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16:59,60 겉과 속이 다른 하나님

조회 수 598 추천 수 44 2009.09.17 02:07:50
겉과 속이 다른 하나님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겔16:59,60)


기독교는 역설(paradox)의 종교입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며, 낮아져야 높아지고, 주어야 받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언뜻 진리와 반대되는 것처럼 들리지만 잘 따져보면 진리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이성에 반하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전혀 상충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아우르면서도 초월한 차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것과 다르며 높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그런 역설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먼저 극도로 타락한 예루살렘에 대해 엄중한 경고의 말씀을 했습니다. 심지어 소돔과 사마리아보다 더 가증스럽게 음란하고 부패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급기야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에게 행한 대로 하나님도 똑 같이 그들에게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하나님에게 어떻게 행했습니까? 언약을 배반했습니다. 그럼 하나님도 언약을 취소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이어서 오히려 그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겠다고 합니다. 당신께서 뱉은 말을 행하지 않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분노를 주체 못해 저주해 놓고선 다시 그 말을 주워 담은 것입니까?    

하나님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인간과는 절대 같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자신됨이 상황과 사람에 따라 변하지 않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것도 영원토록 그렇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상식과 이성의 수준에 맞추어 말한 것입니다.

비유컨대 어린 자녀가 잘못을 저지르면 부모는 “네가 한 번만 더 똑같은 잘못을 범하면 다시는 과자를 사주지 않겠다.”고 야단을 쳐도 실제로 그러는 부모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가 자기 잘못에 대해 가장 실감나게 느끼도록 표현한 것뿐이지. 아빠의 아이를 향한 마음이 변한 것은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아빠는 또 야단으로 치지 않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실천하면 내가 과자를 더 많이 사줄께”라고 아이와 언약을 맺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다시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따져 보니까 구태여 역설이 아닌 것같이 여겨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끼리 맺는 언약과 하나님과 인간이 맺는 언약에는 아주 큰 역설적 차이가 있습니다. 아빠와 아이의 경우는 반드시 아이가 동일한 잘못을 다시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물론 아이가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아빠도 그런 줄 알지만 그래도 아이의 행동에 따라 상벌을 적절하게 조절합니다.

반면에 본문에는 그런 식의 조건은 없고 하나님이 언약을 다시 세우겠다고만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인간은 도무지 동등한 위치, 자격, 신분에서 상호 조건을 내세울만한 사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원토록 인간은 그분 앞에 연약하며 어리석고 무능한 죄인일 뿐이며. 대신에 그분은 인간에게 전지전능하시며 긍휼에 한이 없으신 거룩한 하나님일 뿐입니다. 서로 조건을 걸고 그 이행여부에 따라 상벌을 주고받을 사이가 아예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너의 어렸을 때에” 언약을 세웠다고 말한 까닭입니다. 육신적 나이가 어렸을 때라는 의미는 당연히 아닙니다. 또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을 때라는 해석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아이가 어렸을 때에 부모가 유언장을 기록해 놓는 경우와도 다른 것입니다. 아이가 크면 유언에 규정된 복잡하고 구체적인 법적 용어와 절차를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조건대로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맺은 언약은 세상에 유대인이라고는 아브라함 한 명만 있을 때에는 그 내용조차 잘 모르고 있다가 민족이 창성해져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생기면 잘 알고 제대로 지킬 수 있게 되는 그런 성질이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항상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은 아무리 해도 그 언약을 완전히 알아서 제대로 지킬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특별히 요구하는 조건 없이 언약 안에 일방적 은혜만 베풀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먼저 택하셔서 말입니다. 다른 말로   이스라엘이 언약을 이해하고 지킬 수 있는 믿음도 하나님이 키워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할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그 일방적인 은혜만을 제대로 헤아리는 것뿐입니다.

헤아리라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세밀하게 따져서 숙지하고 실천하라는 차원까지 요구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그런 일방적인 은혜 가운데 있다는 사실 자체를 절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항상 그 은혜 안에만 머물러 있기를 소원하여 다시는 그 은혜에서 벗어나지 않기만 하면 됩니다.  

아이와 아빠의 언약으로 비유하자면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기 보다는 아이가 아빠를 두고 내 아빠가 아니라고 하면서 남의 집의 아빠를 찾아가지만 않아도 과자는 사준다는 것입니다. 인간 아빠는 그만한 은혜를 베풀만한 품성과 능력이 없어 그런 언약을 맺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이스라엘로 언약을 지킬 수 있도록 환경과 사건 가운데 인도하실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요컨대 이방신이나 우상을 숭배하지 않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주위 여건이 아무리 황무하게 변하고 고달픈 일들이 계속 일어나더라도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면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더 풍부히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더 찾게 되는 것이 상식인데 유다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상식대로 하지 않는 이유는 오직 하나, 상식으로선 이룰 수 없는 비상한 목적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그들도 하나님이 자기들을 당신의 의와 거룩으로 이끌고 가시려 한다는 것은 꼭 언약이 아니더라도 상식만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진짜 관심은 그것보다는 오직 이 땅의 물질과 향락에만 쏠려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어떤 민족도 받지 못한, 아니 상상도 못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와 은혜를 넘치도록 받은 이스라엘이 어찌 그리 쉽게 언약을 버릴 수 있을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이 또한 하나님이 언약을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들 선조인 아브라함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조건 없이 맺은 언약이라 자기들과는 크게 상관이 없고 안 지켜도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언약 백성인 것처럼 했어도 속으로는 딴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들이 비록 애굽의 노예 생활이 비참하고 고달파 여호와께 구원해달라고 빌었지만,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기적으로 구원해주자마자 바로 본색을 드러냈지 않습니까? 애굽에선 그래도 부추와 고기를 먹을 수 있었지만 광야에선 맛도 없는 만나뿐이라고 불평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떼를 쓰지 않았습니까? 언제 어디서든 자기 요구대로만 해주면 가나안이든 애굽이든 관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더러 자기들 가는 길로 따라오라고 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은 인간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위선을 떠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모든 세대의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은 제발 당신 앞에서만이라도 위선을 벗고 속에 있는 그대로 겉으로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그 소원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고 완성되었지 않습니까? 또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심중을 꿰뚫어 보실 뿐만 아니라 번듯한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애통하고 상한 심령의 제사를 가장 기쁘게 받으시지 않습니까?

위선적인 인간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은 당연히 역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도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보이다가 나중에 진짜 당신의 속을 보여야 인간도 자기 심중이 그 동안에 그대로 드러났음을 마침내 깨닫고 다음부터라도 그 속을 제대로 드러낼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일부러 인간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인간이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당신의 은혜 가운데에 머물기만 간절히 원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상벌을 주고 인간의 상식이 이해되는 대로 세상을 운행하시면 인간은 누구나 상벌이 아쉽고 세상에서 실패하지 않으려는 목적만으로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소원하는 것이 하나님 그분인지 그분이 주는 보상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결과적으로도 인간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목적은 실패로 돌아가고 인간으로 오직 현실의 보상만 찾게 만들어 버립니다.  

예루살렘의 가증스런 반역에도 언약을 취소하지 않고 오히려 더 굳건하게 세우겠다는 역설을 베푼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내가 네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63절) 역설로 대해야만 네가 놀라고 부끄러워져서 또 다시 하나님을 벗어나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접을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항상 최종 목적지가 다른 것이 문제가 되지 그 능력과 지혜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는 길만 바르면, 즉 하나님 안에만 있으면 인간이 앞으로 엎드러지든 뒤로 넘어지든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분의 능력과 지혜만 얻으려고 그분 앞에서조차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면을 벗길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역설이 문자 그대로 다 이루어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뿐입니다. 하나님이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고 당신의 생명마저 죽이는 역설 앞에 감히 인간이 어찌 위선을 떨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거나 또 그렇게 하고 있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습니다. 스스로 진노의 불꽃을 자기 머리에 쌓고 있는 짓입니다.

지금 불신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신자인 우리가 이전에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이스라엘처럼 옛날 애굽을 그리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뭄에 콩 나듯 하면 그나마 괜찮습니다. 너무나 자주 그러니 하나님이 다시 언약을 세워주실 여지마저 우리 스스로 줄여 나가는 것은 아닐까요?

7/5/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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