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5;12 연좌제 같은 원죄(?)

조회 수 614 추천 수 29 2009.09.19 18: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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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좌제 같은 원죄(?)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기독교에선 모든 인간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원죄를 안고 태어나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길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아버지가 빨갱이면 아들의 활동마저 제약하는 연좌제를 연상해서 왜 아담의 죄에 대한 벌을 그와 아무 연관이 없는 아주 먼 후손들이 계속해서 받아야만 하느냐고 반발합니다. 나아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자가 아무도 없다고 인정해도 왜 그 죄를 자기가 회개하고 고쳐서 죄 사함을 받아야지 아무 하는 일 없이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따집니다.

원죄에 대한 성격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마치 아담으로 인해 후손들이 포악하고 방탕한 기질을 타고나 상습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두고 원죄를 안고 태어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자기는 죄도 짓지 않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사망의 형벌을 안고 태어났다니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의 가장 큰 특성은 죄를 범하는데 있는 것 이전에 그 심령에 교만과 공포가 항상 도사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그 교만은 자기가 남보다 뛰어나고 선하다는 우열의 비교에서 오는 것과는 성질을 달리합니다. 반드시 자기가 선한 일을 해야만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만입니다.  

물론 그런 생각은 인간 세상의 윤리로선 하자가 없기에 도덕적 수양과 훈련에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만은 그만한 교만이 없습니다. 그 생각이 자신의 끊임없는 낮춤과 훈련에만 적용된다면 다행이지만 오히려 정 반대로 작동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는 자기에게 걸맞은 대접을 마땅히 받아야 하거나 받고 있다고 고집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칭찬과 존경을 받고 있으니까, 최소한 크게 욕을 들어 먹고 있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절박성 내지는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 합니다. 나아가 오히려 하나님도 자신을 인정하고 상을 주어야 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그치면 다행입니다. 시쳇말로 착각은 자유니까 죽을 때까지 그런 착각 속에서 산다면 그야말로 자기 인생을 자기 멋대로 살았으니까 사후 심판은 어찌 되었든 제삼자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에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사실은 단 한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정신 이상자나 완전한 바보가 아닌 다음에는 자기는 죄와 전혀 무관해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자신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겉으로 선한 척 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그 영혼의 깊숙한 곳에는 본인이 의식하든 못하든 사실은 죄책감과 심판에 대한 공포심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본인이 정확하게 인식을 못하는 경우라도 그 공포가 영혼에 자리 잡고 있기에 그로 하여금 까닭모를 두려움 내지 초조감에 휩싸이게 만듭니다.

외적으로 매사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자신을 잘 알면서도 그 실체를 부인하려 든다는 것입니다. 정말 엄격한 의의 기준에, 본인이 하나님의 기준이라 인정하든 말든, 따르면 자기는 제대로 사람들의 존경과 절대자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쉽게 말해 자신의 실체가 다른 사람들 앞에 완전히 발가벗겨졌을 때에 다른 사람이 나를 더 이상 존경해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것이 죽기보다 싫은 것입니다. 지금껏 세상에 알려진  자기보다 진짜 자기가 훨씬 더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까 전전긍긍합니다. 그래서 완전 노출은 피하고 선한 부분만 살짝 보여주고 나머지는 가면으로 덮어 쓴 채 현재 남들이 나를 알아주는 정도에서 더 어긋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또 그 정도에서 만족하며 살기 원합니다.

세상과 사람 앞에서는 그것이 통합니다. 다들 가면을 쓰고 있고 또 서로 실체를 들추어내면 서로 창피한 짓이니까 그냥 그대로 지내자는 무언의 약속이 성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털어 먼지 안 나는 자 없지 않느냐?”라는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를 뒤집으면 “서로 골치 아프게 구태여 먼지 털 필요가 없지 않느냐?”라는 말과 같은 뜻이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하나님의 면전에서 자신의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고 싶은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 바로 원죄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실체를 인정하거나 지각하고 싶은 소원이 전혀 없습니다. 어쩌면 사실은 그렇게 하는 것조차, 이 또한 영혼에서 이뤄지는 일이라 본인이 의식을 하든 못하든, 불신자들 스스로 내면적으로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더 정확하게는 그 영혼을 꽉 붙들어 매고 있는 사단의 권세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네 실체가 사람들 앞에 드러나면 얼마나 부끄럽겠니?”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실체를 절대자 앞에 드러내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용납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운 탓만은 아닙니다. 교만이 공포를 누르고 있고 공포가 또 그 교만을 더 부채질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유일하게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는 영혼의 통로를 사단이 완전히 틀어막고 절대 비켜주지 않는 곳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할만한 자격이나 조건이 되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인데, 사단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모르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했기에, 말하자면 아버지이기에 그 자녀가 어떤 형편에 처해있든지 사랑하고 계신다는 진리를 전혀 감을 잡지 못하게 사단은 방해합니다.

그래서 불신자는 하나님의 사랑마저 자신이 받을만한 자격과 조건이 되었을 때만 받겠다고 나섭니다. 마치 아들이 내가 대학입학시험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아빠가 사주는 옷, 신발,  컴퓨터 등은 물론 심지어 먹고 마시고 자는 것마저 일절 신세지지 않고 내 힘으로 벌어서 살겠다고 고집하는 꼴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든 못하든 그 사랑에는 변함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 사랑을 죽을 때까지 거절하는 것이 바로 원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원죄가 죄를 잘 짓는 기질 내지 본성을 타고났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자연인 누구나가 갖고 있는 바로 이 영혼의 두 본성, 교만과 공포를 말합니다. 나아가 그 본성은 똑 같이 가면을 쓰고 있는 인간세상에선 스스로의 노력으로 절대로 없앨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기 노력으로 해결해보려는 고집이 바로 원죄입니다.

그들의 두려움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단순히 인간 세상에 통하는 도덕만으로도 완전치 못해 자기 실체를 드러내기 싫어하고 나아가 완전한 하나님의 의에는 도저히 이를 수 없어 까닭 모르게 불안해지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스스로 해결하려 드는 것이 바로 교만이었습니다. 이 둘은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데도 사단이 그 영혼을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하나님으로부터는 더 멀어지는 모순을 범하게 만듭니다. 결국 인간 스스로 자신의 죄를 씻을 방도는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그 교만과 공포를 하나로 줄이면 “하나님이 있다면 자기 같은 죄인을 결코 용서해 줄 리가 없다”는 불안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세상을(그렇게 불안에 떨고 있는 자들마저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려 하심이니라”는 진리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사람들 앞에서만 인정받으려 하지 말라. 단순히 사람들끼리 서로 허물을 들추지 않는 정도로 살지 말라. 정말 네 실체를 진짜 솔직히 살펴보라. 너의 교만과 공포를 과연 네가 없앨 수 있느냐? 네 스스로는 평생을 두고도 해결하지 못함을 순순히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라. 하나님이 너를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제발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 내가 이렇게 너의 모든 것을 다 감당하고 죽었지 않느냐?”

하나님은 인간이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아직 연약하고 죄인 되었고 심지어 당신과 원수 되었어도, 먼저 사랑하사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죄 값으로 죽이셨습니다. 이 단순한 진리만이 인간의 교만과 공포를 단 번에 산산조각 낼 수 있을 뿐입니다.

혹시 믿은 후라도 이 모습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면목이 도저히 서지 않는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면 사단의 계략에 또 다시 넘어간 것입니다. 자기를 더 거룩하게 다듬는 방향으로 가는 회개는 좋고 얼마든지 해도 됩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그분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 앞에선 가장 큰 죄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언제 어떤 모습이라도, 진짜 세상에서 천하의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있는 그대로 나오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누가 뭐래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이는 우리 모두가 그분에게는 항상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5/16/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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