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최고 독종 아브라함
창세기 강해 (61)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아르박삿은 삼십 오세에 셀라를 낳았고 셀라를 낳은 후에 사백 삼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 데라는 칠십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창11:10-13, 26-32)
두 가지의 족보 패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창세기 1-11장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에덴동산, 아담과 이브, 에녹, 노아는 실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홍수 심판과 바벨탑 사건도 신화와 전설을 바탕으로 후대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치부하고 12장의 아브라함 사건부터 실제로 일어난 일로 간주한다.
이는 우선 논리적으로 너무 큰 모순이다. 만약 11장까지 기록이 가공이라면 즉, 본문을 비롯한 창세기 모든 족보가 거짓이라면 아브라함의 선조가 몽땅 부인된다. 아브라함과 그 아들인 이삭과 손자 야곱은 물론 모든 후손이 가공인물인 셈이다.
비유를 하자면 만화책을 첫 권에서 11권까지 읽었는데 12권은 출판되지 않고 11권 마지막에 등장하는 인물에 현실세계에 실제 인물로 출현해 활동하고 있다고 믿는 꼴이다. 이번 주에 미국과 한국을 열광케 한 포케몬고 게임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다. 창세기 1-11장을 부인하면 성경 전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성경은 알다시피 특별히 어려운 내용이 없어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열린 책이다. 그러나 반드시 죄 중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진리라는 전제를 갖고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학문이 깊고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에 능통하고 심지어 기독교 교리를 믿어도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은 역사하지 않는 철저하게 닫힌 책이 된다.
역으로 말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고 “하나님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옵소서!”라는 순전한 자세로 읽는다면 아무리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족보에서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발견해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창세기의 모든 족보들은 어떤 이가 나서 몇 년을 살다가 죽고 또 죽었다는 패턴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담의 원죄 하에 태어난 인류는 그 일생이 죄에 찌들 수밖에 없으며 그 삯은 사망이라는 것이다. 또 아무리 무병장수를 해도 인간은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고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또 확인한 것이다.
반면에 본문의 셈의 후예는 죽었다는 언급은 없고 낳고 또 낳았다는 기록의 반복이다. 그들이 영생을 얻어 에녹처럼 승천한 것은 아니다. 또 셈의 후예라서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한 경건한 삶을 살았다는 뜻도 아니다. 당장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강 건너편 - 여기서 강은 유프라테스임 –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숭배를 했었다.(수24:23) 본문도 나중에는 아브라함의 동생 하란이 죽었고(28절),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도 하란(지명)에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30절)
그럼에도 성경이 셈의 후예의 족보는 죽고 죽었다는 기존의 패턴 대신에 낳고 낳았다고 기록한 이유는 마지막에 아브라함을 낳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다. 그 앞부분과 연결하여 살피면 노아 일가족을 홍수 심판에서 구원해준 것도 아브라함을 세상에 보낼 목적이었다는 뜻이 된다.
아브라함을 세상에 보낸 이유?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꼭 세상에 보냈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아담과 이브더러 하나님을 거역하라고 부추겨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한 원흉인 사탄을 하나님이 이렇게 저주했다. 장차 여자의 후손이 오는데 사탄은 그의 발꿈치만 상하게 하지만 그는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선포했다.(창3:15)
여자의 후손이란 남자와 성적교섭이 없이 성령으로 동정녀에게 잉태하실 예수님을 말한다. 사탄이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유대교의 부패한 거짓 종교지도자들을 선동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것이라는 뜻이다.
그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사탄이 의도한 계획을 무산시킨다는 뜻이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했지만 실패하자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임을 더욱 확신하고 십자가에 죽여 버리면 계속해서 인간을 자기 노예로 삼을 수 있으리라 계산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3일 만에 무덤에서 박차고 나와서 죄의 삯인 죽음을 제거할 것이다. 또 모든 인간이 받아 마땅한 죽음의 형벌을 대신 감당함으로써 그 보혈의 공로를 믿음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는 뜻이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타락한 직후 에덴에서 곧바로 구원을 약속했다.
여자의 후손 즉, 인간으로 오시려면 반드시 한 민족, 한 지파, 한 가문에서 태어나야만 한다. 하나님은 지금 예수님이 태어날 민족인 이스라엘의 선조로 아브라함을 세웠고 그 후손인 유다 지파 다윗 가문에서 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신약성경 첫 책, 첫 구절인 마태복음 1:1이 어떻게 시작하는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창세기 11장까지의 기록을 부인하면 단순히 아브라함이 가공의 인물로 그치지 않는다. 그 족보들도 단지 이스라엘의 족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족보다. 창세기의 족보가 없으면 예수님의 구원도 없다. 아직도 모든 인간이 아무 소망도 없이 죄의 노예로 흑암의 세력 아래 남아 있을 것이다.
신자가 보기에도 창세기 11장까지의 족보가 장황하고 큰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고 깨닫지 못할 뿐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계획을 당신의 일정과 방식으로 단 한 치의 오차 없이 차근차근 진행시키고 있다는 것이 본문의 족보가 말하는 바다.
예수님의 구원
요한 사도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선포했다.(요1:1)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데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했다.(요1:14)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또 그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인간들이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세력에 묶여 신음하는 것을 안타깝고 불쌍히 여겨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타락한 직후에 사탄을 저주하며 주셨던 구원의 약속을 때가 차매 실현하셨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창세기 족보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태초에 계셨던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이 될 수 없다. 단순히 훌륭한 도덕 선생이자 뛰어난 종교 선각자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결국 예수님 그분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하나님에 대해 가졌던 믿음을 본받으라는 가르침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
성경이 말하는 바는 전혀 그것이 아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의 경우 다른 종교의 경전과는 전혀 다르게 온갖 추잡한 이야기로 가득 차있다. 다른 종교처럼 인생을 성찰하고 각성하라, 진리를 추구하여 깨달으라는 식의 가르침이 없다. 대신에 간음, 근친상간, 살인을 밥 먹듯이 자행하는 인간의 추한 모습들이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거기다 하나님까지 냉혹하고 잔인하게 징계하고 심판하신다. 이스라엘은 죄를 지어 타락했다가 하나님에게 쥐어터진 후에 회개하고 돌아오는 패턴을 지겹도록 반복한다.
무슨 뜻인가? 인간은 말로 알아먹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 스스로 구원은커녕 선해질 수도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인정하기 싫고 자존심이 상하지만 이는 절대적 진리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경이 말하기 때문인가? 아니다. 바로 저를 비롯한 우리의 모두의 지난 인생의 경험으로 알 수 있다.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씀을 지질이도 듣지 않았지 않는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 내지 핵심은 예수님이 가졌던 믿음을 본받아 착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그 일이 제대로 가능하지 않다. 예수님 그분을 믿는 것이다.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다. 그분의 십자가 사랑 앞에 완전히 항복하는 것이다. “주여! 정말로 이 곤고하고 갈급하고 허망하며 추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진심으로 가슴을 열어젖히며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는 것이다.
그럼 성령이 간섭하여 우리 심령 깊숙한 곳에서부터 예수님 그분의 거룩한 중생의 역사가 시작된다. 세상의 교육, 철학, 윤리, 종교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예수님의 따듯하고 풍성하고 오묘한 사랑의 품 안에 나라는 존재 전체가 용납되었음을 생생히 알 수 있게 된다.
아브라함도 예수를 믿었다.
그런데 성경은 아브라함과 예수님을 단순히 족보로만 연결하지 않는다. 더 놀랍고 엄청난 진술이 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역 비난하며 죽이려 들자 주님은 그들을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자식이라고 정죄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율법을 받은 거룩한 선민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안에 있다고 큰소리쳤다.
그러자 주님은 아브라함도 당신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며 기뻐했다고 했다.(요8:56) 아브라함이 메시아에 의한 구원을 소망한 정도를 넘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뜻이다. 예수라는 이름이나 교리를 구체적으로 알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며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럴만한 증거가 있다.
먼저 31절에 따르면 아비 데라가 주도적으로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데라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우상 숭배자였다. 또 26절에 언급한 또 다른 아들 나흘은 31절에 빠져 있다. 만약 아버지가 앞장서서 이끌었다면 전 가족이 동행했어야 한다.
아브라함의 형제 하란이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우르에서 죽었다.(28절) 원어로 “면전에서, 보는 앞에서, 살아 있을 동안에”라는 뜻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데라가 우르에서 우상인 불의 신(神)에게 아들 하란을 산 채로 인간 제물로 바쳤다고 하지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아들을 잃은 쇼크가 고향을 떠난 이유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갈대아 문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미지의 땅에 가길 꺼려서 하란에서 지체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데라가 우르를 떠난 것이 단순히 아들 잃은 슬픔만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저희 때만 해도 자식을 여럿 낳았지만 한 집에 한두 명은 예사로 죽었는데 당연한 일로 여겼다.
그보다는 아브라함이 아비 데라에게 떠나자고 강력하게 권고했던 까닭이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자는 아브하람이었다. 아니면 그가 혼자서라도 떠나겠다고 하니까 아들 하나를 이미 잃은 판에 또 다른 아들, 성경기록상으로는 장남마저 생이별할 수 없어 아비 데라가 따라나섰다고 봐야 한다.
제가 1991년에 미국으로 이민 올 때에 어떤 분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담배를 끊은 사람에겐 딸을 주지 말아야 하는데 그만큼 독한 시아버지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민 가는 것은 담배 끊는 것보다 더 독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인데 저는 그 둘을 다 했다는 것이다. 세계가 하나가 되어 안전한 20세기에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사실상 아주 독한 결단이다. 최하 4천 년 전의 아브라함에겐 곧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은 인류 역사상 최고로 독한 사람일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의 선조인가? 아니다. 그는 아비 데라와 친척 롯은 물론 본토를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중간에서 지체했다. 죽음 내지 고통이 기다리는 것이 확실한 막다른 길로 몰아넣는 것 같은 하나님의 명령을 한순간도 망설임 없이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신자는 없다.
본토를 떠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때가 75세였다(창12:4). 하란에서 잠시만 지체한 것으로 보이므로 죄악의 땅인 갈대아 우르에서 그만큼 오래 살았고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우상숭배 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요즘 어린이들이 부모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오다보면 자연히 예수를 믿게 된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분명 우상을 믿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쨌든 그 늦은 나이게 우르를 떠날 수 있었던 즉, 예수를 믿을 수 있었던 이유는 딱 하나다. 우르가 전혀 마음에 안 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히 뭔지 모르는 상황에선 더더욱 그 이유 말고는 있을 수 없다. 한마디로 온갖 짐승과 기괴한 형상의 우상에 제사드리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특별히 불의 신에게 사람을 산 채로 바치는 것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건 뭔가 아닌데? 정말로 세상을 주관하는 신이 인간의 피와 살을 먹어야 인간에게 복을 내려준다면 이미 그 자체로 모순이 아닌가? 정말로 저런 신이 참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내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신인가 갈등하고 또 고뇌했을 것이다. 자기는 정확히 인식하진 못했지만 사실은 여호와 참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으며 그분에게 묻고 또 물었던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은 인생사에 고난이 많은 것을 신이 주도했거나 훼방을 놓았다고 보았다. 그 신들의 기분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최대한의 정성을 바쳐야 한다고 믿었다. 인간이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치성이 인간을 산 채로 바치는 것이기에 가장 경건한 예배 내지 제사를 드린다는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그에 반대하는 아브라함을 오히려 비난했을 것이다.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그런 의식에 자의반타의반으로 참석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지극 정성을 대가로 신에게 복을 받았거나 최소한 염려가 없어지고 평강이라도 얻었다면 절대로 우르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거꾸로 제사를 지내면 지낼수록 의심이 더 짙어지고 허망해졌던 것이다.
사람을 신에게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모든 이들이 인생이 자기 생각과 계획대로 흐르지 않고 뭔가 눈에 안 보이는 힘이 주도하고 있음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제발 복을 내려주던지 최소한 훼방만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나름으로 신에게 구원을 간구한 셈이다.
그러나 그 간구에 내포된 실제 속내는 무엇인가? 자기들의 평안과 이 땅에서의 형통만 바란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갖고 인간의 역사에 개입 통치하는지 아무 관심도 없다.
점치러 다니는 사람들 중에 천지신명에게 인간세상의 죄를 없애고 거룩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복채 놓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지 않는가? 오직 사업이 형통하거나 아들 낳거나 아들 취직되게 해달라는 것뿐이다. 인간이 자기 멋대로 신을 부려먹겠다는 심보이다. 신은 또 그에 맞춰서 조강지처와 헤어지고 새 살림 차리면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달콤하게 약속한다.
아브라함도 그런 간구를 해봤겠지만 모두가 실패로 그쳤던 것이다. 스스로 자기를 높이고 이 땅에서 형통하려고 동원했던 재물, 권력, 명예, 철학, 종교 모든 수단이 자기 영혼에 평강을 이루지 못함을 철두철미 깨달았다. 그래서 “하나님 저는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곳은 너무 싫습니다.” 울부짖었고 그 때 하나님이 떠나라고 명한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구원진리는 물론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아직 모르지만 이렇게 사는 것은 인간의 할 바가 절대 아니라는 확신은 생겼기에 75세라는 늦은 나이에도 죄악의 땅을 떠난 것이다.
예수 믿는 믿음의 본질
이제 예수 믿는 믿음의 본질과 핵심이 아브라함을 통해 드러났다. 인간 스스로는 절대 구원을 이룰 수 없다. 자기 죄를 단 하나도 씻을 수 없다. 도덕적 선행과 종교적 경건은 물론 철저한 회개와 심지어 믿음조차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다.
아브라함이 이민을 결행하며 역사상 최고로 독한 사람 같지만 하란에서 지체했고 그 후에도 여러 번 잘못을 범했다. 그럼에도 지난 75년 동안의 인생에서 내린 결론이 무엇인가? 아무리 최고 치성과 자기 잘난 것을 바치더라도 하나님을 만족시킬만한 의인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또 그런 것을 바라는 신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 그런 인간들이 불쌍해서 신 쪽에서 먼저 인간의 정성과는 도무지 비교가 안 되는 큰 사랑으로 품어주어야만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인간의 피와 살을 먹는 우르의 신이야 말로 인간이 만들어낸 가짜다. 예수님처럼 당신의 피와 살을 인간을 위해 내어주어야 참 하나님이다. 아무 조건 없는 긍휼을 품고 이 땅에 직접 와서 인간의 눈물을 닦아주고 한숨을 들어주는 하나님 외에는 인간에게, 아니 바로 나 자신에게 아무 소망이 없다는 확신이 예수 믿는 근본이다.
기독교만이 불교 유교 회교도들을 적극 전도하는 이유가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니다. 기독교 교세를 확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의 교리나 그 종교가 구원을 주지 않는다. 우리를 지으시고 인생만사를 주도하시고 거룩하게 바꿔주어 당신과 교제 동행하기를 오히려 더 간절히 원하시는 하나님의 순전한 사랑 안에 제발 들어오라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에 대한 학문적 지식이 최고수준이다. 예수님의 삶만 본받기에 도덕적으로도 아주 경건하게 산다. 그러나 감히 단언컨대 그들에게 구원의 확신은 없다. 평강도 없고 영원한 생명은 물론 소망도 품지 못한다. 예수님 말씀대로 당신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데 즉,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사랑을 부인하는데 그분을 닮으려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만약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 분명히 진리이자 사실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이 땅에서 감옥에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즐기고 사치스럽게 살아야 한다. 남의 아내와 간음도 하고 라멕처럼 힘으로 빼앗아 와도 된다. 최대한 풍요롭게 사는 것이 정답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부재가 증명되면 저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반면에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분을 영접하고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인간이 가장 먼저 행할 일이다. 그분에게 이 땅뿐 아니라 죽음 이후의 영원한 운명도 완전히 의탁해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것이 가장 큰 죄다.
예수 믿는 본질은 쉽게 말해 이 땅에서 천국으로 이민 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이민 갈 때는 비록 최종 목적지는 몰랐어도 어쨌든 눈에 보이는 물질계 안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 이후의 이민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정말로 혼자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완전히 떠나야 한다.
바꿔 말해 독종 중의 독종이어야 한다.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이미 천국 시민권을 받았다. 그럼 우리 믿음이 독해서인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악을 따라가는데 최고로 독했는데 그것과 도무지 비교가 안 되는, 예수님의 너무나 지독한 사랑이 나를 품어주셨고 지금도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이다. 그럼 대체 무엇을 염려할 것인가? 도리어 평생을 감사해도 모자라지 않는가?
7/17/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