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3:6-8) 예수님도 설명할 수 없는 성령의 거듭남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구원 토론 (4)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3:7-8)
설명이 불가능한 중생.
신자들이 성경에서 가장 알고 싶은 사항은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구원의 길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손에 잡힐 듯이 확실하고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은혜를 믿어야만 한다고 말하지만, 이천 년 전의 인물과 사건이라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최소한 자신이 구원받았는지 여부를 스스로 점검해 볼 수 있는 쉽고도 분명한 기준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마저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에 관해 직접 가르치신 니고데모와의 대화부터 시종일관 선문답처럼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아주 단순하게 가르쳤습니다. 니고데모로선 구원에 관해 생전 처음 듣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주님이 곧바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에 놀라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이라고 애매모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주님의 뜻은 육체적 재탄생이 아니라 영적인 회복이므로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원죄 하에 태어난다는 뜻으로, 그 영이 하나님과 단절되어서 이미 죽어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육의 사람으로 살다가 죽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기에, 영으로 다시 태어나서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도 지금 주님과 대면하고 있는 이 시점에선 아직 육에 머물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영적 교통이 불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율법 선생으로 성전 제사를 성실히 드리고 모세의 계명을 충실히 지켰어도 여전히 천국 문을 등지고 서있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느끼고서 주님께 상담을 요청한 것입니다. 지금껏 어떤 의로운 방도를 동원해도 자기 영혼의 갈증과 공허함을 해소할 수 없어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주님께 받은 해법은 성령이 사람의 영혼을 거듭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배워서 그대로 따라 행할 수 있는 방안이 전혀 아닙니다. 어쨌든 그로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할 필요성과 또 성령의 역사이므로 통제 가능한 차원이 아니라는 것까지는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나는지 주님이 육하원칙에 따라 자세히 설명해 주길 바랐을 것입니다. 주님은 또다시 알 듯 모를 듯 성령의 역사를 바람이 부는 현상에만 비유했습니다.
그러나 어폐가 있지만, 이 비유는 주님으로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설명이었습니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내면에서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어떻게 상호 교통 작동하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단순히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과 생각으로 도출해 낸 결정만 알 수 있습니다. 거기다 흔히들 '내 생각 나도 몰라'라고 말하거나, 자기 생각과 다른 행동을 할 때도 많습니다. 그런 판국에 하나님의 영이 인간 내부에서 일으키는 초자연적인 변화를 예수님이 아무리 정확히 설명해 준다 쳐도, 21세기의 최첨단 뇌과학자들조차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절묘한 바람의 비유.
그러나 주님이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설명인지라, 자세히 살피면 구원 여부를 우리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충분한 기준이 됩니다. 물론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했으니까, 영으로 거듭나는 그 과정은 인간으로선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이미 설명드린 대로, 인간의 뇌가 수십 분의 일 초도 안 되는 찰나에 어떤 경로를 거쳐서 특정한 생각이나 결정을 도출해 내는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지 않습니까? 거기다 구원은 인간 외부에서 하나님의 영이 작동하는 차원이라 더더욱 그 과정을 알 수 없습니다.
오늘날은 온도, 습도, 기압, 지형 등의 변수를 종합해 유체역학적으로 계산하면 바람이 언제 어디서 어떤 속도와 방향으로 부는지 예보가 가능하며 비교적 정확합니다. 예컨대 미국 엘에이시는 매년 일정한 때에 계곡 돌풍이 거세게 불기에 산불 주의보를 미리 내립니다. 올해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 바람의 강도가 너무 세어져서 전쟁에서 폭격을 맞은 것처럼 처참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며칠 전부터 강력한 경보를 내렸으나 자연의 엄청난 위력 앞에 인간은 너무 무력했습니다.
고대에도 농사를 해본 오랜 경험으로 일 년 중 특정 시기에 부는 계절풍은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바람은 예측이 불가능했고 막상 바람이 불고 나서야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람이 ‘임의로 분다’라고 했는데, 흥미롭게도 바람이 행동의 주체가 되는 의인법으로 표현했습니다. 바람은 지금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므로, 구원을 주려고 거듭나게 해주는 사람을 하나님이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작정하신다는 뜻입니다. 니고데모가 지금 주님과 영적 상담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은 주님을 대적 비방하는 바리새인 중에서 하나님이 그를 택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람이 주어이므로 어디에서부터 어디로 어떤 속도로 불지도 성령 하나님이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각 개인에 따라서 구원하는 시기와 방식이 각기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 쪽에서 계획하거나 결정할 수는 절대로 없고, 심지어 소원한다고 해서 반드시 구원받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택한 자는 그 인생에서 반드시 구원의 은혜를 받아야만 하는 가장 절실한 시기와 가장 합당한 방식으로 구원합니다. 성령이 오래전부터 니고데모의 마음 문을 두드렸으며 오늘 밤에 예수님을 직접 만나봐야겠다고 결심하도록 인도한 것입니다.
바람은 이번 엘에이 사태처럼 폭풍도 있지만 대부분 부는 둥 마는 둥하는 미풍입니다. 예컨대 말기암에서 간절히 기도하여 기적적으로 낫거나, 교통사고로 차체가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주님의 환상을 보면서 멀쩡하게 살아나는 등, 간증 거리가가될 만큼 극적인 체험으로 구원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화끈하게 구원받는 자는 폭풍이 드물듯이 아주 소수입니다.
반면에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가 훨씬 더 많습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십자가 복음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 충분히 동의가 되며 가슴에 찔리면서 주님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결심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실제 삶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고 수시로 죄를 범하니까 내가 과연 구원받은 신자가 맞는지 스스로도 의심스럽습니다. 주님부터 구원을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에 비유했으니까, 구원의 확신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신자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극적이고 초자연적인 체험을 한 신자는 참된 구원을 받았다고 부러워하고, 자신은 바람이 불었는지도 모를 정도라 구원에 의심을 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큰 바람은 쓰레기가 날리고 나무가 부러지는 등 가시적인 증거가 남지만, 살랑살랑 부는 미풍도 귀밑을 간지럽힌다고 표현하듯이 얼마든지 인식할 수 있있습니다.
주님도 바람의 소리는 들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바람이 불고 있거나 지나갔다는 사실은 압니다. 성령이 역사해서 거듭난 후에는 자신이 거듭났다는 사실을 본인은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컴퓨터의 복잡한 연산 과정은 몰라도 나중에 정답을 제출해 주듯이, 우리 또한 성령의 거듭나는 그 과정은 몰라도 구원의 정답을 이미 받아서 쥐고 있다는 사실은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도 성경에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그 행간을 추측해 보면 오순절 후에 성령으로 거듭남으로써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분명히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어떻게 아는가?
이는 논리적으로만 따져봐도 너무나 자명한 이치입니다. 성령이 사람을 거듭나게 해주어야만 한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영적인 차원에선 그 사람에게서 고쳐서 쓸만한 것이 하나도 없기에 모두 다 폐기 처분하고서 완전히 새사람으로 바꾸어준다는 것입니다. 이전의 자기와 이후의 자기가 영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뜻인데, 제삼자는 몰라도 본인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해하기 쉽도록 제 경우에 비춰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새해를 맞으면 이전보다 더 착하게 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잘해야겠다고 항상 결심합니다. 한 해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해 보는데 연말이면 어김없이 제대로 열매 맺지 못했다고 후회합니다. 그럼에도 제 노력이 부족했던 탓이므로 새해에는 조금 더 힘써보겠다고 매번 결심하고 어느 정도 성과도 냈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저는 법을 어긴 적이 없는 아주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고는 참 안 되었다고 ‘쯧쯧’ 혀는 찼어도 진정으로 함께 아파해 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예수를 믿은 후로 생전 처음 눈물까지 흘리며 그런 이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는데, 이전의 저로선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기도를 하고 있는 저를 제가 발견하고는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공교롭게도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성령이 거듭나게 하는 일을 놀라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제 경우에 비춰보면 거듭남의 과정은 몰라도 그 결과는 놀랍다는 뜻도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일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며 설교 말씀을 통해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무 즐거웠습니다. 그 내용이 전혀 슬픈 이야기가 아닌데도 가슴이 먹먹해지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그런 일들은 제가 계획은커녕 아예 상상도 못 했던 터라 외부의 어떤 힘이 저의 내면을 변화시켰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경우는 아주 단순한 예이고 더 확실한 판단 기준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남으로써 너무나도 명확하게 이전과 정반대의 사람으로 바뀐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 일당을 유대 사회의 경건한 종교 질서를 무너트리는 이단이므로 하나님을 위해서 반드시 박멸시켜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듣고는 바리새인 랍비로서 당시의 관습대로 하나님을 모독한 자라는 유효한 판결을 내려줌으로써 기독교 최초의 순교 사건을 주도했습니다. 자신이 직접 돌을 들지는 않았으나 군중들이 힘껏 돌을 던지라고 곁에 서서 웃옷을 맡아주었습니다.
유대 지역에선 더 이상 핍박할 거리가 마땅히 없어서 대제사장의 허가를 받아 시리아 다메섹으로 신자들을 잡으러 떠났습니다. 그 길을 가는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에서 아주 강력한 빛 가운데 임재해서 그의 눈을 멀게 했고, 일행의 부축을 받고서야 겨우 다메섹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빛을 완전히 잃어버려서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3일째에 자기가 핍박 말살하려 했던 이름도 없는 예수 믿는 한 신자가 찾아와서 기도해 주자 시력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사실상 주님처럼 3일간 죽었다 살아난 셈이었습니다.
바울은 나사렛의 한 이름 없는 랍비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안 되는 계명을 가르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원수인 로마를 물리치고 독립해서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시키고 싶은 온 민족의 열망을 무너트리고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예수가 당신의 실제 원수인 자기를 단번에 봉사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그 자리에서 죽일 수 있는 능력도 가졌다고 쉽사리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 분이 자기를 죽음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갔다가 다시 살려 주었습니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당신의 가르침을 바울에게 직접 실현해 보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선생인 바울은 로마뿐 아니라, 동족들마저 단지 율법의 안식일 규례 같은 것들을 온전히 지키지 않는다고 정죄하며 원수 취급해 왔는데도 말입니다. 그 전에 주님은 당신의 예고대로 죽음에서 스스로 부활하셨기에 공사역 중에 당신이 설명한 그대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인 당신을 살아서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는 예수의 가르침이 절대적 진리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삼 일간 자기가 간접적으로 접한 예수님의 생전의 가르침과 사역을 구약성경의 말씀들과도 대조해 봤을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103:10,11)라는 고백에 바울은 비로소 체험적으로 동의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스스로 의롭다고 믿고서 구원받을 자신이 있다고 땅에서 큰소리쳤으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너무나 크신 인자가 자신의 숨겨진 추악한 죄들을, 동족을 원수 취급했던 죄도 포함해서 일일이 갚지 않고 당신께로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길 기다렸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요컨대 그는 자기가 믿었던 유대교와 율법에서 하자가 없다고 지금껏 큰소리쳤었는데, 그런 종교적 도덕적 의로움이 구원받는 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였음을 확인했습니다. 자기들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야말로 진리요 길이요 생명으로 구원을 얻을 유일한 이름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65:3,4)라는 다윗의 고백도 온전히 절감했을 것입니다.
부활 예수님과의 극적인 만남과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바울이 계획은커녕 꿈도 꾸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주도하여 행한 일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의 외부에서 초자연적인 간섭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도 초자연적이지만, 자신의 종교관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완전히 정반대로 새롭게 된 것부터 성령의 초자연적인 간섭이었습니다. 인간 사회의 교육과 관습과 법률과 종교로 사십여 년 형성되어온 바울이라는 한 인격체 전부가 성령으로 거듭나서 이전과 정반대의 인격체로 바뀐 것입니다.
거듭남의 첫째 증거
그런 그가 성령이 거듭나게 하는 역할을, 예수님의 본문 비유로 말하면 바람이 불고 난 결과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1-3)
신령한 일에 관해서 가르쳐 주겠다고 하면서 이중 부정으로, 즉 최고의 긍정으로 강조했습니다. 신자라면 반드시 누구나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이라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이방인 신자들을 대상으로 우상 숭배 때는 절대 알 수 없었던 사항이 바로 성령으로만 예수를 주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주’(the Lord)는 자기 인생 전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자신의 목숨도 언제든 앗아갈 수 있는 고대의 왕 같은 분이라고 진심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 고백은 오직 성령이 간섭해야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는 로마의 사형수 인간에 불과해서 절대로 주라고 시인하지 못합니다. 예수님 대신에 이 땅에 오신 성령 하나님이 인간에게 역사해 주어야만 주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이방인처럼 우상을 숭배한 적은 없고 여호와 창조주 유일한 하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기 전이라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가장 열렬하게 주장했으니까, 이방인들과 같은 위치였습니다. 천국 보좌에 좌정하고 계시는 온 세상의 주이신 예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를 일대일 인격적으로 대면해 주려고 잠시 땅으로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그런 생생한 자기 체험에 의거해서 성령의 첫째가는 역할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정확하게 가르친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또한 너무나 자명한 이치인데 지금 토론의 주제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얻으려면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추가로 설명한 대로 당신의 십자가 대속 죽음과 부활에 드러난 은혜를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서 따라야 합니다.
바꿔 말해서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신앙 고백만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자신의 주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라는 존재, 삶, 인생 전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거룩한 보호, 통치, 인도에 온전히 맡겨야 하고, 또 그런 맡김의 열매가 현실 생활에서도 서서히 맺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가장 먼저 진심으로 신앙 고백을 한 자는 수제자 베드로였으나, 오순절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스승을 세 번이나 외면 부인했고 부활마저 믿지 못했지 않습니까?
바울은 극렬한 예수 핍박자에서 열렬한 예수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3일간 실명된 데서 빛을 다시 찾자 곧바로 예수는 부활의 주요, 생명의 주요, 그의 거룩한 이름을 믿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고 십자가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신자들을 체포해서 진멸하려 했던 바로 그 도시에서 며칠 만에 정반대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성령의 첫째가는 권능이 바로 신자로 예수를 주라고 주변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가 성령으로 거듭났는지 스스로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기준은 바울입니다. 예수가 주는 것 없이 너무 싫고 밉다가, 복음을 전해 듣고 성경을 배워나가면서 예수가 이유 없이 너무 좋아지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향한 신자만의 짝사랑이 절대 아닙니다. 주님이 신자를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어서, 지금의 니고데모처럼 그 인생을 거룩한 계획에 따라 당신만의 은총과 권능으로 간섭 인도하고 계심을 풍성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먼저 세상에 없는 수준의 사랑을 베풀어 주었기에 신자로선 가장 먼저 그 사랑을 주변에 저절로 자랑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사랑을 받음으로써 신자의 영혼에 이전과 정반대로 바뀌는 가장 핵심적인 변화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껏 세상으로만 향했던 자신의 중심이 어느샌가 하나님 쪽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예수님이 기뻐하시고 소망하시는 모습과 방향으로 바꾸어서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율법에 매이지 않고 대신에 오직 예수님의 은혜 안에 거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증거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고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든 그분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바울이 가르친 대로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살게 되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변화가 생겼다면 본인이 절대 모를 리 없습니다. 물론 현실 삶의 고달픔 때문에, 또는 이전 불신자 때의 종교관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아서 복음 전파를 당장 실천에 옮기지 못할 수 있습니다. 때로 자신의 죄성과 세상 유혹에 져서 옛날 모습으로 잠시 돌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의 마음 중심에는 반드시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그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싶은 소망 내지 열정은 있는 법입니다.
너무나 심각한 이야기
지금 아주 심각한 말씀을 드리는 중입니다. 만약 신자가 자신이 전혀 딴사람이 되었다는 변화를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아직 거듭나지 않은 것이, 혹은 거듭나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교회 생활에 아무리 충실해도 자기 자신에게서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점을, 그것도 외부 힘에 의해 생긴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다면, 아직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의지로 믿어 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중일 뿐입니다. 당연히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없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신자가 기도해서 현실 삶의 문제와 고난을 해결 받고 또 인간관계에서 생긴 상처나 갈등에서 위로받으려는 의도로만 교회에 출석합니다. 조금 잘 봐주어야 세상이 죄로 추하게 타락해져 가는 모습이 싫어서 조금 더 의롭게 살아보려고 주님의 지혜로운 가르침을 따르려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믿음으로 이전보다 조금 더 풍요로워진 현실 삶을 살거나, 조금 더 의로워진 모습으로 행동하는 것만 소망합니다.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서 자기가 봐도 놀라울 정도의 새사람이 되고 싶다거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소원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신자에게 원하시는 모습인 줄, 심지어 그것이 구원받은 증거인 줄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 자신의 영적 상태를 가장 쉽고도 명백한 바울의 예에 비추어서 다시 점검해 봐야 합니다. 바울처럼 사나 죽으나 예수를 위해야 하고 만나는 이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싶은지 따져보십시오.
바울이 버겁다면 자기 믿음이 본문의 니고데모 정도라도 되는지 비교해 봐야 합니다. 그는 현실 삶에 큰 고난이 없었고 정서적 안정도 유지하며 도덕적으로 의롭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체면과 위신을 무릅쓰고 몰래 예수님을 만나서 진솔하게 의논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현실적 정서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어도 과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진정한 갈증이 있습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자기는 예수 믿기 전의 자신과 전혀 달라진 사람이라는 확신이, 최소한 그렇게 되고 싶다는 소망이라도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자기 전부를 다시 벌거벗겨 내어드리며 성령으로 거듭남의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고선 아무리 교회 생활 열심히 해도, 성전 제사와 율법 준행을 성실히 행했어도 허망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니고데모처럼, 죄송하지만 천국 문을 등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 정말로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겸손히 인정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은혜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신자는 많습니다. 그런데도 완전히 새사람으로 바뀌었다고 여겨지지 않거나 구원의 확신이 흔들린다면, 그 확신이 베드로의 최초 고백처럼 입술에만 머물렀던 것인지 혹은 오랜 교회 생활에서 타성처럼 굳어진 종교 사상은 아닌지 정말로 심각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굳이 다른 이와 상의하거나 성경 말씀으로 따져볼 필요 없습니다.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바뀌었다면 자신은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령으로 실제로 거듭난 사람은 성령이 영원토록 내주해 주시기에 이전과 동일한 모습으로 절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성령이 그렇게 머물도록 놓아두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강력합니다. 어떤 사람도 한순간에 얼마든지 바울의 경우처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불신자가 볼 때 뭔가 자기들과 다른 사람이라는 점을 알 수 있도록 바꿔주십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어도 다른 사람이 먼저 예수 믿는 신자라고 알아봐 주게 됩니다. 교회 생활의 충성도와 무관하게 바로 그런 자가 가장 믿음이 좋은 신자입니다. 또 그것이 자기 구원을 점검하는 아주 분명한 기준이 됩니다.
(2/9/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