것이 하나님의 주시하시는 초점이다. (마태 25:40, 마가 12:41 이하 참조)

그런데 당시 유태교회에서는 현대 교회에서 보다도 더 심하여 신도 각각에게 규정한 대로 거출하는 외에 빈민 구제를 위하여 종종 자유 연보를 청했다.   거금을 연보하는 자는 그 이름을 회당 안에 광고하거나 랍비의 오른편에 특석을 정해서 않도록 하거나 하여 금액의 많고 적음으로 속에 있는 성의를 척도하려 했다.   또는 이러함으로 신도의 허영심을 이용하려 했다.   길거리에서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헌금을 거출했다고 한다.   현대의 우리 눈앞에서도 누누히 보는 사실과 종합하여 보면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교회 치리자, 사업가, 수완가 등등이라는 종류와 나사렛 예수와는 면양과 산양처럼 본질적으로 그 종족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외식하는 자'라 함은 한문과 일본어에는 흔히 '위선자'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을 중국의 표준말 번역에 '남의 것을 제것인 체하는 위선자' 라고 하였으니 그 본래 의미에 가깝게 되었다.   본래 hypokrites 에는 (1) 대답하는 자, 통역자라는 뜻과 (2) 배우, 광대라는 뜻으로부터 추녀가 미녀로 변장하며 비겁한 자가 용감한 자를 연기하는 등 가장한 것, 가면을 쓴 것으로부터 측은지심의 발동함이 없이 욕심과 체면 때문에 자선사업에 참여하며, 의에 대한 반발력이 없이 사회의 풍조에 따라 의인의 묘를 장식하는 자 등을 통칭하여 위선자라고 번역하게 되었다.(마태 6:5, 16, 7:5, 15:7, 22:18, 23:13~15, 24:51, 마가 7:6, 누가 6:42, 12:56, 13:15 등 참조)



"나팔을 불지 말라" 함은 당시의 위선자들이 가난한 자를 부르는 척하고 뿔 나팔을 불어 실제로는 자기가 베푼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광고하였다는 사실을 들어 훈계하심이라 하는 설명도 있고, 혹은 실제로 나팔을 분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의미로 자기를 광고하는 자를 이르는 것이라는 해설도 있다.   사실이든지 추상적이든지 이 교훈의 의미는 같다.   회당에서나 거리에서나 남에게 보이려는 영예와 욕심의 동기로서 된 것은 그것은 가면이다, 위선이다, 아주 가증한 일이라는 큰 뜻은 명료하다.



"저희는 제 상급을 이미 받았느니라"는 한 구절은 대단히 미묘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에게 보이고 세상의 칭찬을 받으려고 나팔을 불면서 자선사업을 할 때는 회당과 거리에서 저의 명예가 선양되고 기념비와 동상까지라도 건립하여 주기를 사회가 아끼지 않으니 저가 목적한 바는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은 진실한 의와 순수한 선에는 꽤 둔감하면서도 위선자의 나팔에 대해서는 그 반향이 민첩하고 또 확실한 법이다.   그러므로 그 목적을 이루기가 쉽다.   그 목적 즉 사람의 칭찬을 받으려는 목적을 이루면 저는 '제 상급'을 받은 사람이다.   즉 이 세상에서 계산을 깨끗하게 마친 사람이다.   눈에 보이는 일은 빠르고 보이지 않는 일은 개 머리에 뿔이 나기를 기다림과 같다.   사람을 상대로 한 일은 그 보응이 확실한 것 같고 하나님을 상대로 한 일은 마치 물 위에 씨를 뿌리는 일 같고(전도서 11:1) 허공을 치는 일 같다.   그러므로 세상의 지혜있는 자는 세상을 택하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지시하신다.   성서는 전자를 향하여 "화 있을진저!"라 하고 후자를 향하여 "복스럽도다!"라 한다. (마태 5:6, 10, 11, 누가 6:24)



2절에서는 외식하는 자의 그릇된 행동을 지적하여 경계하시고, 3절에 이르러 적극적으로 구제를 행할 때의 비결을 가르치신다.   자선사업의 비결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면 '선은 비밀히 행하라'는 것이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고.   이는 나팔 부는 위선자와는 정반대의 길이다.   자선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할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 마음에 남아 있는 '이러이러한 구제를 했으니' 하는 기억까지도 배제하여야 참되어진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함은 선행을 극히 비밀히 하라는 뜻으로 이해하여도 될 터이다.   그만만하여도 세속적 표준과는 천양지차가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한걸음을 더 나아가 '선을 선으로 의식함이 없이 행하라' 하면 그리스도의 마음에 가깝게 된다.   구제할 때에 자기 앞에서 나팔을 불지 말 것은 물론이요, 여러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 자기 마음 속에 선행을 하였다는 자긍심까지 제거할 뿐더러, 선을 행할 때에 '악은 하지 않으며 특히 선을 행한다' 든가, '우리이니까 특히 자선을 행한다' 는 등 '특(特)' 이라는 글자를 전혀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목마른 자에게 냉수 한 잔을 주었으니 당연한 일, 가난한 자에게 나의 여유를 나누어 주었으니 당연한 일, 불구자에게 금전을 주었거나 혹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니라" (사도행전 3:6) 함도 사람으로서, 사도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이만한 일들은 당하는 경우마다 당연히 할 일이다.   자선을 행한다는 의식이 별로 없이 행하는 것이다.   사람인 연고로 동포의 곤핍을 구제하며, 병자를 동정할 것이요, 수족은 오직 본능으로 연민한 심정이 발로하는 대로 운동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저가 허다한 구제를 행하였을지라도 그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 리가 없다.   나중에 그리스도 앞에 나아갈 때도 옥좌에 앉으신 이가 오른편을 향하여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대접하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하고 그가 의인인 것을 칭찬하시되 의인 본인은 본래 행할 때에 이만한 일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인 줄로만 알았으니 특별한 선행을 쌓았다는 기억이 없었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오히려 반문하기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매 공궤하였으며, 목마르매 마실 것을 드렸으며, 어느 때에 나그네 되매 대접하였으며, 벗었으매 옷 입혔으며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가서 뵈었나이까?" 하였다.   참된 의인에게는 의를 행하였다는 기억조차 없었다.   그때에 "내가 진실로 너희더러 이르노니 너희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적은 이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행함이라" (마태 25:31~40)는 설명을 듣고야 비로소 당연한 일로 행하였던 작은 일로 인하여 분에 넘치는 큰 칭찬을 받게 되었으매 경악을 금치 못하였을 터이다.    



대개 하나님 앞에 참된 자선이라고 할만한 자선은 이와 같이 무의식중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도 모르게 은밀한 가운데서 행한 것이라야 한다.   이런 구제라야 무게가 있고, 영원성을 띄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눈에 띄여 보이는 것이다.   자기가 과장하고 의식하여 행하였고 세상이 갈채를 보내는 구제는 봄 안개가 아침 햇살에 스러짐과 같이 지나간 후에는 다시 찾을 수 없고 '저희는 제 상급을 받아 가지고' 떠나 갔으니 이 세상에나, 저 세상에서도 볼 일 다 본 것이다.



그러므로 4절에 "이렇게 하여야 네 구제함이 은밀하리니....." 하여 어떻게 하면 선행이 은폐되어질까 함을 알아본다.   현세와 기독교의 차이는 무릇 이러한 것이다.   자기의 선행을 어떻게 하면 나타내고 과장할까 하는 것이 개인으로나, 단체로나, 회사로나, 국가로나, 교회 목사나, 신문 기자나,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다 같이 강구하는 바이다.   또한 그 광고술이 거의 이상적 표준에까지 이르렀음을 축하하는 것이 현대의 첨단을 걷는 인류들의 자랑이 아닌가?  그러나 고대의 기독교, 예수의 기독교는 '어떻게 하면 은밀히 구제할 수 있을까?'를 강구하고 꾀하는 교훈이었다.  


우리 조선에도 기독교가 전래하기 전에는 은덕(隱德)이란 말이 있었다.   은밀하게 쌓아 둔 덕이 오랫동안 숨겨져 있다가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후에 비로소 나타난다는 것이다.   대개는 그 자녀 또는 수 대를 지난 자손들에게 그 덕이 보상되는 수가 있어서 조선 백성은 매우 깊고, 높고, 후하고, 무게있는 백성이었다.   그러나 현대와 같이 이 백성이 천박하고, 경솔하고, 야속하게 되었음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지금은 반도 안에서 은덕이라는 말조차 듣기가 얼마나 희귀한가?  전에 기독교가 전래하기 전에는 은밀하게 덕을 쌓아둘줄알았던 백성들이 이제 기독교 전파 50년 후에는 은덕은 고사하고 백지 한 장보다도 더 엷은 백성, 아침에 저녁을 기약할 수 없는 일시적인 백성이 되고 말았으며 하나님을 기다리기는 고사하고 '하나님이 없다' 하며,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어찌 지식이 있으리요?' 하는 어리석은 백성으로 변해 버렸다.    

슬프다, 이 결과가 무엇에서 유래하였으며 이 책임은 어디에 있을까?   만일 주일학교에서 많은 연보를 낸 아동들에게 상품을 수여하며, 교회에서 다액 헌금자를 우대하며, 교인의 머릿수 보고와 선교비의 금액이 비례하는 등 천박한 교사들의 언행이 그 책임의 일부를 분담하여야 한다면 그리스도의 충복을 자임하는 자들이 주 예수 앞에 깊은 회개가 없을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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