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어 누리는 최고의 현실적 축복
창세기 강해 (6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12:1-5)
버리는 것과 받는 것이 같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며 주신 약속의 말씀을 반복해서 살펴보는 이유가 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다 포함되어 있음에도 지금껏 많은 신자들이 정확하게 모르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우선 하나님이 그더러 떠나라 즉, 버리라고 하시고 대신에 주시겠다는 즉, 그가 받은 약속의 내용이 사실상 동일하다는 점에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 본토를 떠나라고 하고선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다. 또 나중에는 종과 횡으로 행하는 모든 땅을 주겠다고 선포했다.(창13:17) 당시 씨족 내지 부족국가였던 점을 감안하며 모든 이들이 친척이나 다름없다. 마찬가지로 그런 친척을 떠나라고 하고는 큰 민족을 이루게, 즉 더 많은 친척을 주겠다고 한다.
아비 집은 사람들에게 떳떳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신분과 위치가 상당하다는 의미인데 같은 맥락에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 해주고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신다고 한다. 지난주에 그가 떠난 곳 갈대아 우르에 비해 도착할 곳 가나안의 모든 주변여건이 같거나 더 열악하다고 말씀드렸다.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할 아브라함 본인의 개인적 상황도 동일해질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를 믿은 전과 후의 현실 여건과 내 자신의 상태를 비교해보면 별반 나아진 점이 없다. 이번 여름휴가 기간에 한국을 방문한 사람들은 이점을 더 실감했을 수 있다. 불신자들이 오히려 모든 면에서 훨씬 잘 되어 있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학교 다닐 때에 공부를 못했는데 큰 사업을 하며 떵떵거리며 살고 있고 온갖 최신 트렌드를 따라서 웰빙의 삶을 즐기고 있다.
반면에 미국의 한적한 동남부 작은 주에서 언제 Lay Off 당할지 모르는 미국 직장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나를 보니 한심하기만 하다. 그럼 대체 예수 믿어 얻는 복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본문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답은 아주 간단하다.
그 답은 아주 간단하다. 아브라함이 떠난 곳과 도착할 곳의 현실 여건이 같고 버린 것과 얻은 것도 같다. 그에게 생긴 유일한 변화는 무엇인가? 바로 영호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부재(不在)하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이었지만 떠난 후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이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을 수 있고, 받으며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고 있는 인생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다. 이 둘의 차이를 비교해서 하나님을 알고 난 후가 얼마나 좋은지 알지 못하거나 누리고 있지 않다면 사실은 예수를 믿는 신자라고 말할 수 없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기준이 또 있다. 내가 새로 받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은 반드시 더 풍요해야 한다고 믿거나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느냐, 아니면 나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이 어떻게 되던 하나님 그분만을 따르고 있느냐 스스로 질문해보는 것이다.
솔직히 따지자면 한 순간도 주저함이 없이 후자라고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으려면 예수 믿은 후에 한참이 지나야 한다. 불신자인 성인이 예수 믿는 계기는 주일학교 다닌 적이 없다면 10중 9는 현실의 고난 때문이다. 제가 교회에 첫 발을 디디게 된 직접적 계기도 바로 그것이었다.
또 그래서 처음 얼마간은 현실 문제에 대한 기도의 응답이 잘 된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이 잘 되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신자가 풍요롭게 되는 것은 몰라도 고난에서 건져주시는 것은 분명한 그분의 뜻이다. 그러다보니 예수 믿은 복을 자꾸 현실에다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생긴다. 고난에서 건짐을 받는 것과 현실에서 풍요의 경계선도 사실은 애매모호하다.
그러는 와중에 성령이 간섭하여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자신의 내면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체험을 하고나면 사정은 확연히 달라진다. 비록 죄의 본성은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고 피 흘리기까지 싸우려 노력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만을 목표와 소망으로 삼는 신앙여정을 비록 수시로 쓰러지고 넘어질지라도 걸어가게 된다.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인생 말년에 자기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외아들 이삭마저 포기하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
정확히 말해 하나님 쪽에서 우리를 그렇게 이끌고 가신다. 그 자리에 이르게 하는 최선의 방도도 현실적 고난이다. 저와 우리 모두가 시인하기 싫고 자존심이 상하지만 고난이 아니면 자라지 않고 하나님도 찾지 않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임을 하나님 그분이 더 잘 아시기 때문이다.
사방의 출구가 막힌 절망의 나락에 떨어져야 비로소 인생과 영원한 가치와 하나님의 실존 여부와 그분과 나의 관계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현실 주변의 여건이 풍요하게 만들려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매진했던 삶을 하나님이 강제로 중지시키는 순간이 있다. 그래야 자신의 진짜 실체에 대해 시선을 돌릴 수 있다. 한 번 뿐이고 짧은 인생에서 진정으로 추구할 소망과 목표는 하나님 그분뿐임을 절감하고 그 분 외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도록 바뀌어가는 과정이 신자의 일생이다.
아들을 포기할 수 있는가?
따라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완성의 자리에 이르도록 아니 죽을 때까지 그의 삶에 현실의 고난이 그치지 않았듯이 신자 또한 그렇다. 그래서 하나님이 신자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던지는 질문은 아까 말씀드린 그 두 가지 뿐이다. 네 현실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나를 찾느냐? 아니면 나를 진정으로 알고 교제하고 싶어서 찾느냐?
언제까지 그 질문을 계속하시는가?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서슴없이 완전히 바칠 때까지다. 모리아 산은 어디인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골고다 언덕이다.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버리자 하나님은 당신께서 대속 제물로 준비해 놓은 어린 양을 발견토록 했다. 그 제물은 미리 마련해 놓은 것이지 아들을 바친 후에 준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자기 전부를 내어던질 때에 비로소 주님도 당신의 전부를 신자에게 주신다. 그럼 신자도 예수님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된다. 그분만을 소망하며 세상이 줄 수 없는 너무나 큰 축복을 누릴 수 있다.
대다수의 신자는 현실의 사치와 풍요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현실 문제와 고난을 해결 받는 데만 동원하는 것은 여전히 세상의 기쁨이 목적인 신앙이다. 그런 것들이 세상 살아가는데 장애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미숙하다 못해 너무나 어리석은 신앙이다. 사탄의 권세 아래 죄인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고난은 절대 사라질 수 없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기어이 모리아 산 정상에 세우기 위해서 직간접으로 고난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 믿는 신앙이 최종으로 도착하는 목적지 즉, 예수 믿은 후에 받는 딱 한 가지 복은 사랑하는 자식마저 포기하는 자리이다. 너무 가혹하게 들리는가? 제 독단적 의견이 아니다. 성경이 즉, 하나님이 엄숙히 명령하는 바다. 실제로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지금 그렇게 다뤄가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자 진리다.
바울도 동일한 맥락에서 말하고 있다. 신자의 믿음의 터는 오직 그리스도에 두어야 하는데 최종적으로 불로 태우는 공력이 나타나서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 얻는 것 같아진다고 선언했다.(고전3:10-15) 오직 예수님만 바라는 정금 같은 신앙을 만들기 위해 연단과 고난을 주었는데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에 저는 이것저것까지는 포기했는데 여기부턴 포기 못했다는 핑계를 대는 신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럼 얼마나 부끄러운 구원이 될 것인가?
천국에서 주님과 얼굴과 얼굴로 맞대면 한다는 말씀의 중요한 뜻 중의 하나는 주님과 신자 사이에 세상의 것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신자가 싸울 싸움은 예수님 외에 모든 것은 버리는 싸움이다.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 우상이다.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
예수 믿은 복이 하나님 그분뿐이라고 해서 현실적으로 체감하는 기쁨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신자가 평생을 수도승처럼 살라는 법은 없다. 실제 삶에서 진정으로 순전하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여러분도 지금 바로 그런 복을 누리고 있는데 본문 5절에 설명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비로소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한다.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라고 하니까 눈이 번쩍 뜨이는가? 가나안에 들어가 쓰라고 기도했더니 큰돈을 벌게 해주었는가? 아브람이 “모은 소유”라고 했다. 그가 현실의 삶에 성실히 임했다는 뜻이다. 기도해서 대박을 터트린 것이 아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현실도피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이 구절의 초점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에 있다. 얻었다는 것은 강제성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무력과 권력으로 포로를 탈취하거나 금력으로 노예를 산 것이 아니다. 하란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보고 자발적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서두에 본문의 약속에 대해 신자들의 이해가 부족하다고 말씀드린 까닭이 바로 이 부분 때문이다.
쉽게 말해 그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동조한 것이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교회를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 앞서 본문의 아브라함과 그 일행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참 대단하지 않는가? 가나안은 하란에 비해 현실적 영적으로 단 하나 나은 것이 없고 더 열악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만 믿고 따랐고 그들이 바로 창세기 14장에 롯을 구출하는 전쟁에 목숨을 걸고 참여했으니 말이다.
아브라함은 바울처럼 전도의 달인이 아니었다. 자기 신앙을 논리적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랍비도 아니었다. 사도들처럼 손을 얹고 기도하면 병이 낫는 신유의 은사도 없었다. 그가 행한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다. 우상숭배를 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형상을 섬기지 않았다. 깎아 만든 우상에 절하지 않았다고 단순히 해석해선 안 된다.
그 말은 갈대아 우르나 하란 사람들이 우상 조각에 절을 했다고 해서 아주 무식하고 어리석다고 탓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고 아주 잔인하다고 몰아붙여도 안 된다. 그들 나름의 종교심은 신실했다. 현실의 고난과 문제에 대한 걱정 염려를 없애려 했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도 찾으려 했다.
무엇보다 인간이 피조물이거나 아주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있었다. 인생을 좌우하는 인간보다 훨씬 큰 힘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인생을 풍요하고 즐겁게 해달라고 간구하기 위해 최고의 정성과 열성을 바쳤다. 너무 지나쳐 인간까지 바치게 된 것이다.
그들의 문제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한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믿지 않은 것이다. 자기들의 종교행위가 자기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더 정확하게는 현실의 풍요만을 위해서 신을 찾은 것이다. 제사 의식과 절차가 풍요를 상징하는 양상을 뛸 수밖에 없었다. 정말 세상을 통치하는 존재가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하란 사람과 아브라함이 다른 점
반면에 아브라함은 하란 사람들이 보기에 뭔가 달랐다. 자기들처럼 요란법석을 떠는 구체적 종교행위를 하지 않았다. 그가 우르를 떠난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지만 그 전에 그곳에서 이미 외톨이가 되어 있었다. 우상 신전의 난교파티나 인신제물 제사에 동참하지 않으면 그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었다. 어차피 추방을 당하거나 완전 왕따로 살아야 할 신세였기에 하나님의 떠나라는 명령에 기꺼이 순종할 수 있었다. 또 하란에선 그는 외국인이자 나그네였기에 꼭 우상숭배를 강요받지 않을 것이기에 하나님은 떠나라고 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하란에서 비로소 그는 하나님과 자신만의 정말로 진정하고도 순전한 일대일의 영적교제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전에 가지 않았고 집안에 드라빔 같은 우상도 세우지 않았다. 기껏해야 다듬지 않은 돌 몇 개로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묵상했다.
제물은 주로 곡물이었고 가끔 어린 양을 바쳤다. 사람을 바치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하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제 개인적 추측이지만 그들 중에는 그 동안 산 채로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친 부모들도 있었을 것이다. 사회 체계가 그러니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아브라함이 믿는 종교야 말로 진짜 종교이자 그 신이 참 하나님이 분명하다는 각성이 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모든 객관적 상황에 비추면 경건하고 의로운 종교행위만으로는 사람이 모일 수도 함께 따라나설 수도 없다. 아브라함의 인품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마누라를 팔아 자기 목숨을 유지하는 치사한 짓을 두 번이나 했지만 그 외에는 크게 하자가 없이 아주 온유한 사람이었다. 당장에 조카와 아비 데라를 데리고 떠났다. 조카에게 땅을 양보하고 또 목숨을 구하려고 전쟁도 불사했다. 소돔에서 구원해 내려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도 했고 마누라에게 저지른 잘못 때문에 마누라 말이라면 평생 꼼작 못했지 않는가?
거기다 소돔 왕의 예물은 받지도 않았고 대신에 살렘 왕 멜기세덱에겐 십일조를 바쳤다. 그의 행사는 이치에 합당했다. 경우가 바르고 성실하고 정직했다. 애굽에서 요셉이 하는 일마다 하나님이 형통케 해주신 축복이 하란의 아브라함에게도 일어났던 것이다. 그가 하는 일마다 형통했기에 하란에서 소유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특별히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크게 염려는커녕 당황도 하지 않고 묵묵히 눈에 보이지 않고 형상도 없는 하나님에게 기도하고는 평강을 유지했다. 신전에서 장엄하고 경건하며 화려하기까지 한 제사를 아무리 시끌벅적 지내고 나도 불안이 없어지기는커녕 더 허무하고 갈급해지는 자기들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이 정확히 어떤 분인지 몰라도 그만 보고 따른 것이다. 그가 참 하나님의 떠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하니까, 그것도 축복의 약속과 함께 받았다니까 그 약속에 동참하고 싶었던 것이다. 모압의 이방 여인 룻이 청상과부가 된 후에 얼마든지 고향에 남아 재혼하여 형통할 수 있는데도 그 쉬운 길을 포기했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며 어머님이 가는 곳은 죽기까지 끝까지 따르겠다고 한 것과 동일한 모습이다.
이처럼 참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그 아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그 곁에 반드시 그 사람이 믿는 하나님을 믿고자 사람이 모이게 된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가자 핍박받고 소외되어 마음이 원통한 자 400명이 아둘람 굴에까지 모였지 않는가?(삼상22:1-2) 하나님이 큰 민족을 이뤄주겠다는 약속이 숫자적으로 외형적 모습이 아니다. 당신에 대한 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큰 민족이다. 초대교회에 순전한 믿음으로 로마 지하 동굴에 목숨 걸고 모였던 자들이 바로 큰 민족이다.
반드시 함께 모여라.
그럼 예수 믿은 후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현실 삶에서의 축복이자 기쁨이 무엇인가? 바로 교회다. 유무형의 성도들의 모임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다보면 외롭고 고달파서 피곤해지고 의심마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성도들을 깎아 만든 우상 대신에 서로 섬기며 힘을 얻으라는 것이다.
참 신자라면 그 속에서부터 아브라함처럼 예수님의 광채가 비춰 나온다. 예수 믿어 버리고 얻는 것이 현실의 안락과 출세가 아니다. 바울의 말한 대로 궁핍하든 부요하든 상관없이 예수 안에서 예수님과 교제 동행하며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신자로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은 세상에서 왕따가 되라는 뜻이다. 평생을 쓸쓸하게 고독한 혼자만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 땅이 본향이 아니기에 하늘의 소망을 두고 외국인이자 나그네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인지라 너무 고달프다. 때로 하나님께 의심 불만을 가질 수 있다. 심지어 죄에 쓰러지고 넘어질 수 있다. 그 모든 고난과 시험이 사실은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허락하신 하나님의 연단이자 은혜다.
하나님이 신자로 함께 모이게 하는 이유는 예수님 외에 어떤 것에도 영원한 가치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보며 다시 깨닫고 격려 위로 도전 권면하라는 것이다. 함께 힘을 합쳐 손을 잡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라는 것이다.
물론 함께 가도 중간 중간에 쓰러질 수 있지만 혼자 보다 여럿이 있을 때 더 일어나기 쉽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쓰러진 모습을 당신만의 선으로 바꿔서 모두가 볼 수 있게 해주신다. 혼자보다 함께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욱 선명히 볼 수 있다. 또 쓰러진 바로 그곳이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라는 하나님 음성도 더 명료히 들을 수 있다.
여러분이 금년 초까지 지난 2년 반 동안 바로 그렇게 살아왔지 않는가? 하나님이 현실적 형통을 준 적이 없다. 목사도 없이 세상에서 거의 왕따 취급을 당했다. 그 때 서로 모여서 말씀 읽고 기도하며 격려할 때에 얼마나 큰 사랑과 기쁨이 넘쳤는가?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을 것이며 평생에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할 것이다.
장담컨대 목사인 제가 온 이후보다 더욱 좋았을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과 일대일로 원색적 신앙을 갖고 매순간 씨름을 해야 한다. 그분과 인격과 인격의 만남 교류 반응이 있어야 한다. 저는 그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성경 말씀으로 가이드 하는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눈물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 가슴을 열어 제치고 찬양할 수 있다는 것, 성경 말씀을 상고하며 나눌 수 있다는 것만큼 인생에 최고 기쁨과 행복은 없다. 예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어떤 이해타산은 물론 자존심까지 완전히 내려놓는다는 것이다. 그럼 필연적으로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만이 그 안에 역사하게 된다.
제가 목사로서만 아니라 인생선배로 말씀드리자면 모든 믿음의 인생은 결국은 혼자 걸어가야 한다. 자녀도 배우자도 개입할 수 없다. 부모로서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야 할 책임을 나태 부인하는 뜻은 전혀 없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신자는 오직 하나님과만 동행해야 하는 철저하게 고독한 여정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 믿은 최고의 축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예수님 그분뿐이다. 그분만이 우리의 소망이요 목적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도 하나님의 놀랍고도 은혜로운 역설은 숨겨져 있다. 분명히 “오직 예수!”만을 소망하며 걸어가야 하지만 혼자서만 가면 엘리야처럼 탈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두세 명이라도 손잡고 가면 인생 최대의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 것 다 버리고 오직 예수만을 소망하며 모인 자들 안에는 그야말로 예수만이 역사하고 통치할 것 아닌가? 그 놀랍고 풍성한 축복을 누리라고 아브라함을 불러내었고 그는 실제로 하란에서 그렇게 살았기에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바다.
8/7/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