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진짜 영광은?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3:13)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무나 이상한(?) 당부를 했습니다. 본서는 그가 로마에 일차 투옥 되었을 때에 쓴 서신입니다. 말하자면 자신이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에 대해 낙심하지 말라고 권한 것입니다. 그럼 전혀 이상하지 않고 너무나 정상적인 부탁이지 않습니까?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자기가 당한 환난이 그들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신자가 당할 환난을 사역자가 대신 혹은 대표로 겪으니까 자기들은 평안히 지낼 수 있다는 뜻입니까? 말하자면 훌륭한 목자를 두어 다행이라는 것입니까? 물론 그런 뜻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환난을 허락하셨기에 낙심할 문제가 아니라는 정도로 그치지 않고 오히려 신자들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그 낙심하는 내용과 견주어 상반되는 의미를 따져 보아야할 것입니다.
신자들이 바울의 투옥에 대해 왜 낙심했겠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아니 정말 모든 것 희생하며 열심히 충성한 종을 하나님이 저렇게 심한 고생을 시킬 수 있는 것인가? 안락과 형통은 주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환난은 막아주셔야 하지 않는가? 주의 큰일을 하려면 꼭 연단과 환난을 거쳐야만 하는가? 바울을 보니까 섣불리 주의 일을 해서도 안 되겠네.”
바울은 우선 그 생각이 틀렸으니 버리라고 합니다. 물론 어지간한 믿음만 있어도 그런 의아심과 불만은 비성경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적 본성에 따라 자연스레 생기는 감정의 흐름인 줄 압니다. 그래서 이와는 다르게 사도의 환난이 신자들의 영광이 된다는 점까지 깨달아야만 온전한 믿음이 된다고 권면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본문은 사도가 여러 환난을 당했고 지금도 매여 있는 것을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신자에게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바울의 대적이 아닌 다음에는 쌤통이라고 즐길 수 있는 감정이 생길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를 개인적으로 알고 염려해줌으로써 그의 위대함에 동승했기에 즐거워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대통령과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이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사람들도 부러워하는 식은 결코 아닙니다. 최소한 그의 환난으로 인해 자신들에게 유익이 생긴다는, 혹은 자신들의 유익 때문에 그가 환난당하고 있다는 인식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2,4-6절)
본문의 바로 앞에 나오는 내용인데, 한 마디로 에베소 이방인들이 바울을 통해 올바른 복음을 깨달아 구원을 얻게 된 것이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와 지체가 되어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큰 영광이냐는 뜻입니다.
역으로 말해 바울은 그들로 하나님의 후사로 만들게 해주는 바람에 여러 환난을 겪었고 지금도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로서 반드시 해야 할 바를 충성되게 수행했기에 마땅히 받아야 할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복음을 전하거나 아예 전하지 않았다면 당하지 않았을 환난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예수의 약속에 이미 참예한 자이기에 어떤 환난을 겪어도 상관없지만 자기가 가르친 교인들이 잘못된 낙심을 버리고 온전한 복음 안에 서있기만 하면 예수로 인해 반드시 영광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기까지 설명을 듣고 보니까 여전히 아주 지당한 당부이지 이상할 것 없다고 생각되어집니까? 그럼 바울의 당부가 진짜 이상하다고 여겨질 까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목사를 잘 대접하여야 복을 받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목사가 대표가 되어 혹은 대신해서 형통해야 신자들도 형통하게 된다는 반강제성(?) 권유와 본문의 바울의 권면과 정말 진지하게 비교해보십시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딤전5:17,18)
이처럼 본문을 기록한 바울도 이를테면 목사를 잘 대접하라는 당부는 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끼리 사랑으로 섬기고 지도자를 존경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세상의 단체도 다 그러합니다. 정작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욱 존경하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가르치는 자라서가 아니라 배우는 내용이 너무 좋아서, 다른 지체들의 섬김보다 더 은혜롭기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로선 예수님과의 영적 교제가 다른 어떤 것보다 삶의 중심이자 목표로 삼아야, 정확하게는 이미 그렇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성도는 목사에게서 배운 내용만큼 존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복음을 바로 전하면 성도는 누가 강요 권면하지 않아도 자연히 존경하게 됩니다. 목사가 예수님의 약속을 정확하게 소개 초청해주며, 또 이미 참예한 자는 그 약속을 아름답게 가꾸도록 권면과 섬김으로 큰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목사라는 직분을 보고 무조건 존경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목사를 잘 대접해야 복 받는다는 말은 아예 없습니다. 목사가 신자들에게 진정한 복을 알게 해주면 신자도 그에 온당한 반응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서신의 말미에 구체적으로 에베소 교인들에게 재차 당부한 내용을 보십시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6:19,20) 그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내가 현재 쇠사슬에 매여 있더라도 전혀 낙심치 말고 복음의 비밀을 단 한 치의 굴절과 손상 없이 담대하게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 그러면 그것이 너희의 영광이 되리라.”
바울이 너무 이상한 당부를 하고 있다는 뜻은 오늘 날의 목사 가운데 이렇게 담대하게 선포하는 분을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십자가 복음의 절대적 진리성과 배타성을 선포하는 자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목회적 양심은 일부 살아 있어서 대놓고 성경과 다른 복음은 전하지 못하니까, 엉뚱하게 현실적 환난과 정신적 상처를 열심히 기도하고 잘 믿어서 벗어나라는 권면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대부분의 신자들 또한 아무도 이런 가르침과 현상을 의아하게 여기지 않으니 너무나 이상한 것 아닙니까? 오히려 잘 하는 일로, 혹은 너무나 당연한 가르침으로, 최소한 교회에서 으레 가르치는 내용이려니 여기고 치우니 말입니다.
본문은 단적으로 말하면 신자들더러 목사가 복음만 올바르게 전하다가 감옥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구하는 셈입니다. 신자들도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 있다면 복음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가 이상한 것이 아니고 오리려 영광스럽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그런 목사와 신자들을 찾기 힘들기에 낙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금 기독교가 약해진 원인이 바로 이것 아니겠습니까? 신자가 영광스럽게 여길 목회자를 찾기가 너무 힘드니까 또 신자도 거의 찾지 않으니까 (물론 그렇게 만든 목회자에게 원천적 잘못이 있음) 세상에 비쳐질 그리스도의 영광도 점점 줄고 있기 때문 아닙니까?
2/22/2010