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교회에 만연한 고르반

조회 수 3223 추천 수 7 2013.02.19 20:5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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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교회에 만연한 고르반 (마14:34-15:9)
마태복음 강해 (161)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그 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마14:34-15:9)


작정헌금과 부모의 중병

어떤 신자가 교회건축을 위한 작정 헌금을 하려고 상당한 돈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갑자기 아버지가 보험이 카버하지 않는 중병에 결려 수술하고 입원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병원비가 많이 나와서 하나님께 작정한 헌금이지만 아무래도 수술비로 사용해야겠다고 목사와 상의했다. 그러자 하나님께 서약한 것이므로 다른 용도로 사용해선 절대 안 되니까 치료비는 은행대출을 받거나 친구에게 꾸어서 충당하면 하나님이 나중에 다 갚아주신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럼 목사님 말씀대로 따라야 하는가? 또 과연 그런 가르침이 성경적인가?  

그에 대한 해답을 예수님이 본문에서 제시하고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 후에 그 소문은 퍼져나갔고 주님은 이스라엘 전국적으로 아주 유명한 인사가 되었다. 그러자 정치와 종교 등을 총괄하는 최고기관인 산헤드린에서 정식으로 조사단을 보냈다. 지금으로 치면 한국기독교총연합에서 이단조사단을 파견한 셈이다.

그런데 조사단이 던진 첫 질문이 무엇인가? "당신의 제자들이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다는데 사실인가?" 참으로 시시하지 않는가? 불치병을 낫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 것이 사실인지 따지지도 않았다. 그런 이적을 불러오는 능력의 원천이 과연 어디인가? 당신이 정말로 메시아가 맞는가? 아니라면 과연 당신은 누구인지에 대해선 전혀 따지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냥 방치했다간 예수의 추종자 모두가 그대로 따를 것 같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규정들이 유명무실해지고 자신들 영향력이 땅에 떨어질까 염려한 것이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직접적인 답변은 접어두고 너희는 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고 반문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장로의 유전은 어겼어도 하나님의 계명을 위반한 적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너희와 우리가 각기 하나씩 어겼으니 피장파장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장로의 유전과 하나님의 계명은 다르다고 엄격히 구분한 것이다. 또 하나님의 계명이 장로의 유전보다 절대적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장로의 유전을 범한다고 해서 죄가 아니며 하나님이 문제 삼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상식적으로 따져도 허기가 졌는데 주위에 손 씻을 물이 없어서 그냥 밥을 먹는다면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다윗이 사울의 추적을 피해 도망 다니느라 사흘을 굶자, 율법에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다고 규정한 성막의 거룩한 떡을 먹었다. 말하자면 장로 유전이 아니라 율법을 어겼음에도 하나님이 벌을 주기는커녕 야단 쳤다는 기록도 없지 않는가?

하나님의 계명과 장로의 유전.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이 직접 모세에게 수여하였고 성경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율법을 말한다. 장로의 유전은 유대 랍비들이 모세 율법을 해석하여 현실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제정한 세부적인 규정이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노동하지 말고 안식하라고 해서 아무 일도 않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어디까지가 노동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힘들다. 그래서 안식일에 5리 이상 여행하는 것을 금지했고, 여자가 세수는 할 수 있어도 화장은 금한 규정들이 바로 장로의 유전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그 유전의 내용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고 유익한 것이다. 위생 상태가 열악했고 무덥고 먼지가 많은 유대 날씨에선 손 씻고 밥 먹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거기다 밖에서 알게 모르게 부정한 것들과 접촉했을 수 있으므로 신체를 정결케 한다는 영적 의미도 있었다.

또 그런 규정을 제정한 동기도 아주 선했다. 포로에서 귀환한 유대에 영적 각성이 일어났다. 남북 왕국이 멸망하여 적국에 포로로 잡혀간 이유가 하나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율법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철저한 자각이 따랐다. 그래서 이제는 정말로 율법을 성실하고도 정확하게 준행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문제는 실생활의 지엽적인 문제를 다루다 보니 점차 그 규정의 숫자가 늘어나 무려 617개나 되었다. 불완전한 인간의 지혜로만 율법을 해석하다 보니 규정 간에 모순 상충되기도 했다. 점차 사람들이 규정을 문자적 형식적으로만 지켰으며 하나님이 원래 율법을 제정하신 목적과 뜻에 상충되는 결과들이 나타났다.  

지금 예수님은 그 대표적 예를 들었다. 어떤 이가 자기 물건이나 돈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선언하면 즉, “고르반 되었다”고 말하면(막7:11) 다른 용도로는 전용이 불가능했다. 하나님께 서약한 것을 어기지 말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나 일단 고르반 되었다고 선언하고는 일부만 성전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 맘대로 사용했다. 심지어 재산이 있음에도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고르반 된 것이라고 둘러대면 아무도 규제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호리라도 갚아라.

예수님은 예물을 제단에 바치러 오다가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 일이 생각나거든 가서 먼저 화해한 후에 바치라고 했다.(마5:23) 또 이어서 그런 원망 중에 채무로 송사(訟事)하는 경우도 있는데 원금과 이자를 호리(毫釐) 즉, 일 센트까지라도 다 갚으라고 명하셨다.(25,26절) 성전에 예물을 바치는 것보다 인간관계를 바로 잡는 것이 더 우선이라는 뜻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부터 율법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지 질문을 받자 예수님은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둘째는 첫째와 같다고 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라면 자연히 이웃도 사랑하게 된다는 뜻이다. 십계명에도 첫 네 계명은 하나님 사랑이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인간관계 즉, 이웃 사랑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부모님 사랑이 이웃 사랑 중에 첫째로 나온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실제 인간관계에선 가장 먼저 부모 사랑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서두에 제기된 질문으로 돌아가면 작정헌금으로 모아놓은 돈으로 부모 치료비에 충당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 문제가 하나님과 부모 중에 누가 더 중요한지 따지는 차원이 아니다. 하나님은 마땅히 부모보다 더 귀하다. 신자의 삶의 목적, 근원, 능력의 전부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뜻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고 했고(삼상15:22),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선 무수한 제물이 당신께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한탄했다.(사1:10) 신자가 종교적 형식을 준행하는 것보다 그 중심에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되 반드시 이웃 사랑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께서 신자에게 바라는 것은 당신에게 많이 바치라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인도를 받아 그분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아름답고 거룩한 공동체 즉,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라는 것이다.

아직도 미심쩍은가?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고 계획하자 나단 선지자가 나타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렸다. 그 계획을 하나님이 거부한 이유가 무엇인가?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기 못하리라.”(대상22:8) 대신에 평강의 사람인 그의 아들 솔로몬으로 건축케 했다. 역으로 따지자면 하나님의 뜻은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치르지 않는 것이 성전을 건축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첫 질문에 적용하면 부모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교회건축 작정헌금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모두가 선지자가 되게 하라.

이처럼 성경의 앞뒤를 잘 살펴보면 이런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그럼 모든 이가 성경을 쉽게 볼 수 있는 오늘날에는 고르반 같은 현상이 없어져야 한다. 그러나 너무나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여전히 고르반은 21세기 대명천지에, 그것도 복음주의 정통 교회 안에도 만연하고 있다.

제일 간단한 예를 들자면, 신자가 어쩌다 급한 일이 생겨서 교회의 모임에 한두 번 빠지면 당장 믿음이 적거나 없는 것으로 매도한다. 어쩌면 그 급한 일이 부모가 중병에 걸렸는데 치료비가 없어 구하러 다니는 일일 수도 있다. 또 본인으로선 교회에 얘기해봤자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을 미리 알았다. 또 기도하고 가만히 기다리면 하나님이 낫게 해주실 텐데 주일을 빠지니까 병이 더 도졌다고 뒤에서 수군거릴 것도 빤하기에 구체적인 사정을 아예 꺼내지도 못했을 수 있다.

광야를 방황하던 중에 모세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예언을 하게 된다. 그 모임에 참여하지 않고 장막에 남아 있던 엘닷과 미닷에게도 그 신이 임하고 예언을 했다. 모세의 시종 여호수아는 모임에 불참한 그들의 예언을 금하게 하자고 모세에게 간했다. 그러자 모세는 먼저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민11:26a)라고 반문했다. 너가 나의 지도자로서의 영향력이 떨어질 것을 염려해주는 것은 잘 알겠고 또 감사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어서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6절b)고 했다.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모였던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된다는 것이다. 종교적 형식과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신자가 서있는 바로 그 장소에서, 교회가 아닌 학교나 가정이나 직장이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서있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그 두 사람이 미처 모임의 소식을 못 들었거나, 독감에 걸려 아파 누워있을 수도 있지 않는가?
    
미국이 헌법을 제정할 때에 남녀 간이 아닌 결혼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단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살기로 서약하는 것으로 정의를 내렸다. 지금에 와선 남자와 여자라는 명시적 표현이 없기에 동성결혼을 금지하는 것은 헌법 위반이라고 들고 일어났고 점차 그런 주장이 먹히고 있는 실정이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처음에 고르반 규정을 제정할 때에도 하나님께 서약한 것을 지키는 자라면 당연히 부모도 공경할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 둘을 함께 연결해서 고려할 필요는 아예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사람들이 고르반 했으니 부모를 공경하지 않겠다고 덤비니 유대 랍비들로선 아무래도 하나님이 우선이므로 그 명분에 반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새로운 규정을 정하지도 못하고 야단 칠 수도 없었지 않겠는가? 추악하고 치사하게 타락한 인간들의 본성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모른다. 거기다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어쨌든 일부라도 예물과 헌금이 성전에 드려지니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을 것 아닌가?

동성결혼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경우에서 보듯이 작금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 세상이 온갖 논리적 궤변으로 성경의 절대적 진리를 반발 비방하고 있다. 인권, 자유, 평등, 사랑, 평화 등의 온갖 그럴싸한 핑계를 앞세우지만 사실은 반성경적인 비진리일 뿐이다. 그럼에도 일부  기독교인들마저 그런 주장의 허점들을 반박하기는커녕 기독교 진리에 대한 변변한 변증도 하지 못한다. 심지어 그에 동조하는 일부 지도자들마저 나오고 성경진리를 포기, 수정하지 않는 자들을 도리어 근본주의자라고 매도한다.  

너무나 정미한 성경의 기록

그런데 마5:23의 예수님 말씀처럼 형제와 화해도 하고 예물도 바칠 수 있으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선 둘 중 하나를 꼭 택해야만 할 때가 있는데 어느 쪽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를테면 주일날 외식, 쇼핑, 영화구경 같은 간단한 일을 하게 되어도 괜히 죄책감이 생기지 않는가?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에 대한 더 구체적인 답을 얻을 수 있다. 성경이 얼마나 정밀한지 소름이 끼칠 정도다.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는 말씀으로 그 권능과 은혜가 너무나 크고 깊다. 산헤드린의 조사단이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난 직후에 파견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요컨대 많게는 2만 여명의 사람들이 들판에서 손 씻고 밥 먹을 여유가 없었을 것 아닌가 말이다.

그 놀라운 기적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유대 지도자들의 첫 반응이 눈에 선하다. 기적의 구체적 경과와 결과는 안중에도 없고 “아니 손도 씻지 않고 밥 먹었어다는 말이야!”라고 했을 것 아닌가? 마치 아들이 일등 성적표를 받아 쥐고 안방으로 바로 뛰어 들어가 그 사실을 알렸더니, 아버지가 “아니 학교 갔다 왔으면 다녀왔다고 인사하고 손부터 씻어야지!”라고 야단치는 꼴이다. 솔직히 이런 너무나 어리석고 우스꽝스런 일들이 교회와 교인들 사이에 많이 일어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오병이어 기적은 모든 이들이 떡을 떼자 새로운 완전한 떡으로 바뀌는 하나님의 놀랍고도 풍성한 은혜의 잔치였다. 그 큰 사랑을 서로 함께 나누느라 모두가 신나고 즐거웠다. 인간 세상의 관습 규정 종교가 개입할 여지라곤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 잠시나마 미움과 시기와 다툼은 실종되고 온전히 하나가 되는, 말하자면 천국의 영광을 미리 맛보았던 공동체적 체험이다. 떡을 떼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유대교 규정에는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크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만 넘쳤다. 또 이런 이적을 일으키는 예수의 정체성이 궁금했으며, 나아가 그분의 신적 권위 앞에 경외감이 저절로 생겼을 것이다.    

물론 성경에 기록이 없으니 손 씻을 개울이 옆에 흘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더 중요한 기록이 이어진다. 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본문(마14:34-36)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주위에 통지하여 병든 자를 데리고 나왔다. 다윗의 후손이요, 모세 같은 선지자 메시아가 왔다고 선포하면서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을 주님 앞으로 불러 모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이라도 대길 간구했고 그러는 자마다 나음을 얻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받기에 갈급해 하는 자를 하나님은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다. 풍성하고도 완전하게 베풀어 주신다. 질병과 고난과 사탄의 멍에 아래 신음하던 인간을 구원하시러 주님은 오셨던 것이다.  

성경은 원래 장절의 구분이 없었다. 원문에는 14장과 15장으로 나뉘지 않는다. 저자 마태가 의도적으로 두 종류의 “손”을 대조하고 있다. 먼저 유대 대중들은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질병과 환난과 가난과 영적 혼돈 속에 너무나 고달픈지라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받아 누리기만 갈급하게 바라고 있었다. 반면에 그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분의 말씀을 가르치고 양육해야 할 지도자들은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2절)라는 타령만 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기들 영향력을 잃을까 염려한 것이다. 장로의 유전이 기록으로 보존된 것은 2세기경에 유다 프린스라는 랍비가 최초였고, 8세기에 가서야 완전히 집대성되었는데 바로 탈무드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아직은 구전으로 전해졌다. 장로들만 그 복잡한 규정들을 알고 있었기에 일반인은  매번 랍비들에게 율법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물으러 올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그 규정이 무용지물이 되면 자기들 밥그릇이 떨어지는 셈이다.

오늘날 목회자들도 아주 유감스럽지만 교회라는 종교 조직체를 우선하고 담임목사의 권세를 최대한 늘이려는 의도로 올바르게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다. 예수님보다 목사에게 순종하는 교회 일군들만 양성하려 한다. 또 그런 일에 하나님과 기독교 교리가 동원, 아니 오용된다. 정작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진리는 가르쳐지지 않는다. 신자들은 예수님을 알고 싶고 만나고 싶고 그분 옷 가에라도 손을 대고 싶은데 그 일을 오히려 목사가 막고 있는 것이다. 성령이 모든 신자에게 임해서 목사보다 더 성경을 깊이 아는 선지자로 만드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런 것들이 모두 고르반 현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 식의 믿음은 입술로만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인데 예수님은 헛되다고 지적했다.(9절) 조금 잘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예 그런 경배를 전혀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가르침을 하는 목사나 교회 안에 하나님은 함께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려면?

예수님은 유대 대공회에서 파견된 이단 조사단원들에게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그 마음은 멀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그 잘못을 지적했다. 입술은 종교적 형식이다. 마음은 단순히 순수하고 진실 되게 믿는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 위에 예수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고자 하는 갈급한 심령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성경의 계명대로 살고자 할 때에 최우선적으로 그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가까이 가라는 것이다.

종교적 형식을 무시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교회 모임에 함부로 불참해도 된다는 법은 절대 없다. 형식이 없으면 내용을 담을 수 없다. 그럼에도 아무리 그 형식이 경건하고 신령해보여도 내용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진리가 드러나지 않으면 헛된 것 즉,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다.

마음이 그분께 가까워야 한다는 것은 그분의 마음을 우리 마음으로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 아닌가? 그래야 그분께 마음이 가까워가는 것이다. 그분의 마음에 내 마음을 맞추고 그 맞춰진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 마음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 모든 죄와 고통과 수치를 감당하고 죽으신 십자가에 다 드러내셨지 않는가? 죄인을 구원하시어 참 생명을 주시되 풍성하게 주신 마음이다. 목자 없는 양 같은 우리에게 영원한 목자 예수님과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붙여 주셨다. 하늘의 모든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것으로 우리에게 채워주신다. 그 채워주심을 방해하는 힘이나 존재라곤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신자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의 구분이 애매한 경우에 무엇보다 십자가 사랑을 생각해야 한다. 포도나무이신 그분께 가지로 붙어 있으면 그분 은혜 안에서 무슨 일을 해도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 요컨대 하나님은 당신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더 베푸시지 우리가 하나님에게 많이 바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윗은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켰다”(시69:9)고 고백했다. 블레셋에 빼앗긴 언약궤도 되찾아서 옮기고 또 평생 성전 건축을 위해서 준비했는데도 수포로 돌아갔으니 한탄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런 거절 가운데 큰 영적 깨달음이 있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그의 성전 건축을 거부한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회중을 한 시도 떠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너희가 나를 위한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백성들의 집을 지어준다고 말했다.(삼하7:1-17) 그래서 여호와 당신께서 이스라엘 사방의 대적을 다 물리친 이후 즉, 솔로몬의 평화 시대에 성전을 짓게 한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 종교적 열성은 물론 영적 시기심이 절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서선 안 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성경적일까 너무 윤리적 종교적, 기독교 교리적으로 따지지 않아도 된다. 먼저 진심으로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길 원하는지 살펴보라.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받고자 진정으로 소원하는가 말이다.

그런 갈급한 심정이 든다면 이미 하나님 가까이 온 것이며 또 그런 마음으로는 무엇을 해도 된다. 설령 잘못된 결과가 나와도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자 했는데 그분이 야단은커녕 문제도 삼지 않을 것 아닌가? 또 당신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지 않겠는가?

역으로 말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성을 앞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그 말은 바로 하나님보다 내가 먼저 나서는 것이다. 또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눈치를 보며 내 영향력을 키우려는 의도다. 그런 동기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이며 아무 은혜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2/17/2013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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