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소멸되고 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훌러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겔47:1-5)
에스겔 선지자가 성전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와 세계를 덮는 모습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제단 남편 성소에서 발원한 물은 동진하여 아라바 즉 사해까지 흘러갔습니다. 문 아래로 스며나올 정도의 물이 나중에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정도로 큰 강으로 변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강은 발원지가 각기 다른 여러 지류가 합치거나 하늘에서 내린 비가 먼 거리에 걸쳐서 계속 모아져 큰 강을 이룹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소에서 조금 흘러나온 물 말고는 다른 발원지가 없으며 또 비가 중간에 추가되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히 물이 불어날 수 없는데도 갈수록 양이 많아지고 깊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 어디서나 그렇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신자가 잘 믿고 열심히 기도하면 복을 시쳇말로 ‘따따블’로 받겠거니 착각하면 안 됩니다. 흔히들 하나님의 셈본은 우리와 달라 하나를 바치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되돌려 주신다라는 말에 쉽게 현혹(?)되면 안 됩니다.
본문은 우선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 온다는 뜻입니다. 물이 성소에서만 발원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 오지 않는 것은 아무리 종교적 격식을 갖추고 큰 성과를 나타내도 인간의 일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야만 하나님의 일입니다. 너무나 지당한 말을 해야 하는 이유는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 일과 종교적 일을 너무 자주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성소에서 나온 물이 단지 양만 많아졌다면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고 행사를 크게 할수록 좋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그 물은 어디까지나 생명수였습니다.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이 크게 왕성해지는 결과를 나았습니다. 교인이나 교회가 하는 일로 인해 죽어가던 생명이 되 살아나지 않으면 인간끼리 모여 종교적 행사를 한 것뿐입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9절) 심지어 고기가 전혀 살 수 없는 사해에서도 그 물이 소성되었습니다.
생명수는 당연히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질과 양에서 제한 받을 수 없습니다. 그 권능과 은총은 무궁무진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성령이 역사하면 엄청난 역사가 일어납니다. 인간의 산술로는 그 역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선 당신께서 움직이면 항상 그러하기에 너무나 자연스런 일입니다. 참 신자라면 크게 신기해 할 이유가 없습니다.
신자가 오히려 항상 관심을 쏟아야 할 사항은 성령이 역사한 결과가 아닙니다. 성령이 함께 하고 있는지만 제대로 점검하면 됩니다. 성령이 임재 하여 역사하는 곳에는 항상 그 은혜와 열매는 풍성하게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생명수는 동시에 성도를 의미합니다. 성령은 구원 받은 성도에게 내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비상한 경우에 성령이 혼자 따로 역사할 때도 있지만 주로 성도를 통해서 역사합니다. 그럼 성전에서 스며나와 세상을 향해 특별히 생명이 죽어가는 곳으로 흘러가야 하는 것은 실제로는 성도여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전 세계를 새 생명으로 뒤바꿀 수 있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그렇게 변화시킬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자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여 세상이 그것을 보고 자기들도 죄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소원이 생기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당부하신대로 신자는 땅 끝까지 복음을 들고 흩어져야 합니다. 성소에서 멀어진 곳일수록 오히려 더 많은 성도들이 가서 사역해야 합니다. 흑암에 가까운 곳, 죄악으로 물든 곳, 가진 것 없이 소외된 곳에 주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물이 성소에서 원방까지 갈수록 사람이 능히 건널 수 없는 강이 되듯이 성도의 섬김을 통한 성령의 역사가 사람들이 도저히 거역할 수 없도록 강력하게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작금 본문과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 안으로만 흘러넘치도록 모입니다. 세상을 향해선 그 영향력이 점점 줄어듭니다. 정작 성령의 생명수가 절실하게 필요한 어두운 곳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교회 안에서라도 잘 하면 다행이련만 오히려 불평, 불만, 분쟁, 위선, 심지어 세상보다 더한 죄악을 심심찮게 자행합니다. 그러면서도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났다고 합니다. 단지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예수에 관한 영화 벤허에 바로 이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잘 묘사한 장면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직후 폭풍우가 치며 빗물에 예수님의 피가 섞여서 작은 시내를 타고 흘러갑니다. 틀림없이 빌리 와일러 감독은 그 작은 시내가 사람이 능히 건널 수 없는 강으로 불어나 전 세계를 예수님의 피로 뒤엎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작금 기독교는 왕성한데 성령은 소멸되고 있습니다. 교인은 늘지만 생명수의 강은 오히려 말라가고 있습니다. 성령이 교인들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복음으로만 살고 죽으려는 교인이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흘리신 피로만 인간이 의롭게 되고 그분이 주시는 생명수로만 거룩하고 의롭게 살 수 있는데도 그 피와 그 생명수를 외면합니다.
대신에 바쳐서 갑절로 되돌려 받으려는 하나님의 이상한 셈본에만 목을 매달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백 배가 아니라 수억 배도 가능한데도 그 사실을 모릅니다. 아니 알고도 일부러 모른 척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수는 본인도 본인이지만 주위 사람부터 살리는 역사가 먼저 일어난다는 것을 영악한 신자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자기부터, 아니 자기만 먼저 살아야겠다는 욕심과 열정이 믿음으로 둔갑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인간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강력하고 폭발적입니다. 단 예수님의 보혈이 성도를 통해 증거 될 때만 그렇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죽어가든 영혼이 소생합니다. 그러지 않음에도 풍성하게 여겨지는 종교 행위는 전부 인간의, 심지어 사단의 역사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성령에 충만한 신자입니까? 바울처럼 예수 죽인 것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닙니까? 그래서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이 당신에게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7/13/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