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에게 상처를 받아 너무 힘듭니다.
[질문]
“무조건 목사에게 순종해야 하는가?” 등의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최근 목회자들의 잘못에 상처를 받은 친구의 가정이 교회를 등지고 나갔으며 신앙마저 포기하려는 모습을 보자니 너무 마음이 괴롭습니다. 저 또한 목사님이 어떤 설교를 해도 거짓말쟁이로밖에 안 보일 것 같아 두렵습니다. 주님께 헌신하고자 불과 한 달 전에 겨우겨우 결단했는데 왜 갑자기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걸까요? 과연 제가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목사님을 찾아가서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봐야 하는 걸까요? 교회를 떠나야 하는 걸까요? 잘못한 목회자가 최소한 그 친구와 가족에게 미안하단 말은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겁니다. 교회를 옮기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하지만 상처받고 다시는 교회 안 간다고 다짐하는 그분들의 마음은 누가 치유해줍니까? 제가 대신 무릎 꿇고 빈다고 해결되면 그리 하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첫째 나도 모든 것을 덮고 상처 받은 가정과 목사님들을 위해서 기도만 한다. 둘째 내가 스스로 가해자와 피해자들을 만나보면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다. 이 경우 오해가 풀리면 저는 마음이 어느 정도 편해질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이렇게 조사하는 것처럼 하면 또 네가 먼데 그렇게 조사하고 다니느냐고 할 것 같아서 두렵습니다.
주님 하시는 일 믿으며 기다리는 게 최선인 것 같다는 마음은 듭니다. 아무리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목사님들도 실수는 할 수 있지만 그 실수마저 주님의 계획하심 아래 있는 거겠지요. 그 주님을 믿습니다. 목사님의 의견은 어떠신가요?
[답변]
본인이 직접 당한 일이 아님에도 친구와 그 가정을 위해서 염려하고 기도해주신다니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떠나버린 사람들이야 어찌 되었던 해당 목회자를 보지 않게 되었지만 질문자께선 매주 설교나 가르침을 받아야 하니 더 괴로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목사들도 실수할 수 있고 그 실수마저 주님의 계획하심 아래 있다고 믿고 주님의 간섭을 바라며 기도하시겠다니 더더욱 감사합니다.
만약 진정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그것이 바로 최선의 해결책입니다. 현실적으로 채택이 가능한 여러 방안 중에 최선을 골랐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간섭하셔서 바로 잡아 달라고 온전히 맡기고 기다리기로 했다면 주님의 해결책이야말로 합력하여 선으로 이끌어서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또 질문자께서도 이 문제로 더 이상 노심초사하지 않고 목사의 가르침과 설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단했다는 뜻도 내포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계획인가? 목회자의 잘못인가?
답변을 드리기 전에 “목회자들의 실수마저 주님의 계획하심 아래 있다”고 여기는 생각에 관해 조금 집고 넘어갈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목회자가 잘못하거나 실수하는 것을 하나님이 미리 계획까지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리 아시고 묵인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실수와 잘못을 하나님은 오히려 당신의 온전한 뜻을 실현하는 도구나 경로로 사용하십니다. 무엇보다 반드시 당신의 영광을 당신의 방식과 때에 드러내십니다. 그와 동시에 인간을 고치거나 벌할 것이 있다면, 그 반대로 정말 억울하게 당한 자 있다면 공정하고 세밀하게 바로 잡고 신원해 주십니다.
바로 그런 맥락에선 즉, 광대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와 주권 안에서 모든 인생사가 이뤄지므로 그분이 계획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만든 형들의 잘못이나, 하나님을 먼저 알게 된 이스라엘의 구원이 오히려 늦어지는 것 등을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요셉 형들이나 이스라엘은 당시로선 그분의 광대하고 완벽한 계획을 전혀 의식도 못한 채 스스로 의도적으로 능동적으로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잘못을 범한 목회자들은 그 원인과 책임이 전적으로 자기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회중들을 이끄는 영적 지도자로서 공적인 지위에 있기에 반드시 교회 앞에서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나아가 그에 합당한 교회의 권면 내지 처분을 달게 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한 번의 실수나 허물이라고 해도, 또 그 잘못을 범하기 전까지 당신의 영향력으로 교회를 잘 이끌어서 크게 부흥시켰다고 해도 그래야 합니다. 목회자와 하나님의 관계가 바로 서야 앞으로의 사역에 지장을 받지 않습니다. 그 일로 상처 받은 양 떼의 마음도 반드시 치유 회복시켜야 합니다. 목회가 교회를 키우는 일이 아니라 양들인 교인을 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목사(pastor)와 목회(pasturing)라는 용어의 뜻이 바로 그러합니다.
요컨대 이런 문제의 가장 첫째이자 올바른 해결책은 잘못을 범한 목회자의 진솔한 공적 회개와 그에 따른 개선조치가 가시적으로 동반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하는 목회자가 거의 없습니다. 결국은 성도들만 상처 받습니다. 그렇다고 함부로 교회를 옮길 수도 없고 남아 있자니 은혜가 안 되는 악순환을 앓고 있습니다.
물론 목사도 여전히 죄의 권세를 온전히 극복하지 못한 연약한 인간인지라 실수, 허물,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또 자신들이 섬겨왔던 목사가 비록 잘못을 범했어도 정말로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얼마든지 포용하고 그 직분을 계속 감당하도록 용인할 것입니다. 신자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결점의 완전한 목사보다, 결점이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겸손한 목사일 것입니다.
교회는 지체들의 연합체
목회자들이 자신의 분명한 잘못이 드러났음에도 회개치 않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한국인 특유의 체면 의식은 물론 목사 직분에 대한 일종의 특권 의식도 작용할 것입니다. 또 목사가 자신의 결점, 허물, 잘못을 드러내면 영적 권위가 손상되고 앞으로의 목회 사역에 도움이 안 된다는 잘못된 인식도 있을 것입니다. 교인들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목회자를 오히려 더 존경하며 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 4:11)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전12:27,28)
교회 안의 여러 직분자들은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그들 사이에 권위, 능력, 계급, 신분, 특권 등의 차등(差等)이나 우열(優劣)은 없습니다. 성경을 기록하고 교회를 세운 사도들은 교회사적으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그 이후로는 사도가 나올 수 없지만, 천국에선 일반신자와 동일한 성도입니다. 현재의 교회 직분자들은 더더욱 모두가 동일한 지체일 뿐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그들을 인체(人體)의 여러 기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기관들은 서로 맡은 기능과 역할만 다를 뿐입니다. 또 모두가 필수적입니다. 단 하나라도 없거나 기능을 상실하면 불구자가 됩니다. 그 모두가 함께 연합하여 종합적인 능력을 나타날 때에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됩니다. 교회 지체들의 관계도 그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목사(엡4:11)라는 단어는 지금의 직분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졌습니다. 단순히 교인들을 돌보는 자였습니다. 교사(엡4:11, 고전12:27), 감독(딤전3:2, 딛1:7), 장로(딛1:5) 등이 현재의 목사직과 더 가깝습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는 지역별로 개별교회가 태동하는 단계로서 조직과 행정체계가 완비되지 않았습니다. 또 사도라는 절대적 권위를 가진 자들이 직접 교회를 세워 설교하고 가르치며 치리했기에 당장에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에 기록된 직분을 오늘날의 교회체계에 문자적 직접적으로 연결해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이 말하는 첫째 원리는 교회의 모든 지체가 하나님과 회중 앞에서 갖는 신분은 동일한 반면에 그 맡은 역할만 다르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수직적 위계질서의 조직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연합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담임목사가 무소불위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현재의 한국 교회실상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목사도 치리 받아야 한다.
초대 교회에서도 교회 내 여러 직책들을 전체적으로 조화 협력 통일시킬 위임된 대표 지도자는 필요했습니다. 목회서신서가 말하는 장로와 감독의 자격을 갖춘 자로서 교인들로부터 존경 받는 인품과 삶을 가졌고 영성이 뛰어나며 성경을 잘 풀어 가르치는 지혜가 필수적이었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5:17) 성경도 교회라는 조직체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현재와 같은 목사직을 인정했고 또 특별한 위치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 분명한 규정이 없는 데도 교회 조직체의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만 목사직이 생겼다고 해석하는 것은 즉, 목사직분의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주장은 너무 지나친 해석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동일한 지체들의 연합체이긴 해도 대표해서 이끌 지도자가 있어야 하며 그는 반드시 말씀을 가르치는 자여야 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목사 직분이 비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적이지 못한 목사가 문제인 것입니다.
문제는 성경을 목사가 주도적으로 가르치다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갖는 권위로 인해서 그 가르침 외에 필연적으로 목사의 개인적 요소에도 불필요한(?) 권위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하나님과 말씀과 기도로 깊이 교제하는 목사이므로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의 권위를 인정해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목사에게 교회 안의 권력이 집중되어 갔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일부 교파에선 사제(목사)들의 교회를 치리하는 권한은 하나님께 직접 받은 것이므로 회중은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교리까지 등장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파할 자로 동일한 부름을 받았습니다. 목사만이 성경해석과 설교는 물론 인사 행정 재정 집행까지 독점적으로 전횡해도 된다고는 성경 어디에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담임 목사도 잘못을 범하면 한 사람의 동등한 교회 지체로서 교회 회중의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18:15-17)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말씀입니다. 당시 사도들은 오늘날 목사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았기에 이 말씀은 오직 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선 목사는 징계 받을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는, 최소한 지으면 안 된다고 전제한 것입니다. 아니면 목사도 응당 동일한 형제의 일원으로 간주하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교회의 지도층인 장로나 감독이 아니라 ‘교회’에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교회는 당연히 교인들의 모임(congregation)을 뜻합니다.
물론 목사에 대한 치리는 아주 신중을 기할 필요는 있습니다. 목사의 잘못 뿐 아니라 그 치리 과정이 전 회중에게 미치는 부정적 파급 효과는 교인의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더 관용적이어야 할 필요는 절대 없습니다. 부작용이 더 크기 때문에 오히려 그 판정, 징계, 치리 절차가 더더욱 공정하고 엄격해야 합니다. 엄밀히 말해 잘못에 대한 심사 판단하는 잣대는 동일하되 벌칙은 더 중하게 주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관련규정이 세밀하게 전회중의 동의와 교회의 적법한 절차에 따라 사전에 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는 그런 규정이 없고, 있어도 애매모호하게 형식적으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또 실제 문제가 발생해도 그 규정대로 엄밀하게 적용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지경이 되어서야....
목회자의 독선적 일방적 절대적 전횡(專橫)이 발생하거나, 발생해도 제대로 개선되지 않는 현실적 구체적 원인은 교회가 규정대로 운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목회자를 너무 신령하게 바라보려는 종교적 열성이 앞서 교회 운영을 완전히 목사의 자유재량에 맡겨버렸습니다. 교회는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만 운영해야 한다고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뜻에 대한 성경적 의미도 모르고선 실천적인 세부 규정이나 장치를 마련하면 아주 큰 세속적 잘못을 범하는 것처럼 여깁니다. “머리되는 예수님의 은혜에 따라”는 “목사 임의대로”라는 뜻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교회가 “적법한 절차대로 운영”되는 것을 두고 “세상의 타락된 관습에 물들었다”고 매도되고 있습니다.
질문자께서 당한 문제의 발단은 교회직원의 채용과 해고가 순전히 목사의 개인적 결정에 따라, 그것도 감정적 순간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엄연히 하나의 사회 조직체로서 법과 규정에 따라 운영되어야만 합니다. 목회자에게 과도하게 권력(?) 혹은 결정권이 위임되어선 안 됩니다. 아무래도 목사에게 권한을 많이 위임할 수밖에 없다 해도 그 위임된 권한을 감시 통제하는 조치가 반드시 마련 시행되어야 합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모든 교회들이 민주적이고도 성경의 가르침에 조화되는 교회헌법은 물론 그 구체적 시행규칙을 갖추어서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예배, 기도모임, 구역활동, 성경공부, 전도 같은 영적 행사에 관한 것까지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청빙과 재임용과 징계와 해임, 교회 예산 결산의 집행, 제직의 임명과 각 부서의 운영, 각종 회의의 순서와 관리 등등의 행정적 절차는 아주 정밀하게 마련되어져 있어야만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과부의 공궤)을 저희에게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고.”(행6:3,4) 초대 교회에서 과부를 돌보는 일로 헬라파와 유대파 교인들 사이에 다툼이 일자 집사를 선출했습니다.
흔히들 이 구절을 두고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은 고급하고 신령한 일이고 공궤(供饋)는 그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현실적 일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또 그 필연적 결과로 목회자가 집사보다 교회에서의 위치, 신분, 권세 등이 훨씬 높다고 여깁니다. 아닙니다. 기도, 말씀, 공궤 모두 교회가 힘을 쏟아야 할 동격의 직무입니다.
본문은 일차적으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을 서로 분담했다는 뜻입니다. 경영학적으로 말해서 누가 어떤 구체적인 업무를 담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job description)을 마련한 후에 그에 합당한(job qualification) 인재를 선출하여 시행했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가 태동할 당시부터 즉, 개별지방교회의 조직체가 생기기도 전에 직분자들의 업무의 책임과 한계를 정확히 구분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고전9:11,12)
바울은 사도가 교인들의 헌금으로 생활하는 것이 성경에도 규정된 정당한 일이지만 혹시라도 복음 전파에 장애가 있을까 염려하여 장막을 만들어 팔면서 자비량으로 선교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 목사처럼 교인들의 땀과 피로 바친 헌금을 자기 주머니 용돈처럼 제멋대로 쓰도 된다고 성경 어디에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선진국의 목회자들은 정부에 세금도 바칩니다. 한국교회의 비성경적 부조리를 열거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켜야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에 물들다 못해 세상이 거꾸로 염려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한국교회가 담임목사는 왕이며 부교역자들은 그에게 목숨 바쳐 충성하는 신하이며 교인은 왕에게 복종하는 백성처럼 되었습니다. 이는 너무나 큰 잘못입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로마 가톨릭교회와 방불할 정도입니다. 시급히 대대적으로 개혁을 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목회자를 필두로 하나님의 큰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교회 개혁이 너무나 더디기에...
다행히도 최근 그 실천이 더디기는 해도 한국교회에서 다각적인 개혁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 그 초점을 목회자의 전횡을 막고 재정운영을 건전화 투명화하며 교회 운영의 최종적 권한을 회중에게 돌리는 쪽으로 두고 있기에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가장 먼저 개혁해야 할 대상인 목사가 여전히 실권을 잡고서 버티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규정, 제도, 관습을 바꾸려면 먼저 현 체제하의 기득권자가 기존의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만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왕정제도를 민주제도로 바꾸자는데 왕과 왕족이 반대하지 않을 리 없는 꼴입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개혁이 결실을 맺기에는 많은 시간과 희생이 따를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그러는 사이에 신자들은 계속해서 상처와 고뇌를 안고서 교회생활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로 질문자의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럴 때에 과연 신자로서 어떻게 해야만 최선인가는 한마디로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 까닭은 어떤 대책도 완전하고 최선이 아니며 인간이 고안한 여러 대체 방안 중에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대체 방안이라는 말 자체부터 자신이 처한 상황에 비추어서 자기 판단 하에 차선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질문자께서 하나님이 바로 잡아주시리라 믿고 기도하겠다고 결정했으면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나아가 진정으로 교회와 교인과 그 목사를 염려하면서 하나님의 때와 방식에 전적으로 의존하겠다는 뜻이므로, 한마디로 하나님의 해결책이므로 최선의 해결책입니다.
반대로 영적으로 발전은커녕 당장에 은혜가 안 되고 도리어 후퇴만 된다면 조용히 교회를 떠나서 다른 적합한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교회를 떠나도 되는 이유들은 기존의 글에서 이미 밝혔습니다. 물론 기도만 한다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목사가 당장에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더디기만 하여서 마치 목사의 잘못은 아주 너그럽게 취급해주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입니다.
만약에 목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고 나름대로 개선의 노력을 스스로 실현하고 있다면 비록 공개적 사과는 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어느 정도 관용하고 기다려 주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식으로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그 때와 방식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조속히, 화끈하게(?)가 아니라서 탈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기대보다 늦게 징계하신다는 것은 그전에 신자들 스스로 무엇이 잘못인지 제대로 인식하여서 교인들이 책임지고 교회를 개혁하길 바라며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목회자들의 자발적인 개혁이 더디다면 평신도(이런 용어도 성경에 없지만 편의상 사용함)들이 먼저 개혁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왕정을 뒤엎는 식의 과격하고 폭력적인 혁명을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방법과 절차에서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그 길은 둘 뿐입니다. 교회 외부적으로 연합하여 적극적 능동적 개혁 운동에 동참하거나, 교회 내부에서 기존의 규정과 제도 안에서 서서히 하나씩 개혁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평신도들의 교회를 세우는 것도 한 가지 방안인데 이미 그렇게 실행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없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들의 취지에 찬동하는 개혁적 성경적인 목사를 물색해서 기존과 전혀 다른 체제의 교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찾기 너무 힘들면 그런 개혁의지를 가진 자가 신학공부를 하여서 직접 ‘개혁적인’, 사실은 ‘성경적인’이 더 정확한 용어임, 교회를 개척해야 합니다.
문제가 된 교회를 조용히 떠나 다른 교회를 찾는 것도 한 가지 방안이 될 것입니다. 목사에게 교인이 떠나는 것만큼 큰 징계는 없기 때문입니다. 숫자는 적어도 성경적으로 교회를 치리하려고 노력하는 이름 없는 목사와 교회도 반드시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교인들 스스로 하나님이 남겨두신 선한 목자들과 힘을 합해 교회 개혁의 열매를 하나씩 구체적으로 맺어나감으로써 기존의 교회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교인들을 각성 계도하여야 합니다. 그들도 자체적으로 개혁하게 하거나, 그것이 힘들면 그 새로운 교회로 이끌어야 합니다. 이런 경우는 비난 받을 부정적 의미의 수평 이동이 아니라, 종교개혁 시에 로마교회에서 개신교로 옮기는 것처럼 긍정적 성경적 이동에, 거의 개종, 해당됩니다.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
그런데 한국교인들은 유교적 교육과 가부장적 문화가 너무 몸에 배여서 담임 목회자의 의견과 상충되는 교회개혁에 거의 자동반사적인 거부 반응을 보입니다. 심하게는 하나님, 아니면 아버지를 대신 하는 것 같은 목사에게 거역하는 것은 아주 큰 죄처럼, 최소한 예의가 아닌 것처럼 여깁니다.
목사를 존경하는 것과 맹종하는 것은 구분해야 합니다. 신자가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과 그분의 살아있는 말씀인 성경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행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현재 교회와 목사가 명확히 반성경적으로 가고 있다면 그것만이 죄가 아니라, 그것을 묵과하고 침묵하는 것도 분명 죄입니다. 교회와 목사라는 특수한 영적성격 때문에 개혁절차에 신중은 기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이런 문제가 생길 때마다 주위에서 듣는 대표적인 두 가지 권면이 있습니다. 먼저 모든 것을 은혜로 덮고 넘어가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은혜로 용서했고 목사도 한 연약한 인간이므로, 그의 죄도 교인들이 예수님처럼 은혜로 용서해주자는 것입니다. 마치 성경적으로 상당히 그럴싸한 말씀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죄를 용서했다는 것은 구원을 베풀기 위한 목적입니다. 처음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거듭 날 때에는 모든 죄를 용서 받습니다. 신자가 된 후에 짓는 죄도 그 죄의 영원한 형벌인 심판에선 면제됩니다. 그러나 믿은 후로부턴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를 입술로 하나님께 고백하고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언젠가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습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8)
목사는 이미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목사도 목사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의 성도이기에 반드시 회개하고 고쳐나가야 합니다. 목사로서 지은 죄를 단순히 은혜로 덮어두고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언제 어떻게 징계를 주느냐는 것은, 혹은 그를 어떻게 변화시켜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그러나 교인을 가르쳐야 할 입장이기에 더더욱 스스로는 물론 교회 앞에서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질문자님처럼 회중들도 목사가 그렇게 되기를 권면하고 기도하면서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목사의 잘못을 무조건 덮어두고 넘어가는 것은 결코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 받은 은혜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십자가에 죽는 엄청난 형벌을 대가로 바쳐졌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목사가 교회 앞에 회개하는 것과, 혹은 그 반대로 끝까지 회개치 않아 교회가 목사를 치리할 때의 절차는 아주 신중하고도 은혜롭게 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끝까지 교회의 권면을 거부, 무시할 때는 교회는 이미 정해진 규정에 따라 엄중히 처리해야 합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세밀하고도 엄격한 교회자체의 규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교회생활을 지속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너무나 비현실적이고도 불합리한, 심지어 비성경적인 충고입니다. 우선 교회 가면 매번 어떤 형태로든 접촉해야만 하기에 보지 말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육안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괘념치 말라는 뜻이긴 하지만, 영적으로 도무지 은혜가 안 되는데 어떻게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은 자신의 영성을 풍성하게 하라는 뜻인데 바로 그 일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목사와 교인의 관계가 단순히 설교만 듣고 마는 것 같으면 설교 시에 눈을 감거나 CD로 대체하면 됩니다. 교인은 섬기는 교회의 목사와 반드시 인격적 개인적 관계를 맺고서 사랑으로 상호 섬겨야 합니다. 이전의 회개치 않는 잘못이 그 관계가 아름답게 진전되는데 가로 막고 있다면 올바른 신앙생활을 이어나갈 수 없습니다. 이미 서로의 마음속에 생채기가 남아있기에 어떤 형태로든 끈질기게 영적성장의 발목을 잡습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당신과의 관계가 바로 서는 것입니다. 목사로 인해 하나님마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먼저 볼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사람을 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잘 보이면 다행이련만 하나님을 보는데 계속 훼방이 되는데도 사람을 참고 넘기라는 것은 자칫 둘 다 실패하게 만듭니다. 교회 활동에 아무런 흥미와 관심이 없어지며 그야말로 주일 예배에 형식적 의무적으로만 참가하는 덥지도 차지도 않은 신자가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뜻을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신자 자신의 영적 유익을 가장 우선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교회 전체를 생각해야 하며 그래야만 교회도 영적으로 건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지금 거꾸로 행하고 있습니다. 교회 전체를 위해서 자기 혼자 괴롭더라도 참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려면 정말로 그 목사의 지난 허물을 진심으로 다 용서하고 이전보다 더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고 마음의 쓴 뿌리를 머금은 채 그러는 것은 스스로는 물론 하나님 앞에서도 위선이며 그분이 바라시는 바도 아닙니다.
목사가 아닌 교인 중심으로 개혁하라.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앞에서 밝힌 대로 예수님이 이미 제시했습니다. 목사의 잘못이 분명하다면 교인들이 교회 내의 지도부에 정확한 증거와 함께 일단 은밀하게 문제제기를 하셔야 합니다. 그 전에 이런 식의 문제 제기와 그 처리의 과정은 물론, 그것을 받아들이는 교회 전체 분위기가 공개적, 민주적, 호의적, 긍정적,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현재 같은 분위기에선 문제 제기한 사람만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질타만 받고 왕따가 됩니다. 관건은 목사부터 자기 잘못을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고쳐나갈 용기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인들도 정확한 성경적 지식을 갖고서 예수님 말씀대로 치리, 이해, 용서, 인내,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교회의 개혁절차를 당장 시행하기 이전에 철저한 교육과 목사와 개혁에 관한 상호 의견일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교회 지도부까지 목사를 감사고 돈다면 다음 조치를 적극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취할지는 교인 본인이 정하시면 됩니다. 문제가 있는데도 덮어만 두고 가면 안 됩니다. 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해 가는 과정 중에 서로 깎이고 성숙해져야 합니다. 또 세상 법정까지 가거나, 분쟁이 상호 증오, 파당, 분열로 가선 안 되지만 그저 문제를 덮어두기만 하는 것은 더 나쁜 것입니다.
교회의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고린도전서의 원리대로 따르면 됩니다. 전적으로 교회와 성도를 향한 사랑에만 근거하여 권면, 판단, 치리하면 됩니다. 구체적으로 시행하는 데는 여러 어려움이 따르긴 하겠지만 목사가 성경대로 따르지 않으면 신자라도 그렇게 따라야 합니다. 목사가 개혁하지 않으면 신자라도 개혁을 해야 합니다. 더 이상 미룰 문제가 아닙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라도 교회마다 엄격한 규정을 마련해야 하고 교인들 모두가 그 규정을 숙지하고 그에 따라 치리해야 합니다.
모든 교회 개혁과 시행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은 자신과 교인들의 영적 유익입니다. 잘못을 범한 목사 중심으로 상황을 감안하면 안 됩니다. 잘못을 범했음에도 무조건 목사를 품고서 영적 유익을 얻고자 하는 것은 순서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 목사 자신은 물론 향후 교회 사역에도 큰 영적 해악이 되는데도 문제를 마냥 안고 있는 목사에게서 어떻게 영적 유익을 얻으려 기대할 수 있습니까? 자꾸만 곪다가 나중에 터지기만 합니다. 더 큰 병으로 악화되기 전에 환부는 수술하여 완치해야 합니다.
요컨대 목사가 회개치 않는데 품고 가려는 것이나, 적극적으로 찾아가 문제 제기하며 회개를 촉구하거나, 조용히 하나님이 회개시켜 주도록 기도만 하면서 기다리는 것이나, 도무지 은혜가 안 되어 교회를 떠나는 것이나, 어떤 대책이 되었던 절대적으로 자신과 주변 성도들의 영적 유익만을 위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통해 뼈를 깎는 상처와 갈등을 겪더라도 믿음이 동반 성숙되어지는 연단의 과정으로 알고 성도들끼리라도, 목사는 계속 변함이 없어도, 온전한 사랑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부터 돌봐라.
만약에 상처 받은 가정이 그 후 어떤 교회에도 나가지 않는다면 꼭 전해주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뜻이긴 합니다만, 말하는 순서를 바꾸어야만 합니다. 사람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먼저 그들의 의견 내지 불평에 동의해주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 그러나 잘못된 목사 한 명 때문에 자기 신앙마저 포기한다면 결국은 자기에게 미치는 영적 손실이 가장 크다고 분명하게 지적해주어야 합니다. 교회, 교인, 심지어 조금 잘못된 표현이지만 하나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요체는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인데 남들과 교회야 어찌 되었던 어리석게도 자기만 손해 보는, 그것도 영원한 운명이 좌우되는, 짓을 왜 하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반드시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교회와 목사를, ‘완전한’ 교회나 목사가 아니라, 찾아서 신앙생활을 계속해야 합니다. 이것이 결코 이기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가장 먼저 원하시는 바요, 나아가 가장 영적인 행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의 일대일 개인적 교제 동행보다 앞설 도덕, 종교, 예의, 의리 등은 아무리 경건하고 선해보여도 절대로 없습니다.
이는 또 교회 안에 남아서 소극적 혹은 적극적으로 교회 개혁을 이뤄나갈 교인에게도 해당됩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선한 간섭을 바라며 목사와 교회를 위해서 기도만 하겠다고 결정 시행한다고 해도, 결국은 그것이 자신의 영적 유익과 발전에 기여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기도가 더디게, 아니면 영영 응답이 안 될 것 같아도 그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믿음이 더 성숙해져야만 합니다. 아무 변함없이 그대로 굴러가는 상황에 대해서도 스스로 성경적으로 더 깊숙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기도를 왜 하나님이 안 들어주는지 의심, 불평하다가 오히려 더 큰 상처와 시험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빈대 잡으려다 초가를 태우는 우(愚)를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초가는 교회나 성도들과 목사와의 관계가 아니라 신자 본인과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꾸로 이해하고 적용합니다. 전자를 유지하려고 정작 중요한 후자인 초가를 태웁니다. 순서가 잘못되었으니 교회와 교회 내의 모든 관계가 메마르고 형식적 의무적 종교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해 어쩔 수 없이 주일 예배만 참석하는 교인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까마귀 노는 골에 백로는 가지 않는다고 자신만은 아주 고상한척 치부하면서 말입니다. 일단 참석하는 교회가 문제가 있다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기도만 하든, 정말 진심으로 간절히 하나님께 그 잘못을 바로 잡아달라고 매달려야 합니다.
나아가 말씀을 더욱 깊이 상고하여서 목사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자신의 영성 개발의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후에는 반드시 교회와 다른 이와의 관계를 더 성숙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진전시켜야 합니다. 그러다 자신이 목사가 되어서 따로 교회를 세우게 되더라도 말입니다.
7/13/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