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는 폐지되었는가? (창14:17-20 & 마23:23-24)

창세기 강해 (73)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14:17-20)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마23:23,24)

 

*************

 

창세기는 모든 것의 시작을 설명하는 책이다. 오늘의 본문을 한 번 더 살펴보는 이유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십일조를 최초로 언급하기 때문이다. 신학자와 목사들 사이에도 신약시대 이후로 십일조가 존속되었다 아니면 폐지되었다 의견이 분분하다. 신자들이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모른다. 동일한 성경을 두고 해석이 정반대의 둘로 나뉘니까 자칫 성경에 대한 절대적 신뢰성마저 금이 갈 판이다.

 

우선 강조하고 싶은 점은 성경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연결해서 살피면 하나님의 뜻에 오해가 생길 수 없다. 인간에게 꼭 계시해주고 싶은 당신의 궁극적 진리는 하나다. 믿음으로 반응하여 현실에 적용하는 측면에서 지엽적으로 달라질 뿐이다. 거기다 하나 뿐인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차원에서 부족해서 오해와 시비가 발생하는 것이다.

 

십일조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십일조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도 하나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폐지와 존속 둘 다 맞다. 방금 성경의 의미는 하나라고 한 말을 번복하는 것이 아니다. 양쪽의 눈치를 보느라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겠다는 뜻도 아니다.

 

십일조를 제도라고 말하면 모든 신자가 의무적으로 준행해야 할 계명을 말한다. 그럼 그전에 그 제도를 제정한 하나님의 이유와 목적이 반드시 있기 마련인데 이는 십일조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작금 벌어지는 논쟁에 이런 구분이 없이 뭉뚱그려 십일조를 제도로만 접근하니까 결론이 나지 않는다.

 

무슨 일에나 항상 정신이 먼저이고 제도는 그 다음이다. 십일조를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해석이 둘로 나뉠 수는 결코 없다. 또 그 뜻을 정확히 알면 그 제도를 계속 지킬 것인지 말 것인지도 자동으로 정해진다.

 

폐지와 존속 둘 다 옳다는 것은 제도로서의 십일조는 폐지되었지만, 이에 대해선 추가보충설명이 필요함, 정신으로서 십일조는 존속하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십일조를 하고 있는 신자를 두고 폐지론자들이 성경도 잘 모르는 미숙한 신앙이라고 비난해선 안 된다. 존속론자들도 십일조 정신을 정확히 가르쳐서 신자들 판단에 맡겨야지, 최근의 어떤 교단에서 교인 자격조건으로 규정하려다 말이 많아지자 철회했듯이, 의무로 강요해선 안 된다.

 

이처럼 판단하기 힘든 신앙상의 난제의 최종 판단 기준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을 향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잘 하는데 율법의 더 중한바 정의, 긍휼, 믿음은 버렸다고 꾸중했다. 그리고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했다.(마23:23,24)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바로 이런 구절이 여실히 증명해준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 진행될 토론에 대해 이미 정확한 판단 기준을 제시했다. 이는 또 인간의 영적 수준은 예수님 당시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진 것이 없고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도 못할 만큼 어리석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선 십일조가 폐지되었다는 주장을 예수님은 지지하지 않았다. 분명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했다. 그들이 버렸던 것은 율법의 더 중한바 정의 긍휼 믿음 셋이었다. 이는 구체적 실천 계명이 아니다.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 즉 십일조 정신에 해당된다.

 

이것을 행하라는 것은 당연히 그 앞의 말씀대로 채소와 양념까지 정확하게 십일조로 바치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은 십일조의 정신이 그 제도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했다. 십일조도 그 제도를 폐지하느냐 지속하느냐가 본질이 아니라 그 정신을 더욱 강조 실현시킴으로써 완성시키겠다는 뜻이다.

 

십일조 폐지론자들의 궤변

 

오늘의 창세기 본문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폐지론자들이 가장 중요한 이유로 드는 것은 구약의 율법 계명이 신약의 은혜 복음으로 대체되었으니 십일조도 마땅히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바로 그 주장을 근본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드린 것은 율법을 수여받기 약 5백 년 전의 일이다. 성경이 율법을 받기 전에 이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 것을 말하고 있음은 십일조는 율법과 상관없이 예수님 말씀대로 그 정신, 특별히 믿음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示唆)하는 것이다.

 

폐지론자들은 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대상으로 했으니 일반 신자에게 해당되지 않기에 더 이상 십일조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너무 비논리적인 억지다.

 

예수님의 야단치신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 24절을 잘 살펴보라. “맹인 된 인도자여”라고 지칭했지 ‘예배자여’라고 하지 않았다. 예배자라고 했으면 그들이 십일조를 바치는 행태를 꾸중한 것이지만 인도자라고 했으니 그들이 잘못 가르치는 점을 야단친 것이다.

 

하루살이 즉 덜 중요한 십일조 제도는 엄청 강조하면서, 더 중요한 낙타 즉 십일조 정신은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 신자가 십일조를 해야 한다, 혹은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는 눈을 닦고 봐도 없다.

 

그들 주장대로 하자면 본문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오늘날의 목회자에 해당된다. 엄밀히 말해 목사는 십일조의 수혜자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만 본문이 해당되면 더더욱 목사는 십일조는 행할 필요 없다든지, 목사만 십일조 하면 된다는 앞뒤가 안 맞는 이상한 결론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심지어 신학이 발전된 서구교회에선 십일조는 벌써 폐지되었는데 보수골통인 한국에서만 교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십일조를 강요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곳 바이블벨트의 미국교회들을 보니 오히려 십일조를 장려하고 잘만 하고 있다. 너무나 억지스런 궤변일 뿐이다.

 

십일조 정신이란?

 

예수님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신 십일조의 정신 정의, 긍휼, 믿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나님이 십일조를 제정하신 첫째 이유는 잘 알다시피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한 제사장 레위 지파의 생계를 보장하고 또 성막이나 성전을 운영하는 경비에 충당하라는 뜻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목회 외에 다른 수입원이 없는 전임 사역자들의 사례비와 교회 운영에 지불되는 비용이다.

 

둘째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려는 목적이다. 신명기 14:22-29에서 십일조에 대해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매년 십일조를 바친 후에 나머지 9/10 중에서 또 1/10을 감사의 축제 비용으로 바쳤다. 이를 둘째 십일조라 부른다. 또 안식년을 기준으로 세 번째와 여섯 번째 해에는 이 둘째 십일조를 오직 가난한 사람 구제목적으로만 사용했는데 이를 둘째 십일조와 구분하기 위해 셋째 십일조라고 불렀다.

 

레위인의 생계 충당을 위한 첫째와 감사 축제용 둘째 십일조도 궁극적으로 구제 목적이다. 함께 서로 돕고 살라는 하나님의 창조 경륜을 하나님의 공동체라면 마땅히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말하는 정의와 긍휼이다.

 

오늘날 교회의 형편은 어떠한가? 대형교회는 십일조가 아니라도 헌금 총액이 사역자의 사례비와 교육 선도 선교 교제 등의 교회 운영 경비를 충당하고도 남는다. 그럼 잉여분을 구제와 최소한 지역 봉사에 지불해야 함에도 실정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대신에 이런 핑계를 댄다. 구약시대와 예수님 당시는 이스라엘은 성전 중심의 일종의 신정국가로 종교기관이 제사는 물론 구제까지 감당했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복지는 국민의 세금으로 정부가, 또 기부금으로 많은 비영리단체들이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사탄에 미혹되어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영혼 구원에만 전념하면 된다고 한다.

 

막상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복지와 성장 어느 쪽을 더 중시하는지 정파마다 의견이 다르다. 정부 재정도 크게 부족하다. 모든 인간이 죄와 탐욕에 찌들었고 불완전하기에 복지 실현에 부정이 개입되고 불공평하게 집행될 수 있다.

 

한마디로 공공기관의 구제에는 한계가 있다. 그 생생한 예가 현대 미국이다. 사회 안전보장 기금은 고갈되어 가며 인종 간에 갈등까지 겹치고 소득구조의 양극화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소외되고 구조적인 빈민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이곳 멤피스 지역도 당장 끼니 이을 것이 없어서 생계형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것을 TV 뉴스로 매일 접하고 있지 않는가?

 

헌금을 돌려주라.

 

정말로 교회는 영혼구원 사업만 하는 곳이라는 주장이 정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회에 필요한 경비를 정확하게 공개한 후에 잉여분은 신자에게 돌려주던지 더 이상 헌금 안 해도 된다고 공표해야 한다. 실제로 최근 어떤 미국교회와 한 한국교회가 Offering-free Sunday (무헌금주일)을 시행한 적이 있다. 미국에선 별말 없이 조용했으나 한국에선 다른 교회들이 반발하고 심지어 이단으로까지 비난받았다.

 

물론 교회가 이미 바친 헌금을 돌려줄 수 없고, 성도들에게 헌금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당장 저부터도 매주일 아침 수표를 적을 때마다 한참 망설이며 손이 부끄러울 정도의 금액을 신앙 양심에 가책을 느끼며 겨우 정해 내는 헌금이라도 고달프고 힘든 현실임에도 헌금을 드렸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아주 기뻐하신다. 또 각자의 형편에 가장 합당한 은혜를 넘치도록 부어주신다.

 

헌금을 돌려주지 못하기에 교회 지도자들은 절대로 부정을 저질러선 안 된다. 담임목사는 대기업 사장처럼 엄청난 사례비를 받고 부교역자들은 쥐꼬리만큼 월급을 주면 교회 안의 직분자들을 위한 구제도 하지 않는 셈이다. 교회 안에 남는 돈을 주체를 못해 행사를 위한 행사를 한다. 온갖 프로그램을 시행해 교인들을 일주일 내내 교회와 목사에게 묶어 두려 한다. 심지어 우리끼리 천국에 함께 가자고 교회 공동묘지용 부동산을 구입한다.

 

그 돈으로 구제를 하거나 지역사회 기부라도 한다면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질 것이다. 개독교라는 비난은 사라지고 “예수 믿는 분들은 역시 뭐가 달라도 다르시네요.”라는 칭찬을 들을 것이다. 신자들도 십일조가 폐지되었는지 존속되었는지 논쟁에 혼동되지 않을 것이며 아예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낼 것이다.

 

교회가 지역사회에 기부까진 안 해도 재정 장부를 언제든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투명하게 공개만 해도, 아니 최소한 주보에 십일조 한 사람들 명단을 대문짝만큼 올리지만 않아도 십일조가 폐지되었다는 이상한 주장은 쑥 기어들 갈 것이다.

 

십일조를 상식적으로 따져라.

 

십일조에 대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예수님이 십일조 정신에 믿음을 추가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일차적 의미는 자기 믿음대로 하라는 것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십일조를 철저히 해야 구원의 조건이 되거나, 교회 멤버십 자격이 되거나, 나아가 꼭 믿음이 좋다는 보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의와 자랑으로 십일조 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

 

누차 강조하듯이 믿음은 이성과 상충되지 않는다. 믿음은 이성을 초월하고 또 이성을 망라하는 것이지 이성과 상호 모순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십일조 준행 여부도 이성에 입각하여 상식적으로 적용하면 된다.

 

이스라엘이 바빌론 포로의 고난을 겪은 것이 율법대로 살지 않고 죄와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다고 회개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는 일종의 부흥운동을 전개했고 그 운동을 주도한 계층이 바로 바리새인과 율법사였다. 그래서 그들은 채소와 양념의 십일조까지 철저히 바친 것이다.

 

대신에 절기 행사 위주인 성전 제사보다는 모세오경의 교육에 초점을 맞추어 회당예배체계로 전환했다. 어느 곳이든 열 가정만 모이면 회당 설립이 가능했다. 또 그 열 가정이 모두 십일조를 하면 회당장은 중간정도 수준의 생활이 가능해진다.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는 하나님의 평균원리가 적용되었고 일용할 양식은 반드시 채워주는 그분의 은혜였다.

 

유대 회당의 경우처럼 열 가정 정도 모인 교회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든 가정이 십일조를 해서 목사를 먹고 살게는 해주어야 한다. 거기다 다른 행사를 할 비용이 없기에 목사나 교인 집에 모여 돈이 안 들어가는 예배 성경공부 기도모임 등만 해야 한다.

 

간혹 목사는 예수님처럼 신자가 겪는 고난도 체험해봐야 하고 가난해야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풍성해진다고 믿는 신자들이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런 신자들은 꼭 십일조를 안 해도 된다. 그럼 정말 목사는 만나로 먹이시는 하나님의 기적적 은혜를 체험한다. 문제는 기적은 매일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정반대되는 경우도 있다. 한국의 대형교회에선 우리 교회 정도의 담임목사라면 최고 연봉에 최고급차를 몰아야 한다고 여긴다. 판공비처럼 고액의 목회비를 따로 지급하고 자녀들 해외유학까지 보내어 박사학위 취득할 때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믿는다. 실제로 그렇게 믿는 바대로 행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런 교회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신학, 교리, 심지어 믿음으로 따질 필요도 없다. 말씀드린 대로 그냥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된다.

 

십일조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이성적 판단이 결핍되어 생기는 십일조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정작 따로 있다. 십일조 폐지론자이든 존속론자이든 십일조를 주일 헌금 외에 추가로 드려야 하는 특별헌금이라고 인식하는데 이는 성경을 잘못 해석한 탓이다.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 성인은 매년 성전세를 일 년에 한 차례씩 내야 한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은 일종의 신정국가였기에 요즘으로 치면 주민세에 해당된다. 그 외에 하나님이 계명으로 규정한 헌금은 어떤 것들이 있나? 죄나 허물을 범해 속죄 혹은 속건제를 지낼 때, 또 감사하거나 화목잔치를 벌이거나 서원하는 경우다. 이 모든 것은 특별한 경우에 한해 개인이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전교인에게 의무적으로 부과하는 것은 첫 수확과 초태생과 십일조다. 첫 수확은 민수기에 기록된 대로 처음 땅을 배분 받았을 때나 기업을 물려받은 첫 해 한 번만 내면 된다. 초태생은 가축이 없는 자는 내지 못하고 또 비정기적으로 출산하기에 일상적 헌금이 아니다. 결국 모든 교인이 정기적으로 의무로 내어야 하는 헌금은 사실상 십일조뿐이다. 이해가 되는가?

 

예수님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지 말라는 것이 주일 헌금도 하고 십일조도 추가로 더 하라는 뜻이 아니지 않는가? 오로지 십일조에 관한 말씀이었다. 십일조 말하자면, 일상적 헌금을 하나님의 뜻을 살려서 제대로 하라는 것이다.

 

십일조가 폐지되었는지 존속되는지 논쟁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것이다. 어떤 토론이든 반드시 사전에 사용할 단어의 뜻과 토의할 내용의 범위를 합의해야 한다. 이런 절차를 무시한 탓이다.

 

무교회주의자로 집에서 혼자서 인터넷 예배를 들이지 않는다면 당연히 헌금은 해야 한다. 십일조 아니 일상 헌금을 폐지했다는 것은 아예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서두에 제도로서 폐지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 특별헌금으로써의 십일조 제도가 폐지되었다는, 아니 처음부터 그런 제도는 율법에 없었다는 뜻이다.

 

십일조 패러다임을 바꿔라.

 

성경에 특별 헌금을 한 케이스가 딱 한 번 등장한다. 바울이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에게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 중에도 힘에 지나도록 기쁨으로 자원하여 연보 했다(고후8:2,3)고 칭찬했다.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있어서 구제 목적으로 또 자신의 선교 사역을 돕는 목적의 헌금이었다. 이는 개별교회 운영경비가 아니라 교회 밖으로 지출하는 헌금이었다. “힘에 지나도록”이라는 뜻은 일부러 재산까지 팔거나 빚을 내서 했다는 뜻이 아니다. 평소 행하는 십일조 외의 헌금을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젠 십일조에 대해 특별헌금이 아닌 일상적 헌금이라고 그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나아가 신자가 일상적으로, 의무라면 의무로 드려야 할, 헌금의 최소한도에 대한 가이드라인으로 하나님이 소득의 10%를 제시했다는 뜻이 된다.

 

제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음을 참고하여 들으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헌금 가이드라인 10%는 너무나 절묘한 수치인 것 같다. 그분의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는 평균의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된 것 같다.

 

만약 5%였다면, 예컨대 만 불 수입에 오백 불 또 오천 불 수입에 250불 정도라면 믿음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수치다. 반면에 20-30%였다면 즉, 만 불 수입에 이천-삼천 불 또 삼천 불 수입에 구백 불 헌금해야 한다면 솔직히 저부터도 할 수 있는 자신이 없다. 하나님이 20% 내지 30%가 아니라 10%만 내라고 한 것은 오히려 다행이고 감사해야 한다.

 

소득의 10%를 한 달 동안 네 번에 나눠서 내어도 된다. 세금 공제 전인가 후인가 복잡한 논의에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엄밀히 말하면 세금 공제 후가 옳지만 시간이 없어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십일조에 대해 교인들이 기억할 것은 이것 하나다. 목사, 신학자, 교회 안의 장로들의 이야기에 흔들릴 필요 없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서서 정말 내 소득의 얼마를 하나님에게 드려야할지 자기 믿음에 비추어 헤아리면 되고 또 그 헤아림대로 드리면 된다.

 

헌금의 가장 기본적인 뜻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 즉 헌금을 바친 뜻이 무엇인가? 멜기세덱이 축복한 후에 드렸으니 그 축복 받은 내용 그대로다. 이 승리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하는 뜻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천지의 주재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이끌어주셨다는 고백이다.

 

고대 전쟁의 승리자는 탈취물을 자기 소유로 삼는 것이 당연했다. 소돔 왕이 사람은 빼고 재물을 다 가지라고 제안했으나 아브라함은 나중에 뒷말을 듣기 싫다고 거절했다. 단 자기 종들의 수당, 오늘날 교회로 치면 운영경비는 받았다. 나머지를 돌려준 까닭은 돈 때문에 전쟁을 친 것이 아니라 오직 조카를 구출할 목적이었다는 뜻이다.

 

정확하게 말해 아브라함이 자기 삶과 인생에서 분석 판단 선택 결정 시행하는 모든 일에서 돈에 일절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전쟁을 치르면서 집에서 기른 겨우 380명으로는 승산이 희박해 갈 바 모르지만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하나님의 인도만 구했다.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던졌다. 하나님이 자신의 전부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분이 나의 영원한 기업이라는 뜻이다.

 

그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하나님 없는 삶은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돈이 궁핍해도 하나님과 함께라면 죽음을 무릅쓰고 따르겠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하나님만 따랐더니 이런 큰 승리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 탈취물은 내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것이오니 그분께 다시 돌려드린다는 고백이 바로 십일조 즉, 헌금의 의미다. 지난번 강해 때에 이번 사건의 전부를 성령이 주도했다고 말했듯이, 아브라함은 성령의 역사로 10%를 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에 감동이 있어서 그대로 따른 것이다.

 

십일조와 관련해석 마지막으로 주지할 사항이 하나 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계명은 비록 강제적 의무라는 명령의 형식을 띄고 있을지라도 내용적으로는 사실은 신자의 자율적 판단에 맡긴 것이다. 영원한 심판과 구원을 가르는 선악과 금령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부터 그렇다.

 

하나님은 믿음을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억지로 강요한다고 믿음이 생기지도 않는다. 교회는 더더욱 감언이설이나 오도된 가르침으로 십일조를 강요해선 안 된다. 예수님 말씀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성도의 피와 땀이 담겨있는데 헌금 장사나 도적질해선 결코 안 된다.

 

대신에 신자가 하나님이 정말로 어떤 분인지, 특별히 그분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나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그리고 지금도 어떤 권능과 사랑으로 나를 다스리고 있는지 정확히 안다면 감사와 헌신의 제물을 안 드릴 수 없다.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대면한 자는 절대로 이전과 같은 삶을 살지 않는다. 뭔가 달라도 달라진다. 그렇게 바뀐 믿음으로 사는 신자나 신자의 공동체에는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이 실현되는 모습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십일조가 폐지되었는지 존속되었는지 논쟁은 사실상 부질없는 짓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십일조의 정신과 제도도 분별하지 않고 나아가 예수님의 말씀도 정확하게 해석하지 않은 바탕에서 이뤄져 왔지 않는가? 신자 각자의 믿음 아니 상식에 맡기고 교회는 교회 본연의 소명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 소명에 충성하는 교회는 부흥할 것이며 신자들도 자발적으로 10%가 아니라 20-30%도 헌금할 것이다. 나아가 남는 헌금으로 구제에 사용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구제가 힘들면 그냥 교회 필요 경비에 적합할 만큼 헌금을 적게 해도 된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바는 딱 하나다. 십일조의 존속이냐 폐지냐가 아니다. 네 존재와 삶과 인생의 진짜 주인이 돈과 하나님 중에 어느 쪽인지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주인이 되었든 진짜로 모시고 있는 그 주인의 뜻대로 따르면 된다는 것이다.

 

10/30/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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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있는가?(창세기강해 #72 - 창14:16-20)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있는가? 창세기 강해 (72)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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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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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뻔뻔해지는 믿음을 가졌는가? (창세기강해 #71-창20;1-18)

하나님 앞에 뻔뻔해지는 믿음을 가졌는가? 창세기 강해 (71)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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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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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풀지 못하는 신자의 숙제(2) (창세기강해 #70 - 창13:8,9 & 14-18) [2]

영원히 풀지 못하는 신자의 숙제(2) 창세기 강해 (70)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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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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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풀지 못하는 신자의 숙제(1) (창세기강해#69-창13:5-13)

영원히 풀지 못하는 신자의 숙제(1) 창세기 강해 (69)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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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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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도약하는 단계를 거쳤는가? (창세기강해 #68-창13:1-4)

믿음이 도약하는 단계를 거쳤는가? 창세기 강해 (68)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 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 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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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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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판 것보다 더 큰 아브라함의 잘못 (창세기강해 #67 - 창12:10-20)

아내를 판 것보다 더 큰 아브라함의 잘못 창세기 강해 (67)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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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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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성공의 유일한 비결 (창세기강해 #66 - 창12:1-3)

인생 성공의 유일한 비결 창세기 강해 (66)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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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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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받은 복의 실상은? (창세기강해 #65 - 창12:1-3)

아브라함이 받은 복의 실상은? 창세기 강해 (65)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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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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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어 누리는 최고의 현실적 축복 (창세기강해 #64-창12:1-5)

예수 믿어 누리는 최고의 현실적 축복 창세기 강해 (6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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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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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떠남의 필요충분조건 (창세기강해 #63 - 창12:1-4)

완전한 떠남의 필요충분조건 창세기 강해(6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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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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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에 관한 하나님의 뜻 (창세기강해 #62-창12:1-4)

미국 대선에 관한 하나님의 뜻 창세기 강해 (6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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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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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역사상 최고 독종 아브라함 (창세기강해#61-창11:10-13, 26-32)

인류 역사상 최고 독종 아브라함 창세기 강해 (61)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아르박삿은 삼십 오세에 셀라를 낳았고 셀라를 낳은 후에 사백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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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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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해졌을까? (창세기강해 #60 - 창11:1-9)

과연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해졌을까? 창세기 강해 (60)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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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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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피부 색깔이 왜 세 가지인가? (창세기강해#59-창10:6-20)

사람의 피부색깔이 왜 세 가지인가? 창세기 강해 (59)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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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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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노아가 왜 완전한 자인가? (창세기강해 #58 - 창9:18-29)

술 취한 노아가 왜 완전한 자인가? 창세기 강해 (5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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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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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언약의 참 뜻 (창세기강해 #57 - 창9:8-17)

무지개 언약의 참 뜻 창세기 강해 (57)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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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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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채로 먹지 말라는 계명의 진짜 의미(창세기강해 #56 - 창9:1-7) [1]

피 채로 먹지 말라는 계명의 진짜 의미 창세기 강해 (56)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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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6-12
  • 조회 수 2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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