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은 UFO를 보았는가?
“제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 지 오년 그 달 오일이라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겔1:1-3)
외계인을 숭배하는 라엘리안 무브먼트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외계인을 만나 계시를 받았다는 `라엘 `이란 인물이 1971년 만든 단체로 외계인이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창조했고 모세, 예수, 석가모니, 마호메트도 외계인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예언자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에스겔이 이상을 본 기록(1장)도 외계인이 지구에 도래한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하는 자들이 그들의 의견에 동조합니다. 간혹 신자들조차 그 표현이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UFO와 너무 흡사해 당혹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이상”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상을 뜻하는 히브리어 ‘하존’과 헬라어 ‘호라마’는 (영어 번역으로는 vision) 꿈이나 묵시 또는 다른 주관적 자극을 통해 보게 되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말합니다. 요컨대 그는 자기 외부에서 일어난 사건을 인체 육안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주는 환상을 자기 내면이 어떤 방식으로든 감지하여 그 이미지와 의미를 알아챈 것입니다.
무엇보다 에스겔 본인이 그것을 두고 UFO 같은 물체가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이에 내가 보니 그룹들 머리 위 궁창에 남보석 같은 것이 나타나는데 그들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 것 같더라"(겔10:1) 처음 1장에 묘사된 물체가 다시 등장하는데 "그룹들(천사들)"이라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겔10:15,16,20도 참조)
마음속에서 이상을 본다고 해서 인간이 지정의적 노력으로 스스로 추론 내지 상상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환상으로 보여준 것은 분명코 일어난 사건이지만 에스겔이 혼자 꾸며낸 이야기는 절대 아니라는 뜻일 뿐입니다. 만약 인간 외부에서 일어난 객관적 사건이라면 직간접으로 동참한 목격자와 그들의 증언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다메섹 도상의 바울의 회심, 변화 산상에서 예수님의 변모, 요단 강가에서 들린 하늘의 음성, 또 시내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사건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에 성경은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출 19:16)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출34:30)했습니다. 죄에 찌든 인간은 하나님을 보면 다 죽게 되므로 하나님을 만나고 온 모세 얼굴의 광채만 보고도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설령 모든 사람이 못 보고 혼자만 보았다 할지라도 최소한 직접 목격한 그 사람에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는 다른 사람의 증언은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의 경우는 그런 간접적 증언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이상이 “내게” 보이셨다고 합니다. 외계인이 지구에 도래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인간이 외계인의 후손이라는 주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럴 리도 없지만 만에 하나 그렇다 해도 그 외계인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 따지면 또 다시 창조 내지 진화 둘 중에 하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받은 이상은 반드시 그분의 뜻까지 계시 받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특별히 에스겔에게 임했다고 합니다. 에스겔서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 이상을 받을 때마다 전하라는 말씀과 함께 예언이 임했습니다. 예언이라는 히브리어 ‘나바’의 의미도 장래에 일어날 일을 알아맞히는 것보다는 ‘대언하다’ 혹은 ‘대변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대신 말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사단의 예언과 하나님의 예언은 확실히 구별되어집니다. 점쟁이들이 장래 일을 알아맞히는 것은 주로 개인을 대상으로 현실적 형통을, 그것도 아주 일시적인, 위한 목적뿐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문제 말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찾아가는 사람들도 오직 그렇게 되는 방법을 알고자 할뿐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형통을 주는 이가 사단이라도 또 어떤 비열한 방법을 통할지라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주신 예언은 당신의 백성들의 공동체가 당신의 거룩한 통치를 받으며 의롭게 변하는 것에 관한 것뿐입니다. (개인의 문제는 성도 각 자가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아주 비상한 경우가 아니면 따로 예언의 형태를 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현재 죄에 빠져 허랑방탕하게 사는 의롭지 못한 모습을 구체적으로 통렬하게 지적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며 예언의 효력도 항구적 지속적입니다.
사단의 예언은 개인이 그 하수인을 찾아가야만 그것도 돈을 바쳐야만 말해줍니다. 사단으로선 이미 자기의 종으로 삼아 세상 재물만을 목표로 살게끔 만든 자에게 따로 할 말이 없습니다. 괜히 건드려 혹시라도 자기들이 살고 있는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눈치라도 채면 큰일입니다. 나아가 사단 자신이 의로운 것과는 완전 반대편에 있기 때문에 점치러 오는 자더러 의롭게 살라는 말은 아예 입 밖에도 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인간의 필요보다 당신의 뜻에서 주도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선지자에게 일방적으로 임합니다. 또 그 말씀을 받은 자에게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심어줍니다. 그래서 내용에 반드시 전해야만 할 당위성과 시급성이 함께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전하는 자나 받는 자에게는, 만약 그들이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반드시 그 영혼에 찔림이 있어 회개가 일어나며 헌신이 따릅니다.
말하자면 자신들의 죄를 구체적으로 의식하든 못하든 자신이 거룩하지 못하다는 사실만은 영으로 깨닫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 앞에서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느낍니다. 금송아지 앞에서 마시고 춤추며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온 모세 얼굴의 광채만 보고도 심히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반응이 일어납니다.
지금 모세나 에스겔 같은 신앙의 위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문제에 천재나 위인은 따로 없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전적 주권에 쓰임 받은 종이었을 뿐입니다. 신자 모두는 사실은 당신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라고 부름 받은 종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4:5,6)
예수를 만난 자는 세상과 죄인을 향한 그분의 안타까운 마음이 자기 마음에 전해지고 또 얼굴에 그분의 광채가 나야 합니다. 신자를 보는 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자기들 죄에 대한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신자가 속한 어떤 공동체라도 하나님께 받은 예언이 항상 살아 있어서 의롭게 변화되어져 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신자가 거꾸로 자신의 형통, 그것도 이 땅에서의 일시적 풍요만 소원하여 그 수단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지는 않는가요? 요컨대 세상이 당신을 보고 두려워합니까? 반대로 당신이 세상을 보고 두려워합니까?
6/25/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