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5:1-6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비결

조회 수 526 추천 수 35 2009.09.19 17:3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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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비결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5:1-6)


인생살이에 환난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환난이 우리가 스스로 선택했거나, 귀책사유가 우리에게 있지 않으니까 더 고통스럽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길을 택했다면 사실은 환난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그 고난을 감당할 수 있거나 감당하겠다고 각오를 하고 그 길을 택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권투 챔피언이 되겠다고 준비하는 자가 아무리 그 훈련이 지옥 같아도 환난이라고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또 잘못의 원인이 분명히 우리에게 있다면 반성, 수정, 재도전, 아니면 체념하면서 담담히 그 환난을 당하면 그만입니다. 비록 육신적 현실적 고통은 괴롭지만 자기 잘못인데 어느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평안해질 수 있습니다.

환난이란 결국 내 쪽에 전혀 잘못이 없는데도, 아무런 대비책을 세울 여지도 주지 않고 불시에 들이닥치면서, 해결할 대책이 도무지 감감할 때를 말합니다. 그래서 환난의 특성은 그 결과가 부정적으로 끝날 것이 거의 확실하거나 최소한 그 결과야 어떻게 되든 아주 힘든 과정을 겪지 않고는 도저히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환난을 겪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실패할 가능성 및 그 여파와 그런 과정 중에 겪을 고통을 최소화시키기에 급급합니다. 언젠가는 밀어닥칠 여파와 또 반드시 겪어야 할 고통이 미리부터 생각나서 불안과 염려로 지새게 됩니다.

자기가 선택한 길이든, 자기 잘못으로 겪는 것이든, 예상 밖으로 들이닥친 것이든 어차피 겪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면 그 육신적 현실적 고통은 정작 크지 않습니다. 인간은 감정을 지닌 생각하는 존재인지라 앞에서 살펴본 대로 내면의 고통이 더 큽니다. 결국 환난의 실체는 현실에서 누구나 다 겪는 어려운 문제 자체라기보다는 그로 인한 정신적 고통입니다.  

우리 스스로 환난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천하 바보가 아닌 다음에 그럴 리는 없습니다. 대신에 환난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러나 환난에 대한 반응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환난이 가져오는 모든 객관적 상황은 신자, 불신자에게 동일하지만 그 반응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달라져야 합니다.

성경은 지금 어떻게 다르다고 합니까? 환난 중에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환난이 끝난 후에  즐거워하지 못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믿음이 전혀 필요 없기에 불신자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당연히 그들과는 달리 환난 중에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럼 솔직히 여러분은 그럴 수 있습니까? 또 그럴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환난에 대한 반응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해서 자기 의지를 동원해서 낙관적, 긍정적, 능동적,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전환해야 합니까? 예컨대 컵에 물이 반쯤 남았을 때에 “물이 벌써 반 밖에 남지 않았네.”라는 염려를, “아직도 물이 반이나 남아 있네.”라는 기대로 바꿔 먹어야 합니까? 그렇게 하는 것도 동일한 외부 상황에 대해 자신의 반응이 바뀐 것은 분명히 맞으며 또 그렇게 하면 환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도 어느 정도 생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하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무엇보다 무릇 마음을 지키라고 합니다. 또 모든 근심의 뿌리는 마음에서부터 온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심리학적 요법을 동원하라고 한 적은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렇게 스스로 마음을 바꿔 먹는 것으로 환난을 이겨낼 수 있다면 그 상황에 대한 연출자와 주연배우 모두가 자기, 즉 인간이 됩니다.

불신자는 환난이 닥치면 돈, 권력, 지식으로 해결하려 듭니다. 경우에 따라 그 구체적 방법이 각기 다를지 몰라도 결국은 사람의 힘에 의지합니다. 신자가 스스로 자기 마음을 바꿔먹는 것도 사람의 힘입니다. 불신자와 환난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고급스런(?) 내면적차원이 되었다 뿐이지 실제로는 다를 바 하나 없습니다. 아니 불신자 가운데도 동일하게 마음을 바꿔 먹는 방법을 사용하는 자들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신자는 달라야 합니다. 가장 먼저 그들과 근본 마음부터 달라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스스로 생각을 바꿔 먹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의 연출자와 주역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근본인식이 확고하게 서 있어서 환난에 대한 반응도 그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불신자가 환난 중에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이유가 아무리 돈, 권력, 지식으로 해결해 보려 한들 제대로 해결이 안 되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들은 환난의 연출자가 따로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평생을 가도 환난에 대해 제대로 반응할 수 없습니다. 오직 돈, 권력, 지식을 최대한도로 모아 환난으로 겪을 괴로움을 최소화 시키려고만 애씁니다.

당연히 신자는 환난의 연출자가 하나님임을 알게 된 자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여 하나님이 환난을 없애주기만 바랍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여전히 환난이 끝나야만 즐거워질 것 아닙니까? 기도는 당연히 해야 하지만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달리 있습니다. 자기는 이미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 오직 하나 때문입니다.

그 화평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신자가 아직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대신 죽여서 이룬 화평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까지 해서 이룬 신자와의 화평을 스스로 깨트릴 이유는 전혀 없지 않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恩賜)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돈, 권력, 지식이 절대로 환난의 연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인간의 마음도 아무리 심오하고 신령한 차원으로 변해도 그럴 수 없습니다. 환난의 연출자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모든 것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기도하여 환난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돈, 권력, 지식을 달라고 합니다. 그것을 받아 자신이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기도하여 자기 마음을 바꿔달라고 합니다. 심리 치료를 하나님더러 시켜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나마 조금 나은 편이지만 아직 온전한 신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돈 대신 생각으로 환난을 이겨보려고 한 것뿐입니다.

심리 치료도 때로는 필요하고 특정 케이스에 따라 아주 중요하지만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그보다 더 깊은 내면의 영혼이 바뀌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이 세상의 어떤 환난도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이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고통을 직접 체휼하시고 십자가에 담당하셨지 않습니까? 나아가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앞에 겸손하게 나오는 자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환난을 없애준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사람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방식으로만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겪게 마련인 환난도 당신께서 연출하시기에 당신과 이미 화평 된 것을 확신하는 신자의 일이라면 어떤 환난이라도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어 내시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그 방식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면 환난을 넉넉히 이기되 환난이 끝난 후가 아니라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게 됩니다.  

교회는 반드시 교회다워져야 합니다. 기독교적 특성을 강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성경대로 가르쳐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이야기만 하고 있기에 교회도 십자가 복음만 증거 해야 합니다. 환난 또한 신자가 예수님이 아니고는 제대로 이겨내지 못하고 특별히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는 방안은 십자가 외에는 결코 없습니다. 그 주님의 십자가가 이 아침에도 너무나 귀하고 소중하지 않습니까?

5/10/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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