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들이 어렸을 적 일이다. 담임 목사님은 유난히 두 아이들을 사랑해 주셨다. 그리곤 '욥의 딸' 이란 별명을 붙여 놓곤 그렇게 부르셨다. 기도할 때도 '욥의 딸'들 처럼 잘 자라라고 기도해 주셨다. 참 듣기 거북하였지만 표현은 하지 못하고 맘속으만 그 좋은 이름 다 놔두고 하필이면 욥의 딸이 무어란 말인가? 이왕이면 '에스더' '리브가' '사라'.... 그렇게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시곤 '욥의 딸'이 뭐란 말인가? 그럼 부모인 우리는 '욥'이란 소리인데 욥처럼 갖은 고난을 격으란 말씀인가? 싶어 늘 섭섭하기만 했었다.
세월이 흘러 환난을 겪우며 수시로 그 목사님이 떠올랐다. 한참 멋부리고 싶은 시절을 만난 아이들에게 변변한 옷가지 한번 사줘보지 못하고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으니 몇년동안 찾아가지 않은 손님들의 옷을 정리하여 아이들에게 어울림직 한 것들을 가져다가 아이들 몸에 딱 맞게 고쳐서 주면 그걸 그렇게도 좋아라 하는 딸들을 보며 맘속은 늘 울음이였다. 집이 없어 삼단요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 마다 다른 소원없고 그저 푹신한 침대에 뉘여 보았으면 좋겠다며 가슴 쓰리게 기도했던 시간들, 아르바이트 하랴 공부하랴 시간이 모잘라 잠이 부족하여서 어지러워 하는 아이들을 볼 때, 무거운 것을 너무 많이 들어 어깨에 근육이 단단히 뭉쳐버렸고 오래도록 서 있는 바람에 다리가 부어올라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맘은 무너져 내리는 것 같고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킬 때도 '욥의 딸'이라 별명지어 불러 주셨던 그 목사님이 떠오르곤 했다.
하나님 택하신 족속들은 모두가 '욥'이 아닐까란 생각을 종종해 본다. 인생 사는 동안 슬픔과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 각자에게 알맞게 훈련하시어 하나님의 사랑을 가주르쳐 주시려는 특별 개인교습인 것 같다. 환난이 무섭고 싫어서 예수 믿기 시작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였는지... '욥의 딸'이란 별명 앞에서도 행여 욥처럼 불행을 겪을까 두려워서 목사님께 못내 섭섭했던 나를 돌아보니 얼마나 환난을 싫어하고 무서워했는지를 알 것 같다. 그저 예수 잘믿고 한평생 사는 동안 편안하게 평탄하게 살아가고 아이들 잘자라 세상에서 제법 우뚝하게 서 있어주길 바랐던 나, 그렇게 살다가 국화향내 가득한 장례식장에서 참 한세상 잘 살다가 갔다라는 뒷이야기 듣고 싶었고 푸근한 하나님 품속에서 남겨져 있는 가족들과 천국에서 만날날 기다리면 되겠다고 생각했던 철없는 신앙을 가졌던 나를 돌아보며 씽긋 한번 웃어본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을 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이렇게 욥처럼 고백되어지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배려의 손길이 여러 환난들이였음을 알 것 같다. '욥의 딸'이라 별명붙어 불리웠던 두딸들도 남은 여생 속에서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얼마나 귀한지를 더 절감하는 딸들이 되길 소원한다. 우리 모든 인생은 이모양 저모양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뵐 수 있도록 각별하신 사랑의 손길이 환난 속에 빼곡이 수놓아져있음을 깨닫고 아버지의 품속에서 평강을 주시려고 계획하신 이 놀라운 시간들을 감사하는 딸들이 되길 기도해 본다. 그 품속에 품으시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값진 보혈을 흘리게 하신 그 사랑을 더욱 감격하는 아이들이 되길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