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6:19,20 늑대는 기르는 대로 자란다.

조회 수 492 추천 수 13 2009.09.19 18:2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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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는 기르는 대로 자란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롬6:19,20)


체로키 인디언 추장이 부족의 금령을 어긴 손자를 타이르면서 왜 그가 잘못을 범했는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두 마리의 늑대를 키우는 것과 같다. 한 마리는 선하고 다른 한 마리는 악하다. 두 마리 모두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한다.” 그 말을 들은 손자가 어느 늑대가 이기느냐고 물었더니, “그야 당연히 우리가 키우는 늑대지.”라고 추장이 대답했습니다.

예수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한 인간에게 있어선 엄청난 일입니다. 일생일대의 단 한 번 있는 사건입니다.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일으킨 기적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존경 받는 위대한 인물이라도 예수가 없다면 그는 자신을 높이려는 정욕과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려는 더러운 욕망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악 중에 출생했고 죄중에 잉태되었습니다.”(시51:5)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3:10)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모두 위에 임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게”(벧전1:24) 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자연인은 마침내 병들고 부패하여 사망이라는 죄의 삯과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골고다 십자가 이전의 인간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위대하고 뛰어난 사람이라도 모두가 죄인이기에 구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인류에게 유일한 희망은 그래도 죄악 중에 있는 인간에게 긍휼을 거두시지 않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제대로 아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이 땅에 직접 내려오셔서 구원을 베푸셔야만 했습니다.      

구원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 행동하시는 하나님, 자비하신 하나님이 한 죄인을 찾아 오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도록 손수 그 죄인의 속에 큰 변화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인간 쪽에서 시작한 일이 아닙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주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이 한 비천한 자의 영혼에까지 찾아 오셔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흑암과 죄악과 사망에 눌려 있던 자를 일시에 빛과 의와 생명이 넘치는 새 인간으로 재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는 죄의 종에서 해방시킨 것입니다. 사단의 멍에를 완전히 벗겨주고 대신에 예수님의 멍에를 메게 해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멍에는 가볍고도 쉽습니다. 복음(good news)이라서 무슨 죄든 회개만 하면 용서해주고 구원이 영원히 취소되지 않아서 쉽습니까?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면 아무리 가볍긴 해도 멍에를 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성경은 수고와 무거운 짐을 벗고 예수님이 지어주는 멍에를 메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이제는 죄의 종에서 의의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의 종이 되는 것은 이전과는 그 방식이 다릅니다. 죄의 종, 즉 사단에게 결박되었을 때는 인간은 스스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인생사가 오직 죄로 시작해 죄로 끝마쳤습니다. 단순히 윤리적 잘못을  범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란 하나님을 배제한 채 인간이 혼자서 인생을 꾸려가려는 모든 체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던 지라 그분의 뜻과는 정반대로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이 얼마나 비참한 짓인지 전혀 깨닫지도 못하고 오히려 즐기기조차 했습니다. 사단이 옭아맨 멍에대로 끌려갔습니다. 어떤 면에선 모든 인간이 희생자, 피해자였습니다. 그 멍에를 풀 수단이 인간에게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런 멍에를 지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는데 주님이 오셔서 사단의 흉계를 십자가에서 깨트리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셔서 한 죄인을 간섭하여 생명을 다시 얻게 하여 의의 종으로 드려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의는 죄와는 달리 인간을 결코 노예로 삼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벌써 그것은 의가 아닙니다. 반드시 인간이 자발적으로 기꺼이 자신을 의에 드려야만 의로서 성립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구원이란 그동안 사단에게 일방적으로 편향 되었던 자유의지를 인간 스스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성령님이 회복시켜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제 그 의지를 사용해서 자신을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게”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종이 아니라 자유자로서 의를 선택하고 안 하고는 인간에게 달린 것인데 왜 성경은 구태여 의에게 종이 되라고 표현했을까요? 의에게 종이 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의지는 박탈시켜 놓고 맹종을 시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종이 되었던 이전의 삶과 정반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을 강조한 것입니다. 바울이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라고 했듯이 알기 쉽게 죄의 종과 대비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종이란 단 하나도 거절할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오직 주인이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온전히 따르기만 하는 것이 종입니다. 신자가 된 후에 의에게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키는 의로운 일이라면 거절하지 말고 무엇이든 하되 감사와 기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단과는 달리 그 일을 절대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해주실 뿐입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받은 후에도 신자의 속에는 인디언 추장의 표현대로 두 마리 늑대를 본인이 사육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화를 이루는 것은 본인 책임 하에 어느 늑대에게 먹이를 더 주느냐에 달렸습니다. 죽음으로 이르는 늑대는 굶어 죽이고 열매를 맺게 하는 늑대는 자꾸 먹이를 주어 살찌워야 합니다. 정말 피 흘리기까지 경건을 연습해야 합니다. 그것도 종처럼 그 의가 자연적으로 삶에 따라 나오게끔 훈련해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의가 오히려 신자의 종이 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신자도 악의 늑대에게 얼마든지 잡아먹힐 수 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신자 스스로 악의 늑대를 키운 것입니다. 회복된 자유의지를 사용해 신자가 자발적으로 의도적으로 심지어 지속적으로 불신자처럼 똑 같이 죄악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불신자와 그 외형적 모습은 동일한데 전혀 다른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불신자로선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입니다.

불신자는 죄의 노예가 되어 있기에 그 죄로 인해 자동적으로 사망에 이릅니다. 영원한 진노 아래에서 벗어날 길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을 고의로 배제한 완악한 삶을 즐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죄악에 빠져도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는 끝까지 유효하게 소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내주하신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괴로워하십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강권적으로라도 다시 빛의 자리에 나오게 역사합니다.

큰 환난이 닥치거나 중병에 걸리거나 인간관계 상처를 받거나 주위 성도의 기도를 통하거나 말씀 중에 은혜를 받거나 간에 각 신자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가운데로 되돌려 놓습니다. 신자 스스로 하나님을 고의로 끝까지 배반하겠다고 결심을 하지 않는 한, 최소한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던 자로서 다시 그 은혜를 받고 싶다는 아주 실 날 같은 소망만 있어도 그렇게 해주십니다. 세상 사람은 전혀 받지도 못하고 아니 알지도 못하는 이 은혜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합니까?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는 없느니라.”(롬6:15) 신자에게 언제 어디서 무슨 일에나 하나님의 긍휼이 유효하다고 해서 계속 죄를 짓는다면 부끄러운 구원이 될 뿐입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면목 없게 서게 되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 아닙니다. 죄의 열매가 신자를 다시 추하고 더럽게 만들 뿐입니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6:21)을 절실히 깨달았다면 다시는 우리 속의 악한 늑대를 더 살찌우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5/23/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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