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고 싶은 내용 = 곧 전달방법
이것이 맞을까 아닐까라는 고민을 하게 만든다.
어떤 사람은 당연히 아니지라고 결론을 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맞다고 여겨진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검색창에 검색했을때에 수많은 결과가 나오듯이
어떤 사람은 그 사람(화자 혹은 더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이 아무리 ‘진심(내용)’이라고 하더라도
나(청자)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그것이 무슨 진심이냐고 한다. 전달되지 않는 진심은 진심이 아니라고 한다.
그 사람은 나를 너무나 좋아하고 또 사랑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 모르고(혹은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내가 그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것들만 해주기 때문이다. 한 특정 연예인을 맹목적으로 좋아하는것처럼, 그리고 그와 그녀를 마음속에 그리면서 그가, 그녀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혹은 내가 주고 싶은 것들을)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그것이 진짜로 진심이고 사랑일까?
또 다른 경우는 그 사람은 나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말 그대로 외적인 한계에 부딪히는 경우이다. 그는 나에게 그의 진심만큼이나 해주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그는 적어도 내가 원하는 만큼의(양과 질적인 면에서) 시간과 물질을 쏟지 못한다. 이것은 굳이 남녀관계에 국한되지 않고 가족과 교우관계에도 적용이 된다.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주고 싶은 것을 제한을 두는 경우가 있을까? 하지만 여건상 그것을 절제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남녀관계에서는 저 말이 때때로 무시되어지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한 사람을 너무나 사랑해서 깡패가 직업을 바꾸고 백수가 직업을 갖고 좋아하는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런 저런 공모전에 도전하다가 대상까지 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외적인 공세(방법)가 곧 사랑(내용)이다라고 방점을 찍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그 과정중에 한 개인이 변하지 않는 사랑(과정이 없는)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궁금하다. 어떤식으로든 그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자각했으니까. 그럼 대체 뭐가 맞는걸까…?
상황논리가 아니라 “전하고 싶은 내용 = 전달 방법”, 이 전제가 곧 진리라 여겨지는 경우는 저 내용을 이행하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달린것이 아닐까한다. 누구나 오해받고 싶어하지 않고 누구나 자신의 뜻이 곡해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의 뜻이 온전히 상대방에게 전달되기 위해서 자신을 스스럼없이 굽히는 행위를 하겠다고는 쉽게 마음먹지 못한다. 그냥, 안된다. 이것은 생래적인 것이다. 그래서 오직 ‘사랑’으로만 극복되어질 수 있다. 말장난 같지만 사랑이 곧 내용이고 방법론이다. 사랑(내용)을 전달하고 그리고 전달(소통)하기 위해서 사랑으로 극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