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49 나다니엘이 그리스도라 고백한 이유는?

조회 수 1794 추천 수 62 2009.12.15 19: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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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니엘이 그리스도라 고백한 이유는?


[질문]


요한복음 1장 49절에 보면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라고 대답하는데 나다나엘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무화과 나무아래에 있던 것을 아시는 것을 보고 이런 능력이 있으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생각한 건가요? 그저 신기한 능력을 보고 우와! 하고 내뱉은 말인지 아니면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예수님께 고백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믿음으로 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1:45-51)

질문에 대한 답은 질문자님이 추측한 대로 나다니엘이 고백한 전후 사정을 함께 살펴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나다니엘의 인물됨에 대해 성경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야 합니다. 또 예수님 말씀에 숨겨진 다른 뜻이 없는지, 그리고 나다니엘의 고백이 그 뜻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따져보아야 합니다.

먼저 무화과나무는 유대민족 자체를 상징할 정도로(왕상4:25, 미4:4) 유대 땅 곳곳에 번창했습니다. 또 큰 그늘을 만들기 때문에 당시의 랍비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장소로 사용했습니다. 나다니엘이 랍비였는지 불명(不明)하지만 성경이 예수님과 만남이 이뤄지기 전에 그 나무 아래 있었다고 기록했다는 것은 어쨌든 그가 율법을 묵상하고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또 빌립이 그가 율법에 능통한 것을 익히 알기에 예수님을 소개할 때에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바로 그분”을 만났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나사렛의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인간적 신분도 함께 말했습니다. 당시 구약에 능통한 이들은 메시아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예언을 익히 알고 있었는데 나사렛 출신이라니까 나다니엘은 그렇다면 메시아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또 나사렛은 갈릴리 이방 쪽에 속한 아주 이름 없는 마을이므로 그곳에서 메시아가 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호적하러 가서 출생하였다가 애굽으로 피신한 후에 나사렛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로선 당연한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동료 빌립이 와서 보라고 하니까 따라는 나섰습니다. “와서 보라”는 것은 단순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며 교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율법에 능통한 네가 반발하는 의미는 충분히 타당하지만 이 분을 만나면 네 생각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는 확신을 나타낸 것입니다. 구태여 설득, 권면, 토론, 반발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먼저 제자가 되어 따르고 있는 빌립으로선 벌써부터 예수님으로부터 신적 권능을 충분히 체험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네가 만나보기만 하면 네 생각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장담한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첫마디가 무엇이었습니까?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이는 단순히 나다니엘이 순수하고 정직한 사람이라는 칭찬이 아닙니다. 그들의 선조 야곱과 비교한 말씀입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여호와의 사자와 씨름하여 이김으로써 야곱 대신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창32:22-32) 또 그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다니엘을 참 이스라엘이라고 칭했습니다. 그럼 여호와 사자로부터 이름을 직접 지어 받은 야곱은 예수님이 보시기엔 참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뜻도 됩니다. 물론 그 이유는 일차로 야곱은 그 마음에 간사가 많았지만(창27:35) 나다니엘에겐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외에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할 때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32:26)라고 끝까지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우선 형 에서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라는 현실적 뜻도 있었지만 반드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 조부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가문의 장자가 되겠다는 간절한 소원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자식들의 후손에게까지 이어주겠다는 염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열두 지파를 자기 몸에서 낳고 축복하는 영예를 누렸으며 또 새로 얻은 자기 이름이 바로 민족과 나라 전체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에서의 위협을 피해 혈혈단신 이방 땅으로 도망 갈 때에 꿈에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 받았던 약속을 상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약속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확약하라고 사자에게 졸라댄 것입니다. 후손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대로 복의 근원이 될 것인지 묻고 또 물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받은 이름이 이스라엘 즉,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또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혹은 장자(prince with God)"입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2-15)  

말하자면 야곱도 자신과 후손의 진정한 구원을 소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원시 복음이 노아를 거쳐 아브람으로 이어졌던(요8:56)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언약 가운데 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노아, 아브라함, 야곱 등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히11:13)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선조들은 구원의 약속을 받긴 받았으되 십자가 복음을 예표, 상징하는 약속이었을 뿐입니다. 구약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그 약속이 수건으로 가린 것처럼 희미하게 이해되었지만 이제 예수님께선 택하신 제자들인 빌립과 나다니엘의 목전에서 완벽하게 성취시킬 것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독생자로서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인지, 인간에 대한 생각이 어떠한지 훤히 보여주고 알게 해줄 것입니다. 나아가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든 죄를 감당하고 죽으시며 부활하시어 가시적으로 생생한 구원을 실현시킬 것입니다.

따라서 나다니엘이 예수님으로부터 참 이스라엘이라고 불린 이유는 야곱과 성품으로 비교해서라기보다는, 이스라엘에 대한 구속 언약이 완성될 것을 직접 보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또 그가 무화과나무 밑에서 구약 성경을 실제로 묵상하고 있었던 내용도 자신과 이스라엘의 참 구원에 관해서였을 것입니다. 그것도 베델(창28장)과 얍복강(창32장)에서의 야곱 사건을 연상하고 있었을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예수님이 이어서 나다니엘에게 이보다 더 큰일을 볼 것이라면서 바로 야곱의 꿈 이야기를 예로 들었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 아주 흥미로운 표현이 나옵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더 큰 일은 분명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일입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구원이 성취되고 성육신한 메시아로서 직무를 완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더 큰 일이라고 했으므로 “나다니엘을 무화과나무 아래서 본 일”도 분명 큰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멀리 있는 그를 망원경처럼 알아본 뛰어난 시력을 자랑한다는 뜻은 아닐 것 아닙니까? 그가 나무 아래에서 묵상했던 내용 즉, 마음의 생각까지 정확하게 감찰했으니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는 아무 일도 아니지만 예수님이 자신의 그런 생각까지 꿰뚫어 본다는 것을 알게 된 나다니엘로선 얼마나 큰 일로 여겨졌겠습니까? 그럼에도 십자가 구속이 하나님의 가장 큰 일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나다니엘이 예수님의 평범해 보이는 칭찬 한 마디에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방금 전 나무 밑에서 묵상했던 내용을 정확하게, 아니면 최소한 그가 계속해서 기도했던 제목에 대해서, 지적하면서 자신을 참 이스라엘이라고 지칭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예수님으로부터 풍겨 나오는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신적 권능을 절감했을 것도 틀림없습니다.  

“대답하되”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페크리데”는 자신의 지성을 동원해 판단하여 확신을 갖고 대답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냥 습관적, 가식적, 혹은 칭찬에 상응하는 예의를 갖춘 대답이 아닐 뿐 아니라 뭔가에 홀린 듯이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대답도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방금 말한 고백의 구체적이고도 정확한 의미까지 그 당시에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사다리에 달려서 유일한 참 생명의 길이자 구원의 절대적 진리가 됨은 이제 “와서 보면서” 차츰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따르면서 보고 배울 것이며, 결정적으로는 골고다 현장에 있게 될 것이며, 나아가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받아서 완전한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고백은 마음에 간사가 없는 나다니엘이 자신과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의 염원이 담겨진 온전한 진정이었습니다. 또 구약성경에 능통하다 보니까 메시야를 예언한 시2: 6,7을 인용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오실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 바탕을 둔 고백이었습니다.

하나 첨언할 사항이 있습니다. 분명히 나다니엘이 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만 오히려 훨씬 뒤의 베드로의 고백(마16:16)을 “위대한 신앙고백”(the Great Confession)이라고 칭하는 까닭입니다. 또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빠진 사건 때도 이미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마154:33)라고 고백했지 않습니까?

이는 물론 베드로가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직접 듣고 배우고 본 결과로 확신에 찬 개인적인 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의 두 고백은 보고 배운 것에 바탕을 둔 온전한 확신이라기보다는 도무지 항거할 수 없는 예수님의 신적 권능에 이끌리어 나온 고백에 가깝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비로소 예수님이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할 것 즉, 구원의 길을 가르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고백도 비록 제자로 따르면서 보고 배운 가운데 생긴 완전한 확신에 찬 고백임에는 틀림없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구원의 도는 모르는 상태에서 나온 것입니다. 실제로 그 고백 후에 예수님의 그런 가르침을 받고도 절대로 십자가에 죽을 수는 없다고 만류하다가 예수님께 야단만 맞았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베드로도 나다니엘처럼 아직은 십자가의 더 큰일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의 지성적 도덕적 종교적 판단만으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깨닫지 못하며 어떤 형태로든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만 하나님의 사정을 알며 그분이 보낸 구세주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나다니엘의 고백에는 위에서 설명한 그런 전후 사정이 분명 있었지만 그 또한 성령의 간섭이 없었으면 그런 고백이 나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 오늘날의 신자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택하시고 개인적으로 찾아오셔서 가르치시고 당신을 보여주셨습니다. 또 세상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나아가 그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의 도야말로 절대적인 진리이자 참 생명임을 성령의 간섭으로 인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어찌 놀라운 신비이며 그 앞에 항복하지 않을 수 없는 권능입니까? 평생을 오직 주님께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드리며 갚아도 갚지 못할 은혜일뿐이지 않습니까?

11/1/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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