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어기면 어떻게 되나요?
[질문]
성경을 보면 서원이나 혹은 하나님께 드리는 약속은 반드시 지키라고 말씀하시는데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민30:2)
질문하고 싶은 것은
1.성령께서 내재하시는 사람도 하나님께 드렸던 서원이나 약속을 어길 수 있나요?
2.서원과 약속을 어기는 경우 어떻게 되나요?
[답변]
많은 신자들이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한 점을 잘 대변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맹세는 그 이해관계자와 내용에 따라 세 가지로 대별됩니다. 이런 구분이 명확히 안 되어 있는 관계로 성경이 말하는 바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이 여겨집니다. 즉 구약에선 맹세를 권장하고 신약에선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 같으니 어찌 해석해야 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또 그에 따른 하나님의 대응은 어떻게 달라지는지 더더욱 혼란스럽게 됩니다.
공적 기관의 서약
첫째 공적 기관에서 시키는 서약이 있습니다. 이는 신자라도 당연히 서약하고 또 서약한대로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신자도 국민으로서 지켜야할 바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롬13:1-4)
일반 법률, 제도, 규약 등은 인간 사회를 선하고 의롭게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제정된 것입니다. 특별히 악을 제어하려는 것이므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할 신자라면 더더욱 성실하게 지켜야 합니다. 어겼을 때는 당장에 현실적 불이익을 당합니다. 또 그 제도들은 하나님이 불신 세상에도 베푸시는 절대적이고도 의로운 섭리, 신학적 용어로 일반 은총, 하에 생긴 것입니다.
따라서 명백히 악을 표방하는 권세가 아닌 다음에는 거역하면 하나님의 심판도 자취한다고 성경은 엄격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일대일로 대응해서 특정한 벌을 내리실 수도 있지만 반드시 다른 일에 그 악한 여파가 미칩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이미 잘못 이해하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왜곡된 결과가 나을 수밖에 없는데 그 자체가 바로 그분의 벌입니다.
그럼에도 일부 이단 종파에선 “법원에서 증인으로 선서”하는 것은 맹세를 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국기에 대한 맹세”는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십계명에 위반된다고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금하는 맹세의 성격이나 우상의 의미를 정확히 모르고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신자의 행동을 율법적으로 제약하는 큰 잘못입니다.
법원에서 증인 선서를 하는 뜻은 위증을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약속하라는 것이며 위증할 때는 법에 정한 벌을 달게 받겠다는 동의입니다. 성경적으로도 십계명의 9계명을 충실히 지키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맹세를 금한 뜻은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우상은 하나님과, 특별히 인간사를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였다고 믿기에, 의도적으로 대체시킨 대상입니다. 단순히 어떤 형상물이나 상징이라고 또 그 앞에 절한다고 다 우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민족마다 자기들을 수호하거나 특정한 분야를 실제로 관장하는 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드라빔처럼 한 집안이나 가문을 지키는 신도 있었습니다. 어떤 형상에 비추어 만든 조상(彫像)을 소유하고 경외심을 갖고 그 앞에 절했습니다. 인생만사를 주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체 내지 방불하다고 실제로 믿은 것입니다.
국기는 다릅니다. 국기가 인간만사는커녕 한 나라의 역사도 결코 주도하지 못합니다. 한 나라의 상징일 뿐입니다. 국민을 하나로 단결시키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장려하는 역할만 합니다. 어느 누구도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면서 하나님 같은 능력을 지녔다고 믿고 경배하지는 않습니다. 국기는 우상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현대인들이 자기 인생의 안전과 행복을 책임져 줄 수 있다고 믿는 돈, 지위, 권력, 학벌, 외모, 건강 등이 우상입니다.
물론 기독교 신자는 종족, 이념, 인종, 문화, 중교, 국가를 넘어서 모든 이를 하나님의 소중한 형상을 지닌 자로 사랑해야 하지만, 여전히 한 나라에 속해서 그 나라에 충성할 의무는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으로 종족과 색깔이 다르게 태어나게 해서 거주의 한계를 정한 것도 각기 그 나라에 충성하라는 뜻입니다.
이런 이단의 가르침은 잘못인줄 어지간한 신자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공적 서약에 대해 신자가 정작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국방, 선거, 교육, 납세 등의 의무를 다 잘 지키는 것입니다. 예컨대 공과금과 세금을 제 때에 정확하게 내는 것입니다. 공식적인 맹세는 안 시켜도 법으로 정해지면 실질적으로는 모든 이에게 그 기간 안에 내도록 서약시킨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13:6,7) 예수님도 하나님의 것은 당연히 하나님에게 바쳐야 하지만 가이사의 것도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명했지 않습니까?
사람 사이의 맹세
자기가 한 약속에 대한 진정성과 성실성을 보증하려는 뜻으로 약속의 수혜자에게 맹세합니다. 약속을 반드시 지키고야말겠다는 보장으로 별도 조건을 추가하게 됩니다. 그 보장이 “하늘에 대고”, 혹은 “어기면 사람이 아니다.”, 혹은 “성을 갈겠다.”는 식의 추상적 개념일 수 있고 아니면 금전적 현실적 보상을 걸기도 합니다.
상거래 계약에도 그런 보장은 당연히 붙게 마련입니다. 약속을 어길 시는 계약금을 반환받지 못할 뿐 아니라 약속 파기에 따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맹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 사이의 맹세는 원론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납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4:13-16)
본문에 맹세나 그에 관련되는 용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장사꾼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해서 이득을 볼 자신이 있다고 자랑하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맹세나 마찬가지입니다. 장래 일을 자기 능력으로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맹세와 같은 성격입니다. 그러나 잠간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인생에서 장래 일을 함부로 장담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렇다고 신자가 장래 일을 계획하여 시행도 하지 말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다른 도시에 가서 일 년을 유하며 계획한 사업을 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주의 뜻이면” 그 계획이 성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해야 합니다. 잘못은 장래 일을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보장하려 든 것이지 계획을 세워 시행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3-37)
예수님도 단지 자신의 약속에 대해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고만 말하라고 했습니다. 약속을 성실히 지키겠다는 진정성만 보이면 되지 다른 대상에 대고 맹세까지 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안에 대한 자기 의견을 진솔하게 밝히기만 하면 되지 자기 의견이 옳다는 것을 무리하게 입증하려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머리 터럭 하나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는 인간이 미래를 함부로 장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맹세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침범하는 것으로 인본주의적 죄악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까지 결론지었지 않습니까?
물론 사람들 사이에 정 필요하다면 약속의 진정성을 맹세하며 보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든 대로 계약서의 손해배상 조항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뜻은 맹세의 본질적 의미를 깨닫고 경솔한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맹세는 상호간의 신뢰성을 제고할 수 있는 이점이 있기에 역으로 그 점을 의도적으로 악용하는 죄를 범치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약속을 지킬 마음이 애초부터 없으면서 맹세를 하여 상대로 속게 만들려는 짓은 이중 삼중의 죄를 범하는 셈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며 그분의 영역을 침범한 것을 넘었을 뿐 아니라 고의로 사기를 쳐서 부당 이득을 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죄악을 베드로가 저질렀습니다. “베드로가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마26:74)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린지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맹세하면서까지 위증한 것입니다. 물론 연약한 인간으로서 그런 위급한 경우를 당하면 담대하게 목숨마저 내걸 수 있는 자는 거의 드뭅니다. 그러나 최소한 하늘에 대고 맹세는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래야만 상대가 더 이상 추궁하지 않으리라 순간적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자기 생명을 부지하려고 얼떨결에 나온 맹세였지만 처음부터 고의적으로 맹세를 악용하는 죄를 구약의 제사장과 장로들이 범했습니다. 전혀 위급하지 않은데도 순전히 자기들 배를 채우려는 맹세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르반 막7:11)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15:4-6)
원래는 하나님께 드린 물건은 사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너무나 당연하고도 올바른 규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차츰 자기 재산이 고르반 되었다고 맹세한 후에 일부만 성전에 헌납하고 나머지는 자기 재산으로 전용하면서 부모 공양을 하지 않아도 장로들이 묵인해 주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자식이 나중에 회개하여 남은 재산으로 부모를 공경하려 해도 서기관의 법으로 금지시켰다고 합니다. 맹세를 악용하여 제사장, 관원, 불효자식들이 의기투합하여 골고루 이득을 취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말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문제는 모든 인간이라면 마땅히 행해야할 바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꺼이 행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깨트릴 수 없는 인간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도덕률이기에 맹세가 전혀 필요 없는 사안입니다. 그런 일을 두고 성전에 바치겠다는 맹세를 시켜가며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마저 위반했으니 이런 악도 없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제대로 가르쳐야 할 영적 지도자들이 앞장섰으니 말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끼리의 약속은 주님의 말씀대로 옳다 아니다만 말하고 그대로 수행하면 됩니다. 구태여 맹세할 필요는, 상거래 상의 법적 조항을 제외하고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나 그분과 관련된 어떤 것을 걸고 맹세할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신자라면 사람들끼리 행한 맹세도 당연히 하나님 앞에서 한 것과 동일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도 동일하게 사랑해야 할 뿐만 아니라 범사를 그분이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맹세 했으니 꼭 지켜야 하고, 맹세하지 않은 것은 등한히 여겨도 된다는 것은 아예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아무리 작은 약속도 성실히 지켜야만 합니다. 정 못 지킬 사정이 생긴다면 응분의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사전에 알았다면 미리 양해를 구하고 예상되는 손해를 보충해 주어야 합니다. 미처 모르고 전혀 본의 아니게 어쩔 수 없이 그런 결과가 나타났어도 자세한 상황 설명과 함께 용서와 배상의 절차를 충분히 행해야 합니다.
요컨대 적은 일에도 당연히 충성해야 할 신자에게는 맹세는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평소부터 이웃들에게 전적인 신뢰감을 심어 주어야 하며 또 공과 사를 분명히 구별하여서 자기 능력 밖의 일은 정중히 사양 내지 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반면에 일단 자기가 약속한 것은 전혀 맹세할 필요 없이 그대로 수행하면 됩니다. 또 그 전에 온전한 신뢰감을 상대에게 이미 심어 주었다면 맹세를 요구하지도 않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 드린 서원
상기 두 경우는 약속의 이해 당사자가 인간이었습니다. 법원이나 국가라도 여전히 인간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인간과 하나님이 약속하는 경우를 살펴봅시다. 그것도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약속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특별히 당신의 백성에게 언약한 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응당 그분이 신실하게 수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14:24,27)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 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사45:23)
하나님이 경영하신 일이 그대로 되지 않을 리도 없으며 약속하신 말씀이 성취되지 않고 땅에 떨어질 일은 결코 없음에도 의심 많은 인간 아니 신자들 때문에 맹세까지 하셨지 않습니까?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열방의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시겠다는 언약을 베풀면서 하나님 당신께서 일방적으로 보장을 섰지 않습니까?(창15장)
- 주고받는 서약
인간이 하나님에게 약속하는 경우는 세 가지로 세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주고받는(give and take) 식으로 서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보상을 주시면 저도 뭔가를 내놓겠다든지, 그 반대로 내가 뭣을 먼저 드릴 테니까 하나님도 그에 맞는 보상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는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자발적으로 기꺼이 당신을 경배하길 원하십니다. 당신께 복을 받아야만 감사하다든지, 어려운 경우에만 당신을 찾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생각은 신자를 거룩하게 바꾸는 것이지 그 처한 환경을 풍성하게 바꾸려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를 거룩하게 하는데 필요하다면 궁핍이든 풍요든 당신의 전적 주권으로 행하실 뿐입니다.
아들이 주시면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한 대로 한나가 사무엘을, 마노아가 삼손을 바친 것은 이와는 다른 경우입니다. 당시는 무자(無子)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인식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구원 받지 못한 천하의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들로선 당연히 자식을 갖고 싶은 인간적 뜻도 있었겠지만 근본적으로 죄에서 구원을 받으려는 의도도 강했습니다. 나아가 사무엘이든 삼손이든 이미 이스라엘을 향한 구속 계획안에서 하나님 그분께서 택한 인물들이었습니다. 부모들의 인간적 소망에 앞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둘 다 나자마자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졌습니다. 말하자면 이미 주의 종이 되어서 자기 자식이 아니었기에 자식 자체가 하나님께 받으려는 궁극적 대상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드려 자기에게 남은 것 하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개인적으로 현실적 유익을 얻으려는 의도의 서약은 당연히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손에서 무엇인가 받아본들 대체 그분께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또 그 받은 것에 비례해서 보상을 베푼다면 이미 절대적 주권을 가진 하나님이 아닙니다. 동전을 넣으면 그 가격에 합당한 물건이 나오는 자동판매기 같은 하나님이 되어버립니다. 아브라함의 예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주도적인 열성이 인간을 이끄시지 인간의 치성으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하나님이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승리토록 해주면 누구든 가장 먼저 영접 나오는 자를 번제로 바치겠다고 서약한 사사 입다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다 무남독녀가 그 제물이 되는 결과를 낳았지 않습니까?(삿11:29-40) 하나님과 주고받으려는 맹세 자체가 잘못인데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는 이중의 죄를 범한 것입니다. 우연의 일치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그 잘못을 깨닫게 하려고 외동딸을 희생시킨 것입니다.
- 성전으로 맹세
둘째는 하나님께 약속하면서 자신의 진정성과 성실성을 보장하기 위해 뭔가를 거는 것입니다.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열성을 드러내려고 어떤 귀한 물건이나 사안을 단지 보증물로 내세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따로 바치거나 받을 것이 없다는 면에서 첫 번 경우와는 다릅니다. 이것 또한 잘못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이 대표적 예입니다.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마23:16-22)
성전이나 제단을 걸고 맹세한다고 하는데 하나님께 그것들을 드리거나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전과 제단은 세상에 하나뿐이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너무나 귀한 것들입니다. 약속을 그것들처럼 최고로 귀하게 여겨서 꼭 지키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대 관원들은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성전과 제단으로 한 맹세는 안 지켜도 되고 성전의 금과 제단 위의 예물에 대고 맹세하는 것은 꼭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아마 맹세를 불이행하면 보증물과 동일한 양을 성전에 바쳐야 한다고 요구했을지 모릅니다. 여기서 성전의 금이 성전 장식과 집기로 비치된 금인지 제단에 바친 금인지는 불명하지만 어쨌든 예물이나 금처럼 돈으로 환산되는 것들로 맹세한 것만 유효하다고 한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성전, 제단, 성전의 금, 제단의 예물 그 어떤 것을 보증물로 내세워도 이미 하나님 앞에서 행한 맹세라고 말합니다. 보증물의 질과 양에 따라 하나님께 드린 약속의 진정성과 심각성이 달라질 수는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작은 것은 어겨도 되고 큰 것만 지켜야 한다는 법은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께 맹세하면서 무엇을 건들 그것이 하나님보다 귀하고 크겠습니까? 세상에 하나님을 앞설 보증물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께 맹세한 것 자체로 그분을 보증물로 건 셈입니다. 따로 다른 것을 걸 필요도 없고 건다는 것 자체가 너무 말이 안 되다 못해 하나의 희극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 줄 제대로 안다면 도무지 할 수 없는 짓입니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제대로 가르쳐야 할 유대관원들더러 재물을 밝히는 외식하는 자라는 표현을 넘어서 아예 “소경된 인도자”라고 예수님이 지적한 까닭입니다.
간혹 자신의 서약을 보증하기 위해서 자신의 어떤 경건한 행위로 보증하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컨대 금년에는 새벽 기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할 것인데 그 보증으로 30분 먼저 일어나서 반드시 성경을 읽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동안 시간에 맞추어 일어나는 것이 힘들어서 새벽기도에 참석 못했으니까 그보다 더 빨리 일어나겠다는 각오는 순수하고 선한 의도지만 만약 한 번이라도 늦게 일어나면 맹세를 두 번 어긴 셈이 됩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그런 식의 맹세나 보증을 결코 요구하지 않습니다. 바쁜 일이 있거나 고단하면 새벽기도에 빠질 수도 있는데 맹세를 해버리면 절대 빠지지 않겠다는 뜻이 되어버립니다. 만약 정말 위급한 일이 생겨 어쩔 수 없이 빠지게 되면 스스로를 죄로 속박하는 결과가 됩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준 예수님을 율법규정에 얽매여 매도한 바리새인과 똑같은 처지에 자신을 빠트리는 셈이지 않습니까? 앞에서 살펴본 대로 맹세 자체가 원론적으로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 순수한 자발적 서원
하나님께 맹세하면서 그분과 무엇을 주고받으려 해서도 안 되며, 구태여 세상에 있는 것들로 보증물로 내세워서도 안 됩니다. 정말로 마음에 소원이 강렬하게 일어나면 자발적으로 기쁘게 맹세하면 됩니다. 또 그럼 이미 맹세가 아니라 단순한 약속일뿐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반드시 지키라는 율법규정은 바로 이런 순수한 서원을 전제로 말한 것입니다. 후대에 맹세에 온갖 추가 규정들이 늘어난 것은 사람들이 서원을 하고도 잘 지키지 않고 오히려 오용, 악용하는 경우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맹세를 통해 관원과 일반인이 합작하여 서로 이득을 보는 죄마저 생겼지 않습니까?
그리고 구약시대의 서원은 주로 성전에 드리는 제물에 관한 것입니다. 율법에 규정된 대로 제사 지내는 것과는 별도로 개인적으로 어떤 죄를 지었거나 감사 화목제를 지내고 싶거나 할 때에 서원한 것입니다. 그대로 지켜야 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또 그대로 지키지 않았을 때는 벌이 따르는 것도 필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장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거나, 병이 나거나, 하는 일마다 실패케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주로 개인적인 죄를 사하려 헌물의 서원을 해놓고 바치지 않으면 죄 사함을 구하지 않겠다는 뜻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나아가 하나님은 맹세를 어떤 경우가 생기든 절대적으로 지키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인용하신 민수기 말씀만 해도 이어서 어떤 내용들이 나옵니까? 딸의 서약을 아비가, 아내의 서약을 남편이 무효케 할 수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의 불완전성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아무리 순수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서원했어도 틀린 서원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사사 입다의 서원이 그랬지 않습니까?
서원이란 하나님이 시키지 않았는데 신자 스스로 한 것입니다. 결국 지키고 안 지키느냐 여부는 순전히 본인에게 달렸습니다. 만약 진정에서 우러난 서원이되 올바른 서원이면 하나님도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신자의 서원 이행 여부를 떠나서, 또 그에 따른 상벌과도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 마음만은 소중히 여기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엄밀히 따지면 하나님의 상벌과 서원이행 여부를 연결시키는 것도, 서원을 안 지키면 벌이 따르는지 단순히 궁금해 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그분과 주고받는 관계를 맺겠다는 욕심 내지 미련이 어느 정도는 적용된 것입니다. 상벌을 염두에 둔다는 것 자체가 의도했던 안했던 이미 그런 관계가 형성된 것이지 않습니까?
또 지키지 않아 벌이 따른다면 그 벌이 두려워서 지킬 것인데 그러면 이미 맹세의 순수성이 반쯤 상실되는 것 아닙니까? 반대로 잘 지킨 것으로 끝나고 신자에게 아무 현실적 보상이 없는 경우도 자기가 잘 지킨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며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라는 은근한 기대가 들 것입니다. 이 또한 이미 스스로 보상을 찾아 먹은 셈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시기에 신자는 단순히 옳다 아니다만 말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서원이란 정말 순수하게 스스로 한 것이니까 스스로 그대로 지키면 그만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크시고 긍휼에 다함이 없는 하나님을 신자가 제한시키는, 그것도 더 좋고 강한 믿음으로, 오류일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신자는 어떤 경우가 되었든 구태여 맹세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장래 일을 절대 인간이, 아무리 믿음이 좋고 심지어 예언의 은사가 있는 신자라도, 보장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약5:12)
상기의 관점에서 두 구체적 질문에 답변 드리자면,
1. 성령께서 내재하시는 사람도 하나님께 드렸던 서원이나 약속을 어길 수 있나요?
이 질문의 답변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모든 신자에게는, 진정으로 거듭나서 구원을 받은 신자라는 전제가 붙기는 하지만, 성령이 내재합니다. 그런데 신자가 죄를 짓습니까? 안 짓습니까? 죽을 때까지 나쁜 습관을 고치지 못해 동일한 죄를 반복하거나 죄인 줄 알고도 심지어 고의로 짓는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제대로 깨달아 그 은혜 가운데 들었다면 구원이 취소되는 법은 없습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얻어 천국에서의 상급은 분명 달라지긴 해도 말입니다.
그런데 서원의 성격은 어떠합니까? 나쁜 짓을 짓겠다는 서원이란 절대 없습니다. 주의 종이 안 되더라도 어쨌든 주의 일을 하거나 최소한 선한 내용으로 서원합니다. 서원을 어긴다는 것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럼 성령이 내재한 사람이 죄도 짓는데 서원을 어길 가능성이 없다고 여기는 것은 앞뒤 말이 안 맞지 않습니까?
2.. 서원과 약속을 어기는 경우 어떻게 되나요?
우선 이 질문도 앞선 질문과 동일한 맥락에서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지어도 그 구체적 죄에 대해선 일대일로 대응해서 상벌을 주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성령이 신자에게 내주하게 된 신약시대 이후로는 없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이 신자의 환난과 허물과 잘못에 대해서 위로, 권면, 강권하는 것이 당장의 징벌보다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죄에 대해 일대일로 대응하여 벌을 주지 않은데 서약 즉, 선을 행하지 않았다고 당장에 벌을 줄 리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주셨을 때부터 율법적인 분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자유의지에 따라 당신께 자발적으로 기꺼이 순종하기만 원하십니다. 구약시대에 간혹 상벌이 직접적, 개별적, 구체적이었던 이유는 아직 완전한 것 즉,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은혜가 베풀어지기 전이어서 당신의 권능을 먼저 확실히 보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율법을 자세히 따지면 모든 규정이 정죄의 공리보다 사랑의 은혜가 근간이 되어 있습니다. 알기 쉽게 말해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가 된 자를 결코 심판하지 않습니다. 징계만, 그것도 꼭 필요할 때에 당신만의 방식으로 주십니다. 그 징계조차 사랑의 매일 뿐입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렘29:11) (이 주제에 대해선 성경문답 사이트 #4 “성경에 "그리하면 ...하리라"고 표현된 하나님은 조건부 하나님인가?”라는 글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의 때와 방식으로 징계하신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어떤 잘못된 행위마다 각기 대응한 때와 방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신자에게 원하는 것은 자발적이고도 기꺼운 순종인데, 개별적으로 대응해 벌을 주면 독선적인 분이 되어버립니다. 신자는 무서워서라도 맹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목적하는 바를 스스로 무너뜨릴 리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신자의 잘못을 무조건 모른 채 그냥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신자의 믿음이 자라고 가장 유익이 되도록 반드시 어떤 조치는 취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린 서원이 순수하고 기꺼운 것이 아니면 이미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잘못된 서약을 두고는 하나님이 구태여 상벌로 관여치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불신자도 상실한 마음 그대로 두어서 죄악을 더 저지르는 것 자체가 가장 중한 벌이듯이 말입니다. 물론 신자가 잘못된 서약을 했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다른 일을 통해서, 성경 공부를 하게 해서라도, 나중에 그 잘못을 깨닫게 해서 취소하도록 간섭하십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정말로 순수하고 기꺼운 서원이라면 하나님은 신자의 믿음의 분량에 맡기고 그냥 두고 보십니다. 그대로 지키기를 하나님은 인내심을 갖고 지켜봐 주시는 것입니다. 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그 서원을 지킬 수 있도록 믿음을 지켜주시고 필요하다면 강권도 하십니다. 주위 여건도 순종할 수 있도록 바꿔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순수하게 서원한 내용을 하나님은 이미 기쁘게 받으셨고 또 신자가 지킬 수 있는 충분한 믿음과 여건이 형성되었는데도 지키지 않는다면 어떤 강권적 조치는 발동하시지 않겠습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당신만의 때와 방식으로 말입니다. 다른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도무지 지키지 않고는 안 될 상황에 밀어 넣든지 하는 것이 바로 그분의 벌이자 간섭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자가 전혀 깨닫지 못하고 계속 어긴다면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 자체가 취소되는 것은 아니라 천국에서 주님과 너무나 부끄러운 대면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내심을 갖고 신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두신다는 사실을 정말 심각하게 받아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선 서원해놓고 지키지 않는데 따른 죄책감, 최소한 마음의 부담감이 바로 아주 중한 벌이 되니까 말입니다. 아니 서원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미 그 믿음부터 뭔가 균열이 생긴 것이지 않습니까? 역으로 말해 바로 그러니까 하나님이 서원을 불이행한다고 바로 벌주기보다는 믿음이 바로 서도록 기다리고 성령의 간섭해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질문자님에게 거꾸로 질문해 보겠습니다. “진정으로 순수하게 자원한 서원이고 믿음도 굳건하게 올바로 서있고 모든 여건이 성령의 간섭으로 충분히 지킬 수 있는데도 지키지 않았다면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당연히 틀렸습니다. 그러한데도 안 지키거나 못 지킬 리는 없습니다. 그럼 그 믿음 자체가 엉터리이며 심지어 하나님의 구원에도 아직 못 들어온 것일 수 있습니다.
서원이야말로 신자의 믿음의 분량에 달렸다는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서원이행과 하나님의 상벌을 따지는 것 자체가 원칙적으로 불합리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할 일은 하나님 앞에 오직 옳다 아니다 답하며 그대로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절대로 순간적으로, 특별히 감정에 이끌려 쉽게 서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정말 서원하고 싶다면, 해외선교사로 나가겠다는 것 같은, 오랜 기간 기도하면서 자기가 처한 여건과 되어져 가는 상황을 잘 살펴보면서 서원해야 합니다. 환경에 억매이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서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니 그대로 정말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나님이 환경과 사람과 말씀 가운데 응답하고 계신 것을 놓치지 말고 잘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요컨대 서원은 가능한 하지 말고 정말로 순수한 열정에서 했다면 상벌에는 전혀 신경 쓰지 말고, 구태여 보장물을 걸 것도 없이 그냥 그대로 행하면 됩니다. 아니 그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서원입니다. 행하고 있지 못하다면 뭔가 잘못된 서원이거나 지금 현재의 믿음의 상태에 큰 균열이 생겨져 있으므로 그 믿음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현실적 유익을 바라는 서원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정 서원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에만 서원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 순수한 열정으로 서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런 뜻이지 않습니까? 순수한 열정으로 서원해놓고 그대로 행하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상벌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그 이전의 열정으로 제대로 회복시키는 것이 급선무이지 않습니까?
3/6/2010
P. S. 신앙상의 혼란을 막기 위해 제 개인적 생각은 공적인 맹세는 서약(誓約), 사람끼리 하는 맹세는 그냥 맹세(盟誓), 하나님께 한 맹세는 서원(誓願)으로 통일하면 좋겠습니다. 각기 선서하면서 약속한다는 의미와,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다는 다짐의 의미와, 하나님에게 자신의 소원을 겸손하게 아뢰면서 이행하겠다는 약속을 드렸다는 의미로 말입니다. 물론 설령 교회 내에서 용어의 통일이 되어도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못하니까 별 의미는 없습니다. 제 뜻은 맹세에 대해 이런 구분을 해서 성경 말씀을 이해하고 적용하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