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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울 수 있는 사람
| 現代文보기 | 原文보기 | 성서조선 第 59 號 (1933年 12月)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배우고 때로 익히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라는 구절은 어릴 때에 들어서인지 사실 기독교의 요한복음 3장 16절보다도 더욱 외우기 쉽고 마음에 꼭 들어맞음을 느끼는 수가 있다. 특히 영적 능력이 있다는 신자, 고등 과정의 정통적 신조를 자랑하는 신자를 대할 때마다 우리는 기독교에 염증이 생기고 유교를 동경하는 마음이 일어남을 깨닫는다.
공자는 안으로는 ‘마음에 내키는 대로 해도 거리낌이 없었다’는 경지에 까지 이르렀고 밖으로는 3,000명의 제자들이 따랐다. 그런 공자도 평생토록 배우고 또 배울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었다고 했다. 공자의 해면 조직같이 부드럽고 신축성이 좋은 그 흉금이 한없이 그리워진다.
사람이 종교적 신앙이나 사상적 신념을 가질 수도 있다. 없기보다 낫다. 그러나 이 신앙이나 신념 때문에 그 심정이 바위 덩어리보다도 딴딴하게 굳어서 다시는 가르침을 받을 수 없이 된다면 이것은 다시는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다. 산돼지 쓸개를 먹은 다음에는 다른 약은 효과가 없다고 하거니와 신앙적으로 굳어버리는 병에는 어떤 약도 효과가 없다.
이 고질병 환자들은 가끔씩 보이는 젊은 유물론자들처럼 설익었다. 또한 미숙한 만큼 열렬하다. 이들의 눈에는 어른도 없고, 선생도 없다. 오직 옳은 것은 자기뿐이요, 귀한 것은 자기의 주장이요, 자기의 기도가 제일 강하다고 확신한다. 이들은 다른 이의 신앙을 헤아리며 코웃음을 친다. 눈에는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향할 때와 같은(사무엘 상 17장) 필승을 확신하는 섬뜩함이 빛난다.
이러한 무시무시한 신앙의 병이 널리 퍼지는 것에 대해 우리는 깊이 반성해야 한다. 비록 천당의 윗자리에 오르지 못할지라도 아직 배울 수 있는 인간으로 살고자 한다. 어느 부문의 학술이든지 어느 교파의 주창에든지 감히 쓸모 없다고 속단치 말고 거기에서 배우고 얻어서 살과 피를 만드는 자가 되고자 소원한다. 우리가 강습회를 여는 것도 지식을 자랑하자는 것이 아니고 서로 배우려는 것이다.
‘성서조선’ 또한 오늘도 배우고 내일도 배우려는 자의 기록일 뿐이다.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 박사에게는 쓸데없는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만나는 모든 사람과 접하는 모든 물건을 다 스승으로 삼을 수 있었다고 한다. 원컨대 우리도 한없이 부드럽고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 배우고 또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