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에 관한 하나님의 뜻
창세기 강해 (6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창12:1-4)
하나님의 역사는 당연히 완벽하고 하자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시각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고 믿음이 상당한 신자의 눈에도 어설프게 여겨질 때가 가끔 있다. 오늘부터 살펴볼 기독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렇다.
그가 담대한 믿음으로 이뤄낸 업적이라고는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집에서 기른 318명의 군대로 엘람 왕과 싸워서 승리한 일 한 번뿐이다.(창14장) 모세와 다윗 같은 영웅적 면모가 거의 없다. 대신에 잘 알다시피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고 마누라를 팔아먹는 너무나 비겁한 짓을 두 번이나 범했다. 처자식의 문제로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인내하며 기다리지 못했다.
우리와 너무나 흡사한 모습니다. 아브라함은 분명 나약하고 치사한 소시민이었다. 처음부터 믿음이 견고한 자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일생이 쓰러지고 넘어짐의 연속이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기어이 믿음의 조상다운 인물로 변모 성장시켰다.
무슨 뜻인가? 우리도 충분히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하며,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는 바다. 기독교 역사가 짧은 한국인의 경우 대체로 집안에서 처음 믿은 경우이므로 믿음의 가문을 세울 책임이 있다. 아브라함처럼 이국땅에 이민 와있는 처지인 우리로선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려면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개인적 교제와 동행이 어떻게 형성 진행 성숙되었는지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당신이 제정한 법을 깨는 하나님
먼저 아브라함이 불려나온 전후사정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바벨탑 사건에서 인간들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힘을 합해 제국을 건설하려 시도했다. 그 벌로 하나님이 탑을 흔적도 없이 무너뜨리고 사람들을 온 지면에 흩으시고 언어까지 혼잡하게 했다.
한마디로 여러 종족으로 나뉜 것이다. 바울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하나님이 “모든 족속의 거주의 한계를 정하셨다”고 설교한 까닭이다.(행17:26) 본문 식으로 표현하면 인간 사회에 본토, 친척, 아비집의 울타리를 하나님이 조성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릴 소명을 인간에게 주면서 그 실행방안으로 결혼 즉, 가정을 이루게 했다. 각 종족으로 나눈 것도 같은 뜻이다. 저희처럼 작은 공동체가 서로 사랑으로 섬기기 용이하고 신앙 교육에도 유리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케 하고 온 지면에 사람을 흩으신 것이 결코 형벌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분의 징계와 형벌 안에도 구원의 은혜는 항상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아브라함이 불려나온 갈대아 우르는 바빌론 지역이다. 바빌론은 성경에서 사탄을 상징할 만큼 죄악의 소굴이었다. 불의 신(神)에게 사람을 산 채로 제물로 바칠 만큼 영적으로 타락했다. 실제로 사탄의 하수인이었다. 결국 인간은 모여서 사나 흩어지나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의 본성이 남아 있는 한 항상 그 열매는 처절한 실패와 죽음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예수님 오시기 전의 인류의 상태를 어떻게 묘사했는가?(롬3:9-18) 의인은 단 한 명도 없고, 하나님을 깨닫는 자, 찾는 자, 심지어 두려워하는 자도 아예 없어졌다. 대신에 피 흘리기에 바쁘다고 했다. 이처럼 하나님을 거역하는 데는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었고, 너무나 신속하고도 기쁘게 사탄 쪽으로 달음질 한 곳이 우르였다.
하나님은 지금 그 흩어진, 사실은 당신께서 흩으신 사람들 중에 한 명을 택했다. 그리고 당신께서 제정한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이라는 거주의 한계를 깨트리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럼 하나님이 A라는 계획이 실패하자 B의 대체방안을 제시한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
모든 하나님의 계획은 완벽하다. 특별히 죄 중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는 계획에 수정, 타협, 취소란 절대 있을 수 없다. 그럼 완전한 계획이 아니라는 뜻인데 아무리 새롭게 수정되어도 여전히 구원의 완전성은 보장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금령을 제정할 때나.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전수할 때나, 예수님의 초림이나, 장차 재림할 때는 오직 예수 십자가의 조건 없는 사랑으로만 인간을 구원하신다.
그 구원이 개인에게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모습은 예수님 당신이 선포한 대로 성령이 역사하여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다.(요3:3) 원죄 하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태어나는 죄의 본성을 예수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어주어 한 인간 인격체의 전체 내면에 제2의 거룩한 창조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 영원토록 동일하고 하나뿐인 구원 계획을 아브라함을 지명해서 불러내시고 시행하려는 것이다. 또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시작하려는 것이다.
죄에 찌든 한 사람을 거룩하게 변화시켜서 마찬가지로 죄에 찌든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이 방식은 인간의 방식일 수 없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방식이다. 인간의 모든 사상, 철학, 윤리, 도덕, 종교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의 지혜와 힘을 모으면 더 선해질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인간의 그것과 다르고 높다고 했다.(사55:8,9) 아이큐 두 자리의 바보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도 그 아이큐가 합산되어 작동되지 않고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영적으로 너무 무지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의 지혜는 아무리 모아도 여전히 인간을 높이려고 안간 힘을 쓸 뿐이다. 작금 세계 최고 선진국인 미국에서 최고 엘리트들이 머리를 맞댄 결과가 인권과 자유만 높이다가 지금 절망에 가까운 형국에 이르지 않았는가?
하나님이 한 명을 통해서 역사한다고 해서 믿음의 영웅주의(Elitism)를 표방하는 의도는 전혀 없다. 하나님은 블레셋에게 탈취당해 다곤 신상에 안치된 당신의 임재의 상징일 뿐이자 나무 상자 격인 언약궤만으로 사람의 도움 하나 없이 큰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아주 특별한 예외다. 그만큼 전능하신 하나님이 일반적으로는 당신을 향해 순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들어서 역사하신다. 아브라함처럼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도, 아니 바울 같이 가장 극악한 당신의 대적자도 당신의 자녀로 변화시킨다. 평생을 떠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이 주도하여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고야 마는 분이다.
힐러리와 트럼프 중에 누구를 찍어야 하는가?
지금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새삼 설명하려는 뜻이 아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그 놀라운 큰 역사의 주역으로 지명되어 불려나왔다.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도 바로 그 소망에 따라서 자기 일생을 헌신 충성한다는 것이다.
올해 미국 대선의 두 후보는 성경적 시각으로는, 아니 일반 세상의 윤리로도 도무지 대통령이 될 깜냥이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다. 소위 복음주의 진영마저 자기 당에서조차 탐탁하지 않게 여기는 트럼프 후보를 지지하는 판국이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뭔가 화끈하게 잘 살게 해줄 것 같은 기대감이다. 후보 수락 연설에서도 미국을 부강 시키겠다는 구호만 수십 번 강조했고 청중들은 열광하며 트럼프를 연호했다. 급기야 지지율도 역전되었다. 겉으로는 낙태와 동성애를 지지하는 힐러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니 트럼프를 찍을 수밖에 없다는 핑계를 대지만 그 속내는 돈을 밝히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힐러리가 더 낫다는 뜻도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해서 누가 대통령이 되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는 당신의 방식으로 당신이 주관하실 뿐이다. 또 그 주역은 바로 여러분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다. 단 한 명을 통해서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데 바로 그 표본이 본문의 아브라함이다.
문제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100% 완전하게 지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저했고 자기 생각에 따라 자기 방식대로 타협했다. 본토를 완전히 떠나지 않고 그 가까운 곳,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하는 하란에 얼마간 지체했다. 친척을 떠나라고 했지만 조카 롯과 동행했다.
아버지 집을 떠나기는커녕 아버지 데라와 죽을 때까지 함께 있었다. 예수님의 한 제자가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따르겠다고 했다. 주님은 그에게 죽은 자더러 장례하게 하고 너는 나를 바로 따르라고 했지 않는가?(마8:21,22)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으며 우리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늦게나마 완전히 떠났다.
그는 하란에 지체할 만큼 믿음이 견고치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앞으로 가야할 땅에 대한 생소함과 두려움 때문일 수 있다. 그러자 하나님이 다시 강력하고 명확히 계시했다. 그래서 어쨌든 75세라는 늦은 나이에도(4절) 떠났다. 그가 완전히 떠났다는 이 한 가지 이유가 하나님의 마음에 든 것이다. 물론 완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떠났다는 뜻은 아니다. 전혀 미련을 안 남기고 떠났다는 뜻이다.
바꿔 말해 단순히 공간적 이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갈대아 우르와 하란에서 살고 있었던 그와 가나안에 들어갈 때의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으므로 완전히 떠났다고 한 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간단하다. 성경이 증명한다. 그곳으로 되돌아갔다는, 시도라도 했다는 기록이 전무하지 않는가?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의 몸만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 이전의 생활방식과 전혀 달라졌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그를 상대하는 다른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떠남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는 뜻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을 아예 상종도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을 저주는커녕 분노도 내지 않고 비난도 하지 않았다. 단순히 마음을 오픈하는 진정한 교제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에 대한 아브라함의 마음이 냉정해졌다는 뜻도 아니다. 모든 이들이 즐기고 당연시하는 세속의 쾌락과 죄악을 이전처럼 휩쓸리지 않았고 전혀 동조 수긍도 않은 것이다. 그들을 오히려 더 불쌍히 여겼다.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추구하던 삶을 중지했다. 오직 자기와 가족의 형통과 평안만을 도모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자랑 치장하며 세상의 출세를 위해서 여호와 신앙을 전혀 동원하지 않았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당시로선 생존에 필요한 자원과 능력의 공급이 끊기어 제대로 보장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일차적인 뜻이다. 그러나 그런 뜻으로만 제한시켜 버리면 죄의 본성은 펄펄 살아 있는 채로 영혼의 변화는 전혀 없이 단순이 현실적인 삶의 장소와 여건만 바뀌었다는 뜻이 될 수 있다.
더 정확한 뜻은 아무도 자기를 모르는 곳을 갔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자기를 칭찬은커녕 인정도 안 해주고 알아봐주지도 않는 곳을 간 것이다. 심지어 자기와 같은 편이 되 줄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이다. 알기 쉽게 말해 두눈박이 원숭이가 외눈박이 원숭이 동네에 들어간 것이다.
여호와만 의존할 수밖에 없고 또 그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인생으로 바뀐 것이다. 일생을 거지처럼 동가식서가숙 하는 신세가 될 수 있다. 대신에 우르에서 우상 숭배할 때처럼 거짓의 아비 사탄에게 농락당하는 삶은 절대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가난하게 산 것은 아니지만 죽을 때에는 외아들 하나 남기고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떠남을 가르치지 않는 교회
작금 자칭 크리스천이라는 사람들마저 동성애와 낙태를 지지하고 잘못된 영적 흐름에 동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브라함과 같은 진정한 떠남이 없기 때문이다. 몸만 공간적으로 교회 밖에서 안으로만 옮긴 것뿐이다. 교회 안에서도 본문의 말씀을 하나님이 약속한 신자가 받을 복 즉, 신자의 후손들이 번창하고 그 이름이 창대케 되고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고 적용하는 가르침을 받은 탓이다.
본문의 하나님 약속이 성립되고 달성되는 유일한 전제인 완전한 떠남이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고 있다. 교인들에게 정말로 떠났는지 여부를 묻거나 따질 수는 없지만 완전히 떠나라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예컨대 설교에 죄, 심판, 지옥, 십자가 보혈 등의 용어만 사용해도 너무 골치 아프고 무거운 주제라고 듣기를 싫어한다. 그런 교회에는 사람들이 모이지도 않는다. 기존의 교인들마저 목사님 그 내용은 이미 다 잘 알고 있으니 또 다시 설교할 필요 없다고까지 말한다. 정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를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크게 의심스러운데도 말이다.
신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내 죄 값을 감당하고 죽으신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만큼은 명확히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방금 진술한 그 교리 내용에도 조금 부족한 설명이 하나 있는데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는가?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다. 그럼 마치 내게 뭔가 부족한 것이 있었는데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해주었다는 정도의 의미로 그칠 수 있다. 구원을 얻게 되는 첫째 요소로 그 교리를 믿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자칫 아주 부족한 복음으로 변질될 소지가 발생한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대신해” 죽은 것이다. 정작 수백 번 죽어 마땅한 자는 나다. 막상 십자가에 올라가 죽었어야 할 자도 내다. 내 죄는 세상의 어떤 방안으로도 도무지 씻을 수 없다. 인간이 고안하고 각성한 도덕이나 종교를 전부 다 동원해도 전혀 불가능하다. 세상과 인간, 특별히 내 쪽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절대 안 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을 조건과 자격조차 눈곱만큼도 없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한 성실성, 회개, 심지어 믿음조차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도 교리로만 수긍 동의해선 안 된다. 실제로 중생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본인 스스로 내가 이전의 내가 아니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나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오직 그분의 긍휼 아래에 자신을 벌거벗겨 드러내는 사건을 겪어야 한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 전부의 안과 밖이 완전히 뒤집어져야 한다.
그 떠남은 초자연적인 계기로 순간적으로 일어날 수 있고, 성경 말씀을 오래 배우다 보면 낙수 물이 바위에 구멍을 내듯이 완악하고 견고하게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내 심령을 천천히 그러나 완전히 깨트릴 수 있다. 모태신앙인 자도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아무 의심 없이 믿을 수 있었지 않는가? 자기 쪽의 노력과 자격은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정말로 아브라함처럼 떠났는가?
모태신앙을 가진 자를 비롯해 모든 신자는 반드시 예수님의 사랑 앞에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 이전에 하나님을 몰랐던 나와 나의 삶과 그 가치관에서 완전한 떠남이 있어야 한다.
교회 등록하여 주일 예배, 성경공부, 기도모임에 성실히 출석하고 안수집사 장로 직분 맡아 열심히 봉사 헌금한 것이 떠남의 보장도 아니요 증표도 아니다. 예수를 몰랐던 때는 진짜 사망이요, 예수를 알고 난 이후는 진짜 생명임을 체험으로 절감해야 한다. 또 그 새 생명을 근거해서 실제로 살고 있어야만 예수를 믿는 것이다.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따르겠다는 제자에게 예수님은 “죽은 자에게” 장례를 맡기고 대신에 당신을 따르라고 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죽은 자가 장례식을 치르지 못한다. 육신적으로 죽은 자가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라는 것이다.
당시로선 그 아버지가 예수를 믿지 못하고 죽은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죽은 아버지의 장례가 급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모든 인생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예수 안의 참 생명을 얻는 것이라는 뜻이다. 거짓 생명을 가르치는 종교 즉, 참 죽음과 어느 쪽을 택할지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지금 당장 예수님을 네 존재 전체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면 아무 소망이 없고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 중에 혹시 자신이 정말로 완전히 떠났는지 미심쩍은 자가 있는가? 떠남을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예수 믿은 것이 내 일생에 최대로 잘한 최고의 기쁜 일이었는가? “하나님 저를 어떻게 이런 자리에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예수 믿는 일이 정말 최고로 기쁘고 즐겁습니다. 이보다 좋은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절로 나와야 한다.
만약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진짜로 큰일 날 뻔 했기에 상상하기도 싫은가? 예수라는 이름만 불러도 눈가에 눈물이 절로 맺혀야 한다.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권세인지 실제 체험으로 절감하고 있는가? 성경 말씀을 통해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 세상 기쁨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음을 날마다 체험하고 있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또 그것이 하나님께 받은 최대의 축복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런 자는 실제로 자기 주변에서부터 그분의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맛볼 수 있다. 그래서 평생 예수 믿은 바로 그 일보다 더 감사할 일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만약에 예수 믿은 후에 예수 믿은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혹은 예수 믿은 대가로 더 풍성하고 화려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아직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닐 수 있다.
자신의 떠남을 구체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또 다른 방안이 있다. 스스로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바울 같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자신이 있는가? 그런 소망이라도 품고 있는가? 최소한 그럴 가능성이 있음을 아는가? 아브라함처럼 떠남은 더럽고 추한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그 추한 세상에서 지명해 불러내셨다. 나를 거룩하게 변화시켜서 그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라는 뜻이다. 특별히 미국으로 부른 뜻도 마찬가지다.
그런 헌신과 소망이 없다면 그래서 자기가 속한 공동체 가정에서부터 예수님의 주인이 되어 거룩하게 변화시키고 있지 않다면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다. 내가 떠난 곳이 완전한 실패요 죽음임을 절감했는데 어떻게 그냥 가만 두고 볼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쇠락해가는 미국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자는 절대 그 두 후보가 아니다. 바로 여러분이며 또 여러분이 믿음의 가문을 세워서 태어날 여러분의 후손이다. 우리는 아브라함보다 훨씬 더 비겁하고 치사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하시고자 하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 그런 우리를 들어 쓰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American Dream을 성취하라고 이곳으로 불러내신 것이 아니다. 바로 본문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God’s Dream의 일꾼으로 부르셨다. 땅 끝까지 전할 복음의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이자 감사할 일인가?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오늘 딱 한 가지만이라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한다. 믿음이란 사실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내가 진정으로 떠났는지 확인부터 하는 것이다. 정말로 완전히 떠났다면 하나님이 그 나머지 앞으로의 일은 반드시 당신의 영광으로 인도해주실 것 아닌가?
7/24/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